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氏, 인권 교육을 믿지 마세요 > 지난 칼럼


인권 氏, 인권 교육을 믿지 마세요

화성에서 온 ‘인권’과 금성에서 온 ‘인권교육’, 그 갈등과 화해

본문

이 원고는 지난 4월 23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제10차 인권교육포럼 - 인권, 시민권 그리고 장애인 인권교육에서 김형수 사무국장이 발제했던 원고를 재구성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아빠가 담배를 비벼 끄고는 새 담배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슈나이더 씨의 말을 들으며 계속 머리를 흔들었다.

“슈나이더 씨, 평화를 믿지 마세요.”」 한스 페터 리히터(Hans Peter Richter)의 『그 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중에서』


 

    ▲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 현상 1. 인권교육, 시장이 형성되고 ‘교양’으로 거래되다
2007년 인권교육에 관한 법률이 국무회의 통과되고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tional Action Plan: 일명 NAP, 2007~2011)수립 이후 공공기관에서의 인권교육이 의무화되었다. 그러면서 장애인 단체나 활동가들이 인식하기도 전에 기업과 주민을 상대로 각종 교양강좌를 열던 전문 단체나 종교 기관들이 그 주제들을 하나 둘씩 장애인 인식 개선이나 장애인 인권교육으로 내걸면서 인권교육을 ‘사업’으로 경영하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 인권교육의 목적과 목표가 사업으로서의 지속성과 수익성 제고라는 본질적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 목적과 목표를 근본 변경하지 않는 한 그들의 인권교육은 교양적인 차원에서 단순히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동시에 향후 계속해서 의뢰를 받을 수 있는, 부담 없는 것만이 되어야 한다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 문제 제기 1. 수익성과 지속성을 추구하는 인권교육의 사업성은 괜찮은가?
그렇다면 그런 인권교육을 아무리 많이 시간 동안 받는다 한들, 그 인권교육을 재미있게 받은 기업들이 장애인 고용을 차별없이 할 것이며, 장애인 직원을 인권의 원칙에 맞게 대우하며, 그 기업의 직원들이 장애인을 동등한 조직 구성원으로 관계 맺을 수 있을 것인가?

민감한 문제지만 사업과 경영으로서의 인권교육에 수익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인권교육을 사업성을 가진 프로그램으로 진행할 경우 - 효율성은 증가하겠지만 -에 발생하는 가장 큰 폐해는 교육 방법이나 시간들을 교육 의뢰자의 입장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위험성이 커진다는 사실이다.

인권교육을 시행하는 개인이나 단체들이 인권교육의 원칙에 따라 그 과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뢰자의 편의에 따라 종속되는 위험이 있다.

# 현상 2. 장애인에 관한 모든 교육은 인권 교육인가?
각 지역 교육청의 특수교육지원센터는 일반적으로 그 기관 재량껏 ‘장애인이해교육’이란 이름으로 인권교육을 진행한다. 그 장애인이해교육이란 것이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인권교육에 전적으로 맞느냐하는 것은 논쟁할 수 있지만, 각 교육청의 ‘장애인이해교육’이 전혀 인권교육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또한 ‘장애인이해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육은 각 지역의 장애인복지관에서 주로 사회재활팀에서도 주된 사업으로 진행되고 빈번하게 의뢰된다. 최근에는 각 지역사회의 장애인자립생활의 장애인당사자들이 이 같은 장애인이해교육을 진행하려고 경쟁하며 교육청이나 복지관에 공식적으로 참여시켜 줄 것을 종종 제안하기도 한다.

# 문제제기 2. 장애인당사자는 인권교육의 전문가인가?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장애인 당사자들이 인권교육에 충분한 준비를 하거나 훈련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권의 당사자라고 해서 해당 인권을 잘 안다거나 인권교육에 전문성이 담보된다고 할 수 없다. 훈련되지 않은 장애인 당사자의 경험과 욕구가 장애인이란 사회 약자의 인권과 차별로 전부 환치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권교육의 전문성 및 농도는 바로 그 인권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또한 인권교육 안에 장애인이해교육과 인식개선교육이 일부 포함될 수는 있지만 장애인이해교육과 인식개선 교육이 인권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동시에, 장애인의 몰이해와 인식부족은 장애인의 차별과 소외의 여러 원인 중에 하나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며 장애인 당사자 개인이 자신의 장애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거나 장애인 전체의 인식부족을 대변할 수도 없다.

사례 1. 사회복지서비스가 인권보다 우선한다?
정신장애인 청소년이 올해 수도권 소재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했다. 수능에서 평균보다 높은 성적을 얻었지만 혹시 모를 입학거부와 대학 적응을 위해 면접이 없는 대학에 지원을 했는데 뛰어난 전공 실력과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훌륭하게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교 친구나 교수 누구도 그가 정신장애인이란 것을 알지 못했고 그의 학업 능력을 의심 받지도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그가 사회적응과 정신분열증 치료를 위해 다니던 사회복지기관 사회복지사가 갑자기 학생의 학과장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그 학생이 정신분열증임을 알리고 특별한 배려를 부탁했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동의나 가족의 동의 절차는 전혀 없었다. 그 사회복지사가 전화를 한 이유를 알아보니, 그 교수에게 이해를 구하고 배려를 받지 않으면 정신 분열로 인한 사고의 단절이 심해질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 장애인 학생은 그 누구보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학업 성적도 최우수 수준에 있었으며 정신장애로 인한 어떤 지원을 요구하거나 어떤 어려움, 불안도 토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그 학과의 교수 모두는 그 학생이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정신 장애인임을 알게 되었다.

# 문제제기 3. 장애인 관련 전문가들은 인권교육도 전문가인가?
무엇보다 민감한 개인 질환에 관한 정보를 실정법까지 어겨가면서 - 당사자의 동의절차 없이- 그 교수에게 알려주었을까?

그 전문가의 판단은 가족과 당사자가 본인의 장애를 감추는 것은 그 사회복지사가 개입해야 할 문제이며, 본인은 그 교수에게 알려주는 것이 시회복지사로서의 서비스를 적극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원과 배려 없이는 그 정신장애인 학생의 장애와 불안, 그리고 사고의 단절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 사정(査定)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의욕이 앞선 일부 사회복지사의 단순 실수라고 보기엔, 그 당사자가 감내해야 할 낙인과 차별의 크기가 책임질 수 없는 폭로가 되어버린 아우팅(Outing)이었다. 그 아우팅의 원인은 사회복지의 기본적인 인권보호보다 사회복지 서비스가 우선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장애인 당사자의 감수성보다 사회복지사의 전문성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회복지의 전문성과 서비스가 바로 ‘인권’의 완성이라고 혼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복지 서비스와 전문성이 인권의 원칙이 지키지 않았을 때 그것은 언제든지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와 대중들은 사회복지사와 의사, 또는 특수교사들에게 그들의 전문성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그들을 인권옹호자로 생각하거나 인권교육을 실제로 맡겨 버린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전문가 스스로 본인이 인권적인지 아닌지 점검하거나 의심보지 않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위에 언급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문제와 실수와 저급한 감수성을 갖고 있지만, 10년 넘게 인권활동가로 5년 넘게 인권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인 당사자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고 불안하다. 그 긴장과 불안의 원인은 사람들이 나의 ‘장애’를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나의 ‘고통’의 크기를 인권의 크기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점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사자로서 장애인의 인권에는 민감하나 다른 영역과 다른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에는 둔감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기도 하다. 장애인과 다른 소수자의 인권과 이해 관계가 충돌했을 때, 나는 단순한 이해 관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인권’의 눈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와 함께 장애인 당사자로서 가지는 인권의 확신과 입장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강사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공격 받거나 도전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존재한다. 내 개인의 장애가 강제로 ‘사회화’되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내가 사람들 앞에 민망하게 넘어질 것을 늘 상상하면서도, 공격받고 비판받음에 두려워하면서도 강의에 나서는 것은 그렇게 견디는 것 자체가 인권교육의 존재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 자기 자신을 수용하고 보호하게 하는 것 - 당사자의 인권교육 참여는 열려 있는가?
장애인이라는 인권 당사자의 자존감을 보여 주는 것,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장애가 내 개인의 육체적인 고통임은 인정하면서도 그것 자체가 내 인격과 내 자신의 일부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권당사자의 존재성, 개별성, 정체성을 긍정하게 하는 것이 인격 교육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인권교육은 장애인을 배려와 이해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게 하거나 불행이나 불편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인권교육을 바라보는 장애인 당사자가 인권교육 그 자체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느냐, 인권교육으로 그들의 문화를 공고히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교육의 절박성, 시급성, 효율성 때문에 인권교육을 상호 소통이 어려운 사이버 교육으로 대폭 늘렸던 것은, 위에 언급한 사회복지사가 직접 그 교수를 면담하지도 않고 전화로 아우팅 한 것과 같은 측면도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인권 교육을 외주화 하는 것도 그 인권교육 프로그램 자체가 인권 당사자의 정체성을, 문화를 훼손시킬 위험이 있다.

요컨대, 인권교육의 양의 확대, 효율성, 제도화는 인권을 더욱 많이 보장할 가능성이 있지만 동시에 인권 당사자의 참여와 주체성을 더욱 약화시킬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비장애인의 인권교육에 욕심을 내는 만큼 장애인 당사자를 인권교육의 전문가로 길러내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인권교육에서 장애인인권교육이라고 따로 지칭하는 것 역시 많은 고민이 있다. 실무에서는 그렇게 구분할 수 있겠으나 인권교육은 말 그대로 ‘인권’ 교육이어야 하며 장애인은 인권교육의 목차이거나 주제어거나 태그일 뿐이다. (그래서 본 원고에서도 장애인인권교육이라고 굳이 나눠서 표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장애인 당사자는 그만큼 다른 당사자들의 인권에도 민감하고 해박한 것일까?
시대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하여 기존의 교양강좌 리더십 강좌 콘텐츠를 장애인 관련 강좌로 바꾼 인권교육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장애인단체, 사회복지 단체의 많은 사람들의 인권감수성과 기법의 괴리와 딜레마는 누가 모니터링하고 지적하고 있는가?

장애인이나 당사자들에 대하여 전문성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인권에 대해 깊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의사가 전문성이 높다하되, 환자의 인권에 대해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듯이 장애인관련 전문가는 말 그대로 직업적인 전문가일 뿐이다. 오히려 장애인과의 이해관계에 있다고 볼 수도 있으며 그들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욱 크기 때문에 그들의 전문성에 적절히 개입할 수 있는 인권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과거에도 그 전문가들은 존재했는데 그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권교육이란 단어 자체가 언급되고 구체화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임을 상기하라.)

인권교육은 프로그램이 되어서도, 사업이 되어서도 실적을 위한 통계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되도록 현황 등을 표현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비장애인 전문가들이 장애인당사자성이나 결정권을 키우는 프로그램이나 사업을 짜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특히 발달 장애인이나 정신 장애인 영역에서) 인권의 테이블에 이유고하를 불문하고 장애인 당사자들이 직접 발언하고 기획할 수 없다면 그것이 진정한 인권교육인가?

정작 중요한 것은 제도의 미비나 인식의 편협함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 스스로 그 인권교육의 절박성과 시급성을 실적으로만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장애인들은 그냥 한 마을에 사는 이웃주민, 아저씨, 삼촌, 언니, 오빠, 누나, 애인이고 싶을 뿐이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충분한 고통과 의무를 지고 싶을 것이다. 인권교육이 개인의 고통과 욕망을 넘어, 고통과 의무, 권리와 역할까지 공유할 수 있는 객관성과 용기, 자기 반성,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권 앞에 무기력한 인권교육은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작성자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guernik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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