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나무 밑에서 색동저고리 입고 > 지난 칼럼


벚꽃 나무 밑에서 색동저고리 입고

[해외의 장애인]일본 오사카에서 온 편지 여섯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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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도 하순이라고 봄의 문턱을 넘어서는 듯하더니, 어제는 덥다 오늘은 춥다 종잡을 수 없이 변덕스러우네요. 이런 봄날씨를 우리네는 여자에 비유하는 게 보통인데, 일본에서는 남자 마음 같다고 한대요.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여자와 남자로 비유하는 대상이 반대인 것을 보면, 그 나라마다 바라보는 문화적 관점에 참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이렇듯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도 선명하게 물들어가는 봄의 색깔들을 보며, 그 누구나 마음이 설레고 눈길을 멈추게 됩니다. 노오란 개나리, 연분홍 진달래…. 그런데 일본에서는 개나리, 진달래는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어요.

봄의 화신은 누가 뭐래도 사쿠라라고 부르는 벚꽃이에요. 일본 어디를 가도 공원이나 사람들의 눈에 띨 만한 곳에는 벚꽃 나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요. 매일 일기예보 시간에는 각 지역의 벚꽃 개화 시기를 알리는 뉴스가 빠지지 않고요. 벚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곳곳에서는 벚꽃놀이 예정을 잡고 ‘하나벤토(꽃놀이 도시락)’이라는 것을 준비한답니다. 국토의 남쪽에서부터 북쪽까지 그야말로 전 국민적인 이벤트라고 할 정도예요. 더욱이 일본 사람들의 벚꽃에 대한 애착심이 유난히 깊어, 해마다 사쿠라(벚꽃)라는 타이틀의 히트곡이 나오고요.

정말 유별나다 싶지만, 그 이유의 하나로 벚꽃이 일본의 국화라는 것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일본이라는 나라를 하나로 색깔로 뭉치게 하려는 내셔널리즘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요. 춥고 움츠렸던 잿빛 나무에 피어나는 연분홍 벚꽃이 사람들의 마음에 화사한 용기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지만, 피어나는 그 순간부터 산산히 지는 꽃잎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그 옛날 총독부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고 벚꽃을 심어 꽃놀이를 즐기게 했던 그 의도의 치밀함에 다시 한번 섬뜩해지기도 합니다.

자기 말을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간 남편
벚꽃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시기는 또 졸업과 입학의 계절이기도 해요. 한국에서는 2월 졸업, 3월 입학과 신년도가 시작되지만 일본에서는 3월 말이 졸업, 4월 초가 입학, 신학기예요. 초·중·고 학부는 한국과 같지만 1학기는 4월부터 8월, 2학기가 9월부터 12월, 3학기가 1월부터 3월까지로 전부 3학기제랍니다. 방학도 겨울방학은 2주일 정도밖에 없고, 대신 봄방학이 2주일 정도랍니다. 한겨울인 1월에도 반바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 한국 같으면 설날이라고 후끈후끈한 안방에 모여 앉아 뜨끈한 떡국을 후후 떠먹는 날, 자전거를 타고 놀이터로 놀러 가는 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다르다 싶어요.

우리 아이들, 벌써 큰 아이는 6학년이 되고, 작은 아이는 3학년이 되는데요. 처음 학교에 보낼 때는 어찌해야 하나 생각이 많았어요. 가깝고 학비도 들지 않는 동네의 일본공립학교에 보낼 것인지, 아니면…. 남편은 아이들에게 일본인에게 하는 교육은 시키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일본 땅에 살지만 자기의 뿌리를 알고 긍지를 가지면서 살 수 있도록 민족교육을 시키고 싶다고요.

초·중·고 전부 일본학교를 다녔던 남편은 ‘도시아키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냈지만, 자기가 다른 일본인 아이들과는 달리 할아버지가 제주도에서 오신 한국인인데도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 이름도 모르며, 한국인이라고도 당당하게 말하면서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고 해요. 그래서 늦게나마 자기 나라를 알고, 자기 나라 말을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고요.

일본인과는 다른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 살고 있는 재일동포이니, 그 역사를 알고 현재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남달리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 더욱 더 신중히 학교를 선택할 수밖에요.

야구 한·일전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우리 아이들
전에도 소개한 바가 있지만, 저희가 사는 곳은 코리언타운이라고 해서 식민지 때부터 일본으로 오신 분들이 많이 살고 계신 지역인데요. 이름은 일본식 이름을 쓰고 살아도 재일동포 1세부터 4세, 5세까지 한국, 조선 국적을 가지고 살고 계신 분들이 많아요.

그 분들이 처음 이 곳에 삶터를 정하셨을 때는 창씨개명을 한 이름을 써야 했고, 식민지에서 온 이등국민으로 살아야 했으니, 온갖 차별을 받으며 얼마나 쓰라린 생활이었겠어요. 개중에는 집안이 웬만해서 유학을 온 사람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십중팔구는 하루 먹고 사는 것이 버거워서 일자리가 있다는 말에 배를 타고 생면부지 낯선 땅에 오신 분들인데다가, 일이라고 해도 힘겨운 중노동에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가 고작인 고달픈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자식들 교육에는 무엇보다도 열정을 쏟았대요. 자식이야 나보다 나은 생활하기를 바라는 우리네 부모 마음은 똑같을 테니까요. 그런 가운데 조국이 해방은 되었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배편이 제한되어 있어 돌아갈 수 없었던 많은 동포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무엇보다도 먼저 아이들에게 그동안 잃어버렸던 말과 글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가르치는 민족학교를 자치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답니다. 그렇지만 조선인인데도 일본인으로 불려지며 살다가, 전쟁이 끝났다고 하루아침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척박한 일본땅에서 동포들의 주장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요.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의 GHQ의 명령에 의해, 동포들이 애써 세운 민족학교들은 문을 닫게 되고 아무런 인정도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답니다. 그때 많은 동포들이 식민지 지배로 인해 박탈당했던 민족교육의 권리회복을 외치며, 시위도 하고 일본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대요.

그 가운데 시위 중 경찰의 총탄을 맞고 고등학생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까지 벌어지는 극박한 상황을 불러 일으켰답니다. 경찰 앞에 맨손으로 대항하는 과정에서 더 큰 비극이 벌어질 수 있다는 염려에, 동포들은 시위를 자제하고 행정기관과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특별조치로 ‘민족학급 시간’이라는 특별활동시간을 설치하도로 한다는 약속의 문서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답니다.

결국 자치적으로 세웠던 많은 학교들은 폐교가 되고 아이들은 일본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민족학급 시간에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우고 접할 수는 있었지만, 학교의 무관심과 어려운 환경 속에 유지되기가 아주 어려웠다고요.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욱 더 민족학급은 고립 방치되어가고, 피를 흘리면서 따낸 민족교육의 장은 점점 그 명맥이 희미해져 갔대요. 그러다가 다시 20여 년 전부터 민족학급을 되살리는 운동을 일으켜, 지금 현재 오사카에는 100군데 이상의 학교에서 민족학급이 운영되고 있어요.

저희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도 전교생의 70% 이상이 한국이나 조선국적, 부모의 어느 한쪽이 한반도에 뿌리를 가진 이들의 아이들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민족학급도 꽤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편으로, 한국의 역사를 배우기도 하고 악기나 노래 등 훌륭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귀중한 만남을 갖지요.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제한된 시간이다보니 아이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거나 쓸 수는 없답니다.

그리고 이맘 때면 색동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은 아이들이 학교의 입학, 졸업식과는 별도로 민족학급 수료식과 입학식을 한답니다. 벚꽃이 만발한 학교 정문 앞에서 민족학급 선생님, 부모와 아이들이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를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그 모습에는, 일본에 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당당함이 담겨져 있어요. 모두가 함께 어울려 물들이는 그 색깔의 향연을 과연 무슨 색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마다 다르지만 저마다 빛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말이에요.

저희 아이는 재일동포들이 해방 후 세워서 운영해오고 있는 건국이라는 민족학교에 보내기로 했답니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이어서 처음에는 어린 아들을 보내기에 꺼려지는 점도 많았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학교에 재미있게 다니고 있어요. WBC야구대회에서도 목청껏 한국을 응원하면서 일본을 이겼을 때는 환성을 지르고, 일본에 아깝게 졌을 때는 속상해서 울기도 하는 한국에 사는 그 어느 아이와도 다르지 않게 말이에요.

작성자변미양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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