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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3월의 가운데서

김주영 칼럼 [장애인과 교육 함께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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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포근했던 겨울이 물러가고 웬일로 다른 해보다 이른 봄이 오는가싶더니, 경칩(驚蟄)일을 전후하여 느닷없이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쳤다. 급기야 오늘 아침 출근길은 영하 10도까지 기온이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꽃샘추위라고 하기엔 가히 살인적이다.

장차법 제정 그 역사적 순간을 봄

휴대전화엔 밤새 확인하지 못한 문자메시지들이 여러 건 깜빡이고 있다. ‘장추련한나라당원내대표실점거중’, ‘한나라행정국장원내대표와전화’, ‘하지만우리는우리는원내대표와직접통화하거나방문하여’, ‘여섯시부터현재한나라당원내대표실점거중’, ….

발신자는 90년대 교육문제로 함께 고락을 했던 낯익은 이름이다. 늘 그 이름만으로도 반가운 사람, ‘장판’에서 그녀의 이름 석자를 모르면 간첩이랄 만큼 장애인 인권 운동가의 삶만을 고집해온 사람, 며칠 전 장차법안(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에관한법률)이 상임위를 통과하여 곧 본회의 결정만을 남겨두었다고 좋아라던 메시지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다.

그러나 밤새 국회 앞 천막농성장에서 영하의 추위와 싸우며 곱은 손가락으로 눌러 보냈을 그녀의 짤막짤막한 메시지들엔 굵은 다짐들로 아직 희망이 묻어있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장추련(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을위한추진연합회)’ 활동에 뛰어든 것도 벌써 2~3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나는 전화를 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힘내라는 말과 함께 미안함을 전하고 싶고, 언제나 이만큼의 거리에서 옷매무새만 고치며 행동이 더딘 나의 모습을 고백하고 싶어서이다.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명랑하다. 나는 애써 함께 있지 못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그러나 격려 받고 지지받아야 할 그녀가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지지한다. ‘너는 너의 할 일이 있고 지금까지 그 일을 잘 했다.’는 것이다. 나에겐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또다시 상황이 바뀌었다. 한나절 만에 본회의가 속개된다는 메시지가 떴다. 나는 인터넷 창을 열고 국회방송을 본다. 장향숙 의원의 대안 설명에 이어 출석의원 197명 중 196명의 찬성으로 7년만인 2007년 3월 6일 오후 5시 25분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마침내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우리나라 장애인 역사의 새 장이 열리는 순간이다.

유사(有史) 이래 장애인들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의 검은 그늘에서 교육과 노동, 이동 및 접근, 문화적 향유, 성(性)에 이르기까지 온갖 비참함을 겪어왔다. 그들은 시민이 아니었다. 장애인의 차별금지가 법제화 되었다는 것은 장애인이 비로소 우리사회의 당연한 시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장애인은 그동안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당당히 사회에 요구하고 보장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은 역사적이다.

차별과 건강한 사회 현상

차별은 인류가 이 지구상에 뿌리를 내려온 장구한 세월 동안 개인과 개인, 집단과 개인,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발생해 온 사회적 문제이다. 노예에서 귀족까지의 신분이나 종교 간의 신념, 정복국가와 식민국가, 자본가와 노동자, 지역, 인종, 성별, 연령, 심신의 건강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 생리적 조건에 의해 차별은 어느 곳에나 암(癌)처럼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 양자 관계의 헤게모니나 힘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차별을 당하는 쪽은 모멸과 굴욕감으로 자존감 상실에 따른 깊은 상처를 입게 되지만, 정작 표면적으로 그 사회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할 뿐이다. 반면에 두 사이의 헤게모니나 힘의 차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양자의 갈등은 커서 분쟁이나 전쟁으로까지 비화되는 등 표면적 양상은 심각해 보인다. 그러므로 의아스럽게도 양자 사이의 갈등이 크면 클수록 그 사회의 차별구조는 약화(弱化)된 상태이며, 그 사회는 훨씬 건강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차법 제정도 마찬가지이다. 그 성과는 어느 한 사람이 낸 것이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장애인들이 모여 차별을 성토하고 단체를 결성해 가며, 조직화되고 네트워크화 된 거대한 힘으로 이룩해 낸 것이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장애인의 문제는 개인의 불행쯤으로, 오직 개인이나 그 개인을 낳은 가족들의 멍에로만 치부되어 왔다. 그동안 개인으로서의 장애인은 공룡같이 거대하고 견고한 차별구조 속에서 비참한 상황과 부대껴야 했다. 개인으로서의 장애인이 사회를 향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전생(前生)의 업(業)이거니 하고 받아들이며 그럭저럭 살아가거나, 시장님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하거나, 사람들의 동정을 구하는 것 이상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사회는 아주 평온하고 질서 있고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뿐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외에 장애인의 삶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인으로서의 장애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차별을 몰아낼 수 있는 진정한 힘은 분산되어 살아가는 개인이 아니라, 자각한 다수의 모임과 그 안에서의 일치된 요구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사회의 장애인들은 사회적 차별에 대해 대응하고 제거할 수 있는 집단으로서의 힘을 가졌고, 마침내 자신의 차별을 금지하도록 대한민국 국회를 움직인 것이다.

함께걸음 회상

이러한 힘의 결집과 차별금지 법제화 운동의 뒤안길에는 일찍이 ‘함께걸음’이 있었다.
한국 민주화의 열기가 분수령을 이루던 1980년대 후반 일군의 젊은 장애인들이 ‘장애인은 친구’라는 의미로, 당시로서는 다소 낯설고 생경한 ‘장애우(障碍友)’라는 명칭을 들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결성하여 장애인 인권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나온 소식지가 ‘함께걸음’이다.

그들은 함께 걷는 사람들을 모으고, 장애인의 개별 목소리를 결집하여 분석하고, 체계적인 요구를 개발하여, 학계와 정치계 등에 홍보하는 한편 장애인 이해 및 인권교육(장애우대학)을 통해 보통시민들의 의식과 행동을 바꾸어 왔다. 이에 ‘함께걸음’은 그 예민한 눈과 귀로 장애인 차별과 인권유린을 찾아내고, 때로는 거친 목소리로, 그러나 아주 분명한 목소리로 “그러지 말라!”고 말해 왔다.

1980년대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장애인복지법’의 탄생을 보았고, 1990년대 ‘장애인 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과 전면 개정된 ‘특수교육진흥법’,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등 굵직굵직한 관련법들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10년 세월의 각고 끝에 파란만장한 장애인의 역사를 내려놓을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장애인들의 헤아리기 힘든 슬픔과 좌절과 절망과 생존한계를 이야기하면서 그 끝이 어딘가를 고민해 온 사람들 모두에 대한 축복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 현장에는 언제나 ‘함께걸음’이 있었다. ‘함께걸음’은 80년대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애인 권익의 지평을 열어온 본격적인 매거진(magazine)이다.
나는 20년 가까이 ‘함께걸음’의 독자로서 분노와 눈물이 더 많았던 그 질곡의 감정들을 함께 해 왔다. 여전히 ‘함께걸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인터넷 함께걸음과 칼럼인으로서의 다짐

‘함께걸음’이 새로워진다. 사이버 시대에 부응한 ‘인터넷 함께걸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한두 달씩 기다려 곰삭은 심층기사를 읽는 맛도 크지만,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요즘의 정보를 감당하기엔 인터넷을 따를 만한 매체도 없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장애인 관련 정보 제공의 수단으로 더 없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정보들을 듣볼 수 있는 단말기 보급률의 문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인터넷 ‘함께걸음’의 성공을 위해서는 장애인의 인터넷 단말기 보급 캠페인을 꾸준히 전개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지나친 속보성에 치우친 나머지 채 정제되지 않은 정보 전달이 가져다 줄 자극과 가벼움은 정확성과 사회적 공기로서의 책무를 생각할 때 더더욱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쟁점(issue) 뉴스에 대한 균형 있는 분석과 다양한 의견(opinion)을 생산해 내야 한다.

칼럼은 바로 이 같은 인터넷 뉴스의 한계점을 보완하는 매우 중요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유재찬의 ‘칼럼, 칼럼니스트론’에 따르면, 칼럼은 대개 그 때의 중요 관심사에 대한 논평 형식으로 칼럼인의 의견이나 감정이 제시되는 글이라고 한다. 또 사설이 언론사의 의견이라면, 칼럼은 순전히 개인의 아이디어나 의견이다. 따라서 반드시 기명으로 발표되는 특성을 지닌다. 그만큼 글쓴이의 신중함과 식견이 뒷받침되는 글이라는 의미다.

‘인터넷 함께걸음’에 참여하는 칼럼인의 한 사람으로서 네티즌들이 균형 있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앞으로 필자가 맡은 교육 인권 분야의 논점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할 것임을 다짐한다.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 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실로 7년만의 일이다. 이 역사적인 3월의 가운데 서서 네티즌 여러분과 함께 ‘함께걸음’의 새 모습 새 출발을 축하한다.

작성자김주영 (칼럼니스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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