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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장애계

돌고 돌아 되찾은 평범한 일상, 나는 짜맞추기식 일상을 거부한다

탈시설 학대 피해장애인의 자립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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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주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피해장애인지원센터 센터장


전 세계적으로 예고 없이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변해버린 일상 속에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한 사람이 있다. 노숙인 생활시설에서 탈시설을 한 지 어느덧 21개월째를 맞이하는 박정태(가명, 50대) 씨의 이야기다.


↓ 박정태(가명) 씨가 개인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메모해 놓았따. 생필품부터 듣고 싶은 노래, 공부하기 위해 구입할 책들의 목록까지 정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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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생활시설 입소 4년 만에 탈시설

정태 씨를 처음 만난 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8년 8월의 어느 날, 정태 씨가 4년간 생활했던 시설을 떠나는 날이었다. 시설 담당자들과 퇴소 상담을 마치고 준비된 차량에 올라탄 정태 씨의 짐은 단출했다. 혼자 여행하기 적당한 정도의 짐가방 하나. 원래 살던 전라남도에서 새로운 보금자리가 있는 서울까지, 먼 길을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최적화된 양의 짐가방이었다. 4년 만에 시설을 떠난다는 설렘 때문이었는지, 먼 길을 이동하면서도 잠 한숨 안 자고 바깥 풍경을 응시하던 정태 씨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 박정태(가명) 씨가 개인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메모해 놓았따. 생필품부터 듣고 싶은 노래, 공부하기 위해 구입할 책들의 목록까지 정리돼 있다.


‘염전 사건’ 피해자의 삶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정태 씨를 만나게 된 사유는 조금 특별하다. 2014년에 우리 사회의 큰 이슈로 떠올랐던 ‘염전 장애인 노동력 착취 사건(아래 염전사건)’의 피해자인 정태 씨는, 염전에서 10년 동안 노동력 착취 피해를 입은 것이 확인되어 노숙인 생활시설로 연계되었다. 그러나 무연고자 신분이었던 정태 씨는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낯선 시설에서, 퇴소에 대한 기약도 없이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4년 염전사건 당시에 사건 조사와 법률지원을 맡았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사건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사후 모니터링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 다수가 여전히 임시 보호되었던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당사자 면담을 통해 자립을 희망하는 정태 씨의 탈시설을 지원하게 되었다.


사건 당시의 진행 경과
2014년 2월, 염전사건이 ‘염전노예사건’으로 이름 붙여지며 대대적으로 언론보도가 되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몇몇 장애인단체들과 조사팀을 구성하여 해당지역 광역수사대와 공동으로 전수조사를 실시했고, 63명이나 되는 피해자들을 발견하게 됐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63명 중 장애등록이 되었거나 장애등록이 필요한 사람은 47명이었다.
워낙 다수의 피해자가 발견되다 보니 일부 피해자들은 원가정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무연고 장애인들에 대해서는 주변 지역의 생활시설로 임시보호를 지원하였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사건 이후 다수의 피해 장애인에 대한 법률적 지원을 해왔고, 공익변호사들이 참여해 피해자 소송지원을 대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후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남겼다.


​학대 피해장애인 지원사업 추진
염전사건을 계기로 ‘장애인 학대’의 심각성을 알게 되면서, 지속적인 장애인 학대 관련 연구 끝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2016년부터 현재까지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에서는 학대 피해장애인의 지원체계를 연구하고, 단순지원이 아닌 지역사회 복귀를 전제로 한 자립지원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관련 법·제도 개선 활동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년간 피해장애인 임시보호 및 자립준비를 지원하는 쉼터(위기 거주홈)를 운영했으며, 2019년부터는 자립준비를 목적으로 1~2년을 거주할 수 있는 자립지원홈을 학대 피해장애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정태 씨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운영한 위기거주홈과 자립지원홈을 모두 이용해 본 당사자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사유로 국민기초생활수급 대상도 되지 못하고, 미등록 장애인(경계선급)으로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정태 씨는 탈시설 후 짧은 기간 위기거주홈을 이용하고, 15개월간 자립지원홈에 거주하면서 자립준비를 해왔다. 마침내 본인 조건에 맞는 주거지를 찾아 자립한 지 3개월이 지났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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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화 내내 두 손으로 빈 커피캔을 매만지던 정태 씨는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캔을 놓고 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한자로 쓸 줄 안다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학대 피해장애인, 그들의 달라진 일상
정태 씨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사실 특별할 게 없는 일상이다.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연계된 복지기관들도 코로나19 사태로 이용이 제한되면서 정태 씨의 일상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정태 씨를 지원해온 입장에서 보면 복지기관 이용도 즐기지 않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는 무기력함 때문에 혼자 고립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현재의 정태 씨는 자립 전과는 많이 변해 있었다. 정태 씨의 하루가 너무 무료할 것 같아 여러 가지 활동을 제안해 봤지만, 정태 씨 본인의 생각은 너무도 명확했다.
“집에서 밥해 먹기도 바빠요. 운동하고 싶으면 동네 공원 산책이나 좀 하면 되고, 옛날에 배웠던 한자 사전이랑 학교 다닐 때 공부했던 윤리 책도 다시 마련해서 다시 공부할 거예요. 복지관은 별로 안 다니고 싶어요. 시설에 있을 때 사람 많은 게 딱 질색이었어요. 밥도 혼자 먹고 싶은데, 다 같이 먹어야 돼서 먹기도 싫더라고요. 운동도 하기 싫은데 매일 해야 되고. 저는 이렇게 혼자 있는 게 편해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정태 씨. 21개월을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 본인의 생각을 또렷한 발음으로 길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달라진 모습이 신기해서 자립지원홈에 있을 때랑 지금이랑 어떤 점이 다르고, 또한 뭐가 제일 좋은지 물어봤다.
“거기(자립지원홈)는 방만 내 공간이고, 물건도 내 것이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내 집, 내가 산 물건이니까 다르죠. 시간도 내가 결정하고, 일정도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어요. 해야 할 일도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수가 있잖아요.”
자립지원홈에서나 지금이나 표면적인 일상생활에 큰 차이는 없지만, 본인이 느끼는 것은 달랐던 것이다.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말들이지만, 이전에는 수동적인 태도만 취했던 정태 씨가 본인 스스로의 욕구를 찾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것이 진정한 자립생활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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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태 씨가 직접 만든 액세서리 용품들. 일반 매장에 판매되기도 하고, 일부는 개인 선물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과제
국내 장애인 정책의 기조가 탈시설과 자립생활에 초점이 맞춰졌고, 최근 몇 년 사이에 ‘장애인 학대 피해 지원’과 관련한 시스템도 점차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전국에 설치된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서는 장애인 학대상담과 사례지원을 하고, 피해장애인 쉼터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5년간 피해장애인의 자립지원을 한 결과, 피해장애인들이 지역사회로 자립하기까지 안정적인 주거와 소득 확보, 지역사회 내 고립방지, 재학대 예방체계 마련 등 여전히 난제가 많다. 특히 최근의 장애인 정책이 탈시설 중심의 장애인 자립 지원으로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학대 피해 장애인들이 소외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장애인 자립지원주택, 탈시설 자립정착금과 같은 자립지원 제도는 ‘탈시설 장애인’이 우선 대상이다 보니, 시설을 이용하지 않았던 지역사회 학대 피해장애인들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후순위로 밀리는 경험을 하곤 한다. 학대 피해장애인이 이러한 제도적 사각지대로 인해 또 다른 사회적 배제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자립지원 대책과 지속적 사후지원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그 사각지대 해소와 근본적인 자립의 완성을 위해, 보다 체계적인 매뉴얼 연구와 현장의 실천으로 학대 피해장애인들의 인권 확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작성자박관찬기자  p306k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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