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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가 위력이 될 때

인권의 살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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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 사진. 채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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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중 많이 요청 들어오는 교육 중 하나가 인권감수성 교육이나 반차별 교육이다. 교묘한 차별과 차별의 논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인권감수성은 교육 한 번 한다고 생기지도 않고, 한 번 생겼다고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차별과 억압의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기에, 차별의 논리와 주류의 시선에 쉽게 젖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긴장하고 공부하면서 소수자집단의 삶을 알려고 노력할 때, 인권감수성은 키워지고 유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차별은 권력을 가진 자, 주류의 시선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차별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섬세하고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지 않으면 보이지 않지만,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인권감수성이고 반차별감각이다. 기본교육을 하면서 자주 써먹는 사례 중 하나가 다음이다.
“윈스턴 씨는 영국사람 / 그에게는 알라오라는 친구가 있어 / 알라오는 아프리카 사람 / 윈스턴 씨는 의사이고 / 그의 친구 알라오는 농부라네 / 윈스턴 씨는 알라오가 아플 때마다 / 항상 치료해주지.”
이 문장에서 윈스턴과 알라오를 설명하는 서술에서 차이가 느껴지는가? 윈스턴의 국적과 직업은 구체적이지만 알라오의 국적은 없다. 윈스턴은 ‘씨’라고 부르지만 알라오는 ‘씨’라는 호칭도 없다. 둘은 친구임에도 알라오는 윈스턴 씨에게 의존하는 모습만 그려진다. 서양인들의 우월주의적 시각이 아프리카계 사람인 알라오 씨의 주체적인 모습을 지워버린 게 보인다면 당신의 감수성은 살아 있다. 윈스턴 씨의 모습은 뚜렷하게 부각되는 반면, 알라오 씨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무언가를 강조하고 무언가를 삭제하는 것이 바로 힘(권력)이며, 그 힘의 작동으로 생기는 것이 차별이다. 교육을 할 때는 위 문장에 드러난 차별을 간파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예시문장을 차별적이지 않게 고치는 작업으로 이어간다. 문장을 작성한 이의 의도는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저 맥락을 유추하는 정도로 그친다. 차별은 의도가 아니라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깔린 차별적 인식과 태도를 돌아보는 게 더 중요해서다.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 간의 권력 차
인권활동가를 비롯해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사람들은 종종 차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편에 선다. 자연스레 피해자들과 함께하면서, 차별을 만들고 용인하는 권력에 맞서 싸우게 된다.
모든 억압과 차별에 대해 반대한다는 명분을 말하면서도, 특정한 차별과 억압에는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인상이 찌푸려지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특히 자신이 선 자리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저 자신이 그동안 취해왔던 태도가 억압의 체계에서 특권을 가진 위치이기에 갖는 시선과 입장임을 깨닫지도 못한 듯, 주류의 시선을 바꾸려 애쓰지 않는다. 주류라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사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계급·성별·성적지향·장애유무 등 다중적인 억압체계가 작동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항상 피해자의 위치나 가해자의 위치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다중적인 정체성과 다양한 맥락에 놓이므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자각해야만 부지불식간에 특권을 행사하고 차별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긴장을 하려는 노력, 예민한 인권의 촉을 세우고 보려는 것이 인권감수성이고 반차별감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행위를 흔히 있는 인간사의 ‘자연스런 일’로 치부하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기 쉽다.
최근 있었던 박원순 전 시장의 성폭력 혐의와 죽음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피해자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하는지를, 어디에 설 때 피해자를 지지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사망 사건 발생 후, 가해자의 공적에 대한 찬양과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넘쳐나고 피해자의 고통은 말해지지 않았다. 독재권력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며 피억압민중의 편에 섰던 사람들조차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발생한 성차별과 성폭력이 ‘박 전 시장 성추행사건’임에도, 일단 ‘애도의 시기’니 입을 다물라 했다.

박 전 시장의 갑작스런 죽음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그의 유서에는 자살의 이유가 쓰여 있지 않으나, 그의 죽음과 성추행사건 고소의 상관관계는 분명했다. 성폭력 혐의로 고소된 사람이 사라졌으니 성폭력의 진실여부는 알 수 없다며, 박 전 시장의 혐의 자체를 부인하는 지인들과 지지자들. 심지어 음모론을 들고 나오며, 피해자를 2차 가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성폭력 고소를 인지한 후 자살 결행’이라는 기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척, 성폭력 혐의자의 편에 서서 피해자 신상털기에 나선 최악의 사람들도 있었다.
장례기간 내내 박 전 시장이 시민운동을 하면서 세운 공(功)을 치켜세우고, 3선에 성공한 서울시장으로서의 성과가 칭송됐다. 그도 모자라는지 고인의 장례식을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위력에 의한 직장 내 성폭력사건의 가해자임에도, 그의 장례는 위력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방정부와 여당은 위력을 뽐냈다. ‘사회를 변화시킨 큰 인물이 죽어 안타깝다’는 애도의 말이 SNS에 넘쳐났다. 성추행 혐의자의 공(功)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의 피해를 부차화하고 사소화시키는 효과를 낳음에도, 이에 대해서는 무감한 듯 사람들은 목청껏 애도했다.
심지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성추행 혐의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에게, 그런 추잡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막말을 했다. 어떤 명망가는 죽음 자체가 책임을 다한 것이니, 애도를 하는 게 ‘인간의 예의’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은 가해자가 죽었으므로 공소권이 없다며, 서둘러 사건을 정리하려 했다. 피해자의 피해 호소는 박 전 시장의 죽음으로 완전히 묵살된 상태가 되어버렸다. 아니,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죽이는 공적 추모행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박원순 시장의 장례식이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러지는 것을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쉽게 무시됐다. 오히려 서울시청광장에 공식분향소가 생기고, 2만이 넘는 사람이 조문하고 1500명이 넘는 정치인들과 명망가들이 장례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방송에서는 연일 정치인 아무개가 조문했고, 저명한 교수가 한 추모의 말이 방송을 탔다. 가해자는 죽었으나, 가해자를 추모하는 넘쳐나는 말들은 여전히 살아 존재하는 그의 힘을 보여줬다. 성폭력을 저지른 박원순 전 시장의 공(功)에 대해서는 강조됐고, 성폭력을 당한 비서의 목소리는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이렇듯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엄청난 권력차이는 피해자를 밀어내는 위력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박 전 시장의 공적이 칭송되는 5일간의 장례기간 동안 피해자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가해자를 애도하는 사람들은 피해자가 어떤 심적 고통을 겪었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소권이 없다는 이유로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를 국가기관을 통해 구제받지도 못하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지도 못한 채, 허공에 뜬 5일이 피해자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어떤 고통이었을지 상상하려 하지도 않았다. 자책과 분노와 눈물의 시간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넘쳐나는 추모 속에 사라진 피해자의 목소리에서 차별을 읽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차별과 성폭력이 발생한 억압의 체계를 바꿀 힘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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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광장에서 분향소를 배경으로 방송을 진행하려던 한 종합편성채널 취재진이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고, 한참의 실랑이를 벌인 끝에 방송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모습 


애도가 누군가의 밀어내는 힘으로 동원되지 않으려면
애도의 사전적 의미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듯, 박 전 시장이 급작스런 죽음은 모두에게 충격적이다. 슬퍼할 수 있다. 애도할 수 있다. 문제는 방식이다. 효과다. 그저 슬픔을 극대화하고 전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애도는 아니다.
한 생명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진정한 애도가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진실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때, ‘그의 죽음이 덮은 진실’을 밝히고 그의 ‘죽음으로 더욱 곤경에 처한 피해자’를 돌아보아야만 진정한 애도는 가능할 것이다.
또한 시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직 망자가 행한 범죄가 밝혀지지도 않고 그 피해자가 고통을 말하고 치유와 격려도 받지 않은 시기에 행해지는 ‘가해자에 대한 넘쳐나는 애도, 공식적이고도 대대적인 애도행사’는 문제적이다. 집에서 마음속으로 망자를 기리는 애도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애도의 방식과 내용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이고 대대적인 애도행사는 피해자를 위축되게 만들고, 진실을 은폐하는 거대한 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시민들의 말을 듣지 않고 서울특별시장(葬)을 강행했다. 가해자의 공적을 칭송하며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말을 압도하는 수준의 애도는 피해자를 밀어내는 힘이 된다. 피해자를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하는 애도란 진실하지도 않고 윤리적이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물어서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그의 죽음이 남긴 상실과 슬픔에 잠긴 자신을 보여주는 데 급급했다. 더 큰 고통에 휩싸인 피해자는 보려 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본인이 애도를 한 의도가 피해자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그저 애도와 슬픔에 빠진 것뿐이라며 변명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의도가 아니라 태도다.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취한 태도의 차이다. 죽음의 맥락과 피해자의 존재를 알면서도, 넘쳐나는 애도가 피해자를 주변으로 밀어내는 위력이 됨을 알면서도, 그러한 방식의 애도를 중단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언제 어느 때나 애도는 자연스럽고 사람 된 도리라고 말하는 것이 특권의 위치에 선 자들, 권력자의 시선이 아닌가. 이제라도 그 시기의 애도가 위력으로 작동했음을 성찰하고 인정할 때, 우리는 존엄과 평등으로 한 발 더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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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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