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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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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도 머지 않았는데 봄은 어디 숨어 있는지, 아직도 많이 춥네요.

날씨가 추우니 휠체어 타고 바깥나들이 나가는 것도 더 움츠러들고 머뭇거려지는 게 사실인데요. 그래도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시장에도 가야하고 이런저런 일도 있고. 특히 요즘은 큰애의 중학교 입학 수속 때문에 학교에 가는 일이 자주 생기네요. 그럴 때면 저희처럼 이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외출이 부담스럽지요. 주머니 사정이 뻔한데 외출 때마다 택시를 탈 수도 없고.

오사카는 전철, 지하철 노선이 잘 정비되어 있어 시민들은 보통 근거리 이동은 자전거, 일반 출퇴근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요. 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서는 최근 장애인뿐만 아니라 고령자의 이용이 높기 때문에 휠체어 그대로 탈 수 있는 리프트 택시도 많이 운행되고 있고, 웬만한 택시운전사들도 휠체어에 대한 대응을 잘 해주어서 일반택시를 타도 큰 불편은 없는 편이에요.

그리고 오사카 시내의 전철,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완비되어 있어 역에서의 승하차도 그리 큰 문제는 없답니다. 하지만 저희같이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은 역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이 간단하지만은 않지요. 보이지 않는 돌변사태에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나서야 하니까요.

얼마 전 일인데요. 볼일이 생겨 이날은 전철을 이용하기로 했답니다. 수동휠체어를 타고 집을 나서 역까지는 택시로 이동, 그리고 전철로 이동하여 돌아오는 예정을 잡았지요. 다행히 그날의 일정을 순조로이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전철을 타고 내릴 때의 일이었지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전철 플랫폼과 전철 사이가 꽤 많이 벌어져 있고 높낮이도 크잖아요.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승하차할 때는 많이 위험한데요.

그래서 휠체어로 승차할 때는 미리 역 입구에서 역무원에게 서비스를 신청해 놓으면 승차역과 갈아타는 역, 그리고 하차역에서 시간에 맞춰 역무원이 ‘슬로프’라는 도구를 들고 나와 대기하다가 승하차를 도와주는 서비스를 해준답니다. 물론 무척 고마운 일이지요. 엘리베이터나 경사로 등의 편의시설만으로는 부족한 틈을 매워주는 안심감을 주지요. 그러니까 저도 전철 등을 이용할 때는 꼭 이 서비스를 신청하고 있답니다.

그날도 전철을 타기 전에 미리 신청을 해놓았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역에서 내릴 때도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역무원의 모습을 확인하며 안심을 했고,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하차를 했습니다. 역무원은 보통 출구로 연결된 엘리베이터 앞까지 안내를 해주는데요. 그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리가토우 고사이마스(고마워요)”라는 인사말을 간단히 건네고 엘리베이터에 탔지요. 이제 곧 집에 도착한다는 안심감과 더불어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는 뿌듯함에 기분도 좋았어요.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 한분이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시더군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직후였어요. 아무 생각 없이 출구를 향해 휠체어 바퀴를 돌리고 있던 저에게 그분이 말을 거시더군요.

“잠깐 이야기해도 돼요?”
“네.”
“내가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역무원이 전철 내릴 때부터 쭉 도와주고 있더군요.”
“네.”
“그렇다면, 그 신세를 진 역무원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네?”
“당신을 위해서 일부러 그 분이 일을 중단하고 시간을 내어 수고를 해주었으니까, 고맙다고 잘 인사해야 하잖아요!”


여러분이라면 이 때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그분의 설교에 순간 저는 정말 당황스러웠답니다.

잠깐 말문이 막혔던 제가 할 수 있었던 대꾸는 그저 “고맙다고 말했는데요!”라는 떨리는 말뿐이었어요. 얼굴이 벌개지며 흥분하고 있는 저를 보며 그 아주머니는 “그럼, 됐어요.”라고 짧게 말하더니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승차장으로 올라가더군요.

아, 어쩌면 좋아, 이 황당스러움! 나에게 그 말을 하려고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왔었나봐. 그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더군요. 집에 돌아오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정신이 멍해진 저에게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것 같았어요.

일본에 와서 저는 안심하고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는 시간의 여유로움에 감사했답니다. 휠체어를 탄 저를 위해 엘리베이터의 문 앞에서 대기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 주는 이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느꼈어요.

그리고 버스를 타든, 전철을 타든, 지하철을 타든, 택시를 타든 서비스를 해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 가는 이 사회의 시스템에 대하여 성숙함을 느꼈답니다. 물론 처음부터 간단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요. 몇 십년간의 긴 투쟁과 주장을 통해 만들어낸 것이고 바꿔온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기에는 여전히 많은 장벽이 널려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설비나 시설 몇 개가 바뀌었다고 해도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셀 수 없을 만큼의 장벽이 깔려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신체적·정신적인 걸림돌을 넘어가며 사회로 다가갈 수 있는 참여의 첫길, 그 자연스럽고 당연한 권리가 접근권일 텐데요. 그것이 “감사합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또 정중한 태도를 갖추는 의무를 치러야만 하는 것일까요?

장애인은 사회에 폐를 끼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적지 않다는 높은 장벽을 확인하는 외출이었답니다.
작성자변미양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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