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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총알처럼 목표를 향해 돌진할 거예요”

[사람 사는 이야기] 삶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사람 박명용 씨

본문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한번쯤 이런 갈등을 한다.
새장 안에 갇힌 채 안정된 먹이를 담보로 스스로 날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새장을 박차고 나가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며 창공으로 비상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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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물론 새장 밖의 삶은 안전이 보장되지도 않고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특히 장애가 있는 경우엔, 장애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설계된 사회구조와 차별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할 수도 있는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러나 박명용(39, 뇌성마비1급) 씨는 새장 안의 안온한 삶을 버리고 싸움을 선택했다. 자립생활이라는 말조차 없던 94년 재활원과 집에 ‘독립’을 선언한 것. 그는 전동휠체어가 없던 시절 오토바이를 개조해 타고 다니며 자기 손으로 지체장애인이 다닐 수 있는 고등학교도 만들어냈다.

유쾌한 웃음과 넉넉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여유를 지닌 사람, 박명용 씨를 <함께걸음>이 만나보았다.

꿈을 꾸다

“모든 건 꿈에서 시작됐어요. 꼭 하고 싶은 일, 목표가 있었으니까.”

박명용 씨가 소위 장애인의 ‘엘리트 코스’로 불렸던 삼육재활원에 다닌 건 78년부터 딱 2년뿐이었다. 당시 서울시민 한 달 생활비에 육박하는 10만원을 매달 학비로 내는 게 쉽지 않았던 데다 집안 사정이 겹치는 바람에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10살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는 16살이 될 때까지 줄곧 집안에 갇혀 지냈다.

그러다 다시 밖으로 나온 건, 16살이 되던 해 그가 살던 강원도 춘천에 처음으로 재활원이 생기면서부터다. 그는 곧 그 재활원에 들어갔다.

“장애가 있든 없든 아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 제 가능성을 열어준 건 16살에 재활원에서 만난 물리치료선생님이었어요. 그는 신앙으로 다가왔지만 저는 그분을 통해 목표를 정하고 꿈을 꾸기 시작했거든요.”

선교단체에서 교육을 받고 온 물리치료교사는 명용 씨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재활원 역시 갇힌 곳이라 다른 또래의 아이들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물리치료교사는 그런 면에서 사회와 재활원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단다.

그리고 여름에는 자기 월급을 털어 1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강가로 수련회를 가기도 했다. 유일하게 재활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인데다 강가인지라 아이들은 아침 6시에 눈을 떠 밤 10시에 잠들 때까지 성경공부만 시켜도 따라나섰단다.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게 좋을 리 없지만, 그래도 잠깐씩 시간이 나서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진 강가로 나가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사실 모레사장은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강에 들어가 물장난을 했다. 명용 씨도 그렇게 놀다 물에 떠내려가는 바람에 선생님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고.

그러는 사이 교회와 성경이 좋아졌고, 신학대학에 들어가 목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포기란 없다

박명용씨 사진  
ⓒ 전진호 기자  

재활원에 들어간 지 3년쯤 됐을 무렵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어느 날, 재활원 방에 누워있는데 황토색 잠바를 입고 짧게 자른 머리에 금테 안경을 쓴 어벙하게(?) 생긴 친구가 부모님과 함께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오영철이었어요.”

오영철(37, 뇌성마비1급) 씨는 어릴 때 삼육재활원에서 만난 친구다. 10년만의 첫 만남이었는데도 한눈에 알아봤다고. 그는 그와 함께 ‘독립’을 감행할, 그리고 그때부터 무려 13년을 붙어 지낼 친구를 그렇게 다시 만났다.

그 즈음 재활원 안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재활원 안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분교가 생겼던 것. 그는 초등학교 5학년에, 친구는 그보다 시험을 잘 봐서 6학년에 배정됐다. 그렇게 다시 공부가 시작됐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93년 친구가 먼저 중학교를 졸업하도록 고등학교 과정은 설치되지 않았다. 게다가 공부를 지속하겠다는 생각으로 지원했던 방송통신고등학교조차 휠체어를 이용한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다. 방송통신고등학교조차 받아주지 않는다면 갈 곳은 없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 재활원에 들어왔던 친구는 결국 학업이 중단되면서 서울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는 고민에 빠졌다. 목사가 되겠다는 꿈, 그 꿈을 이루려면 반드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친구가 겪은 과정은 곧 자신에게도 닥칠 일이었다. 고등학교 가기도 하늘의 별따기인데, 대학이라니... 혹시 남들이 비웃지나 않을까 싶어 사람들에게 말조차 하지 못한 채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끙끙대기만 했단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졸업을 1년 앞두고 틈틈이 서울로 나와 고등학교 과정이 있는 특수학교들을 찾아다녔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나이가 많다는 게 이유였다. 서울에 사는 친구도 같은 이유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고등학교에 가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스스로 환경을 만드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중학교 3학년 내내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오토바이를 타고, 독립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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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우선, 강원도 춘천에 장애가 있는 사람도 다닐 수 있는 고등학교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려면 재활원을 나가 스스로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활동성이 필요했다. 수동휠체어로는 불가능했다. 그때 어느 선교지에서 삼륜오토바이 개조에 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싶었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타고 돌아다닐 수 있을 듯 했다.

그러나 곧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죽고 싶어 환장했냐”는 말부터 “집안 말아먹을 생각이냐”는 얘기까지, 들을 만한 욕은 다 들었다. 그러나 꿈을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었다. 평생을 이대로 사느냐, 아니면 꿈을 이룰 것이냐가 달렸으니까. 그래서 결국 부모 가슴에 못을 박았다. “이렇게 70~80살까지 사느니,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다 빨리 죽겠다!”고.

그리고 내친 김에 독립도 결심했다.

당시엔 대학에 ‘기숙사’가 있다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대학에 들어가면 자취를 해야 하는 줄 알고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았다. 당시엔 자립생활 이념도 없고 중증 장애인이 혼자서 살 수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때였으니 또다시 부모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그는 부모님을 상대로 ‘독립 운동’을 했다.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고 재활원을 나온 그는, 부모님을 설득해 재활원 근처 원룸을 전세로 빌릴 수 있었다.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다시 집에 갇혀 살 수는 없었어요.”

그렇게 준비를 마친 그는 먼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갔던 영철 씨를 꼬셨다.
“나 오토바이를 샀어. 자취할 집도 마련했어. 그리고 춘천에 고등학교를 만들어보려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거야. 쉽진 않겠지만 공부를 계속 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이다.

당시 서울국립재활원에서 받던 1년짜리 직업교육이 끝나면 다시 집에 갇혀 지내야 하는 영철 씨에게 이 유혹은 강력한 것이었다.

“집에 있는 게 말이 쉽지 완전히 창살 없는 감옥살이에요. 하는 일도 없이 죽은 사람처럼. 제가 그 생활을 해봐서 너무 잘 알았죠. 영철이도 이미 겪어봤잖아요. 게다가 공부도 계속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불렀어요.”

영철 씨는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동휠체어를 타고 깨작대고 다녀야했던 것이 삼륜오토바이를 이용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면허? 물론 없었다. 게다가 둘 다 머리도 커서 오토바이 헬멧조차 들어가지 않았다고.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건 삶의 혁명이었으니까. 그들은 이미 94년에 전동휠체어가 가져다준 삶의 혁명을 만나고 있었다.

친구는 곧바로 커다란 가방에 짐을 가득 싣고 그의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온 사람처럼.

고등학교를 만들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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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그렇게 그들의 독립이 시작됐다. 8평쯤 되는 방에 가구라고는 더블침대 1개, 책상 1개, 싱크대 1개, 가스레인지 1개가 전부였다.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어서 싱크대에서 씻고 조금 별난 자세로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자취생활이 어렵지 않았냐니까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밥은 밥솥이 하고, 반찬은 엄마가 반찬가게를 해서...”라며 환히 웃는다. 장애가 있다고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는 얘기였다. 물론 가끔은 직접 요리도 해 먹었다. 처음엔 맛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다 넣는 바람에 ‘꿀꿀이 죽’을 만들기도 했지만, 요리 실력도 나날이 늘었다.

오토바이 운전에 자신감이 생기고 자취생활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부터 명용 씨는 도청, 시청, 도교육청을 찾아다니며 장애인이 다닐 수 있는 고등학교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세 곳이 모두 그가 살던 춘천에 있었다는 게 천만 다행이었다.

“처음엔 무작정 이런 관청들을 찾아가서 뭘 어찌해야하나 고민했어요. 그런데 예전에 만화책에서 읽었던 말이 떠올랐죠. ‘싸울 땐 무조건 꼰대부터 조져라!’”

그래서 그는 도청에 들어가자마자 다짜고짜 ‘도지사를 불러 달라’고 했단다. 당황하기는 상대방도 마찬가지. 그가 처음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장애인을 흔히 보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세상에, 중증 장애인가, 그것도 개조한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서는, 대뜸 도지사를 불러달라니... 다들 기막혀 하는 표정이었다고.

어쨌든 조금 시간이 지나니 부지사가 나왔다. 그때부터 그는 부지사를 붙잡고 따지기 시작했다. “우리를 식충이로 살게 할 거냐. 성장시켜서 세금 내게 해야 하는 게 아니냐. 아무리 강원도가 후진 지역이라고 해도 고등학교는 있어야 할 게 아니냐.”고 말이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고등학교를 만드는 행정절차를 알게 됐는데 계획안을 만드는 데 1년, 심의하고 결정하는데 1년, 확정하고 공사를 시작하는데 또 1년, 그렇게 무려 3년이 걸렸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어딜 가도, 누굴 만나도 “계획도 없이 지금 상태로는 어렵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연락처, 이름, 주소를 적어주고 돌아왔다. 결국 어디서도 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다녔던 게 6월이었는데 10월말쯤 도교육청에서 연락이 왔다. 내년에 고등학교가 생긴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재활원에 분교로 설치됐던 동원학교에서 재활원 분교를 없애고 본교 안에 지체장애인을 위한 초, 중, 고등학교 학급을 설치한다는 계획이었다. 3년이 걸려도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이듬해부터 그들은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다.

스스로 환경을 만드는 사람

독립, 그 한번의 결심으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편의시설도 제대로 안 된 곳에서 어떻게 우리끼리 자취를 했나 싶은데, 돌아보면 그 시절만큼 소중한 때가 없어요. 그 때가 없었다면 지금은 아마 하는 일 없이 집에만 있겠죠.”

그는 아직도 그때 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단다. 뭘 본 것도, 배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오토바이를 개조하고 자취를 할 생각을 했을까.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목사가 되겠다는, 꼭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내 삶을 스스로 꾸려가겠다는 목표 말이에요.”

그는 98년 마침내 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신학교들은 홍보용 책자만으로도 갈 수 없다는 게 분명했는데, 침례신학대학교는 오토바이만 있으면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결국 명용 씨는 꿈을 향한 첫 번째 목표를 그렇게 달성했다.

고등학교 졸업식은 대단했다. 지역 라디오는 물론 서울 모 방송에서도 취재를 하러 왔다. 강원도에서 특수학교 첫 고등학교 졸업생이자 첫 대학 입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말리던 부모님도 그 순간만큼은 대단히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게 그들은 학교에 살아있는 역사로 남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명용 씨와 영철 씨는 또다시 학교 기숙사 앞, 뒤 방에 붙어살면서 4년을 보냈다.

“대학 2학년 때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탈 수 없게 됐어요. 아는 거 얘기하며 잘난 척(?) 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에 책 읽는 것도 힘들어져서 고생했죠.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통해, 사람을 통해 얻은 게 많았어요.”

물론 대학에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 고생을 하기도 했다. 강의동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달라고 그렇게 노래를 했는데, 어느 기부자가 “학교에 연못을 만들어 달라”며 기부하는 바람에 학교에 엘리베이터보다 연못이 먼저 만들어질 때는 서운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도 스스로 환경을 만들어갔다. 결국 졸업할 때쯤이었지만 강의동에 엘리베이터도 생겼고, 장애인을 위한 휴게실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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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호 기자  


총알처럼 목표를 향해 돌진

요즘 그는 오토바이 대신 전동휠체어를 이용한다. 2001년 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전동휠체어 나눔 행사를 할 때 그는 54대1의 경쟁을 뚫고 전동휠체어를 받았다.

“그때 장문의 편지를 썼죠. 다들 그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저만 편지를 썼더라고요. 정말 절박했는데, 비굴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편지에 이렇게 썼죠. ‘나에게 전동휠체어를 준다면 후원이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하겠다. 난 분명 사회에 무엇인가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의 꿈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명용 씨는 현재 대학원까지 마치고 전도사 시취(인정서)까지 받은 상태. 이제 교회에서 3년간 일을 하고 목사 시험을 보면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

“목사가 되려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제겐 이게 마지막 남은 난관이에요. 결혼하면 아이들은 12명은 낳아 재미나게 살고 싶은데...”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나는데, 물어보니 한사람을 해바라기를 한지 꽤 오래됐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그는 아직도 꿈을 이루기 위해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작은 총알이 왜 무서운지 아세요? 자신의 몸이 부서져라 돌진하기 때문이에요. 작은 총알이 목표물에 부딪힐 때 힘이 무려 6톤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총알처럼 목표를 향해 돌진할 겁니다.”

지금까지 많은 것을 이뤄왔는데도 목표를 향한 그의 열정은 아직도 그는 식지 않았다. 목사가 돼 목회를 하고 싶다는,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바램이 결실을 맺기를 함께 기도해본다.

 

작성자글 조은영 기자 / 사진 전진호 기자  blank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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