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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의 반대? 이미 그 자충수가 부메랑이 되고 있다

「차별금지법」 반대,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

본문

글. 채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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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유엔(UN)의 여러 국제인권조약의 당사국이다. 특히 유엔 인권이사회의 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국제적으로 합의된 인권규범들을 국내에서도 실현할 책무가 ‘당연히’ 있고, 인권증진을 위한 선도적인 역할 수행이 필연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그 1차적 평가기준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존재유무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그런 법이 ‘아직도’ 없다. 유엔에서는 인권조약의 준수와 시행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국내에서는 차별을 방조·묵인하는 후진적 환경과 제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오히려 차별금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 중심엔 극우편향의 일부 개신교와 수구언론들이 존재한다. 가짜뉴스의 주된 발원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 시대에 20세기 초중반의 논리로 버티기엔 힘든 세상이 이미 돼 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지금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1950년대가 아닌, 2020년 가을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편집자 주 : 본문 편집에 사용된 이미지들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배포한 인권 관련 인식개선 캠페인의 엽서들이다. <함께걸음>은 일대일 정밀 촬영을 통해 사진 파일(file) 형태로 만들어 지면에 활용했고, 그 원본의 저작권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자

차별의 범주 안에는 어떤 종류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차별이라고 하면 무조건 남녀차별·성차별·빈부차별·직장차별·외모차별 같은 것부터 떠올리고, 곧이어 성소수자·난민·이주민 문제 등을 연결 짓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을 가만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차별은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역에서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확인된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최고인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믿음으로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비난하는 건 차별이다. 왜냐, 다른 종교 역시 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혐오가 반드시 백인들의 유색인종을 향한 편견만은 아니다. 같은 인종, 같은 국민 안에서도 노인 혐오·어린이 혐오·특정 연령대의 혐오가 존재한다. 여성과 남성 각각의 세계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심각한 차별이 상존하고,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한 국론분열의 부작용이었던 지역감정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했던 차별이었다.

차별금지는 모든 대상을 무조건 똑같은 잣대로 평가하자는 게 아닌, 상대방의 특수성과 불가피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데 방점이 찍힌다. 차이가 분명히 있고, 높낮이와 크기의 다름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걸 굳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하고 다르다’는 걸 지적하기보다는, ‘다름’ 그 자체를 이 세상의 다양한 질서로 받아들이는 ‘인정의 자세’가 중요하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유유상종(類類相從)에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그들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차별 만능의 세상은 새로운 관점을 우선하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될 일이다. 


차별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여기서 분명하게 지적해야 할 대목이 있다. 「차별금지법」 발의와 입법 움직임이 국내에서 시작됐던 그 시점부터, 역설적으로 차별의 대상을 대한민국 안에 공식적으로 규정짓고 공론화시킨 부작용이 생겨났다는 점이 그것이다. 지난 2007년 참여정부의 「차별금지법」 입법 추진이 진행되자, 정치·경제·일부 종교계 등 이 사회의 기득권층들은 참여정부 자체에 대한 반감을 「차별금지법」 추진 저지에 집중하면서, 그 공격을 「차별금지법」에 포함된 ‘모든 대상들’에게 집중시켰다.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하던 교육감들은 비난의 표적이 됐고, 퀴어문화축제 등의 장소 제공을 허 가한 단체장들은 저주의 주인공이 돼 버렸다. 이주노동자·도시빈민·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모두가 한 덩어리의 혐오 대상으로 묶이면서, ‘자신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누군가는 차별받아 마땅하다’는 혐오의 정서가 급속도로 전국에 파급된 것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혐오의 주장은 그 영향력이 확산되기는커녕, 자신들 집단의 자충수로 빠져버리는 심각한 부작용으로 결론이 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코로나19 확산의 책임을 피하려고 ‘감염은 신의 뜻’, ‘선교 과정의 감염은 순교자의 자세’ 등의 궤변이 난무하는 2020년 여름 후반기의 사회상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차별과 편견의 최후는 결국 자신들의 궤변으로 내리막길을 자초한다는 실증적 증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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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장애·성별·고용 등 이미 차별을 금지하는 개별 법률들이 여럿 있는데, 왜 굳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따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반대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의 핵심은 단순하다. ‘그러니까 만들 필요가 없다’는 자신들의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됐다고 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일순간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법 자체의 불완전한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법 조항의 나열만으로 일반인들의 언행이 즉각 수정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개개인 인식의 전환이 가장 늦게 작용하고, 마지막 시점에서야 평균치에 맞게 반응이 드러나게 됨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집어넣기 위해, 나머지 차별금지 대상을 ‘들러리’로 끼워 넣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이미 널리 퍼진 상태이다. 그렇다면 외국인 영어강사를 채용할 때, 백인만 우대한다는 건 용납되는 일일까?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취업의 1차적 제한이 되는 건 합리적인 행정 처리일까?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주장만 펼치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을 지속적으로 저주하고 공격하는 게 과연 그들이 믿는다는 ‘신의 뜻’일까?

포괄적 「차별금지법」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6월 30일 시안으로 제시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은 ‘합리적이지 않은 차별’에 집중하고 있다. ‘가중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한 게 대표적인 예인데, ‘차별행위의 고의성·지속성·반복성·피해자에 대한 보복성·피해 내용 및 규모’를 종합 판단해서 ‘악의성’이 주된 원인인지를 파악하게 된다.

또한 차별피해를 입힌 가해자로 분류될 경우, 차별을 한 당사자가 차별의 정당한 사유가 있음을 입증하도록 법률로 제도화시켰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는 건 극히 어렵다. 갑(甲)과 을(乙)의 관계에서, ‘을’이 해답을 얻는 게 가능한 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차별의 행위가 개인의 고유한 선택이자, 행복추구권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헌법이 규정한 행복추구의 권리가 모든 경우에 전부 합당하다면, (최악의 예로) 강간과 살인도 개인의 행복추구의 과정이었다고 강변하는 게 가능해진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의 법은 이미 과거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반복학습을 통해, 그 정도의 궤변에 흔들릴 수준은 이미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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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1950년대가 아닌 2020년이다

「차별금지법」은 그 법의 발의와 시행 자체로 세상을 일순간에 뒤바꿔놓지는 못한다. 수차례의 법 개정을 통해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이 뒤따를 것이고, 찬반을 뛰어넘는 다양한 의견표출 속에 법의 의의와 의미를 재정립하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 ‘무엇이 차별인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짐은 우리가 경험할 첫 번째 변화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차별을 없애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서로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고 그 답을 찾아가는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다.

또 하나의 변화는 차별과 피해를 발언하는 목소리들이 대폭 늘어간다는 점이다. 감추고 삭히고 덮어버리고 모른 척하던 수동적·피동적 관점에서 벗어나, ‘Me, too’ 운동과 같이 능동적으로 발언하는 사회가 실제로 만들어지게 된다. ‘회사니까’, ‘군대니까’, ‘선배니까’, ‘관행이니까’, ‘악의는 없다고 하니까’ 같은 오래된 일상의 관성과 타성을 하나씩 끊어내는, 그 하나하나가 모여 커다란 질서를 창조하는 놀라운 미래상을 그려보는 게 가능해진다. 분명한 차별인데도 당연하게 자행됐던 모든 것들이 정리되고 사라지게 된다는 것, 그건 「차별금지법」이 이끌어낼 가장 긍정적인 변화로 기록될 것이다. 

지금까지도 「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한지 물으며 반대하는 이들은, 그 법이 정작 자신들의 권리행사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는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될 일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언제나 자충수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게 돼 있다. ‘깨어있는 열린 시민의 정신’은 이미 세상을 바꾸고 정치를 바꾸고 문화를 바꾸고 있다. 이젠 ‘차별’을 박물관으로 보낼 차례가 됐다. 지금은 1950년대가 아니라 2020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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