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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장애계

김순석, 그가 되살아나야 하는 이유

김순석, 36주기를 맞이하며

본문

글. 채지민 기자


죽음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는 이들이 있다. 생전에 무명이었다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에는 ‘무명(無名)’의 삶을 묵묵히, 당연하게, 일상 그 자체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죽음’을 통해 이 세상과 사회를 뒤바꾸는 ‘커다란 화두’를 내던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 자체로 모두의 가슴에 각인되는 얼굴들이 있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던 오래 전 얼굴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번 <함께걸음>은 하나의 얼굴과 그 인생에 주목하고자 한다. 지금 이 시점까지 장애인권운동의 첫 번째 화두를 내던진 인물이라고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갈수록 늘어만가는 장애해방열사들의 영정사진 첫 자리에 ‘왜 그가’ 항상 존재하는지를 재확인할 기회도 된다. 김순석, 그를 기억해야 할 이유를 함께 들여다본다.


생존을 위한 모든 발버둥, 아무도 듣지 않는

“(서울)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1980년대는 물론 2000년대가 시작될 때까지도, 대한민국의 도시는 철저하게 비장애인의 이동편의 중심이었다. 횡단보도의 시작은 성인 발목 높이의 턱이 차도와 인도의 구별이라는 이유로 사방 전체에 설치돼 있었고, 어느 건물 어느 상가 어느 매장도 계단 한 칸 높이의 가림턱이 기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비장애인 중심의 이동환경의 대표적인 상징물은 바로 육교였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차량 중심의 도시계획, 거기에 따라 차량의 질주가 우선이고 사람은 긴 계단을 올라 차도 위로 건너다녀야 했다. 이동에 제약이 많은 이들은 큰 길 건너편이 외국보다 먼 땅이었던 게 얼마 전까지의 대한민국이 었다는 것이다.
故 김순석 열사(1952~1984)의 삶은 이동의 제약이 곧 생존권의 문제였던 시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앞에 인용한 유서의 일부 내용과 같이, 가장 기본적인 일상 자체가 부정당하는 현실에 그는 분노했고 좌절했다. 장애인으로 멸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사회 전체의 시스템이 일상의 생존을 가로막아 ‘불구화(化)’를 강요하는 건 개선될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장애 때문에, 모든 게 장애때문에 제지당하고 가로막혔다. 밥 한 끼, 물 한 모금, 짧은 이동도 힘겨웠다. 생존을 위한 모든 발버둥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분노와 좌절은 극단의 선택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는 자신의 선택이 불가피함을 다섯 장의 종이 위에 적어 내렸다. 개인의 한숨과 하소연이 아닌,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을 상대로 한 공개서한이었던 셈이다.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수많은 벽들을, 턱들을, 차별과 멸시의 시선들을 향해 “왜?”라는 질문을 힘껏 내던지며 그는 스스로의 삶을 마감했다. 1984년 9월 19일 오전 10시경 서울 마천2동 한 지하 셋방에서 발견된 서른세 살의 그에게, 경찰은 ‘음독자살’이라는 한마디로 마침표를 찍어놓았다.
한 일간지가 그의 죽음을 기사화하지 않았었다면, 그는 생존과 존재 자체가 완전히 잊혀진 ‘1인’으로 사라졌을 게 분명한 일이다.


전태일이 그러하듯 장애계도 구심점이 필요하다

김순석의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는, 그가 남긴 유서의 내용들이 너무 뒤늦은 시점에 발화(發火)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 故 전태일 열사 곁에는 노동계라는 배경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 지금과 같은 거대노조가 존재하진 않았지만, 노동운동의 불씨가 횃불이 되고 들불로 확대되면서, 전태일은 노동운동의 구심점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이 가능해졌다.
반면에 김순석 열사가 유서로 외친 절규는 당시엔 듣는 이가 없었다. 변변한 장애인권 관련 조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순석의 절규는 세상의 모든 장애당사자들이 가슴에 품고 있었던 바로 그 외침이었다. 뒤늦게나마 그의 절규를 함께 외치는 이들이 생겨났고, ‘이동권’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대한민국 사회에 등장하게 된 시작지점에 김순석의 유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장애인인권’이라는 의미가 보편화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김순석’이라는 한 인물의 무게감을 장애인권운동계가 어떻게 재조명해야 하는지 논의해야 할 시점이 됐다고 판단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와 같은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이젠 공론의 장에서 다양한 토론이 펼쳐질 필요가 있다. 장애계가 ‘김순석’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결론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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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순석 열사의 죽음을 알린 당시 조선일보 지면 기사




우리 모두가 김순석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와 관련된 최소한의 기록을 되찾는 일도 이젠 난망한 상황이다. 단편적인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 활동 이외에 구체적인 유가족의 증언 같은 걸 구할 길이 없고, 그의 죽음을 증명하는 유서마저도 그 행방을 찾을 방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김종환 정책국장은 기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 유서를 당시 서울시장이 직접 읽었는지도 알 수 없다. 원본을 찾을 길도 없다. 오래 전부터 정보공개 청구를 했지만, ‘20년이 지나면 모두 폐기한다’는 답만 들었던 게 전부이다. 조선일보에 나왔던 기사가 김순석열사를 확인하는 유일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당시 기사를 썼던 기자가 지금 고위직급으로 올라가 있는데,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연락 자체를 거부한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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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재적 살인기계'라던 리프트마저 없던 시절, 1999년 장애인권운동

활동가들의 이동권 투쟁 과정은 휠체어를 탄 사람이 아니라 '화물'그 자체였다. 

◎ 함께걸음 자료사진

 

김순석 이전에는 비관과 절망의 죽음이 없었을까? 아니다. 그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이름도 모르고 존재 자체도 몰랐을 약자들의 죽음은, 구석진 이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끝도 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신문의 기사는커녕 부고(訃告)조차도 없는 한 개인의 자살 또는 사고사(死)로 묻혀버렸을 테고, 이름 석 자도 모를 무연고자로 관계기관의 낡은 서류뭉치 안 손글씨 정도로 기록돼 있을 게 분명한 일이다.
‘인간 김순석’은 생의 마지막 선택 앞에서, 자신의 절망과 분노 모두를 서울시장에게 보내는 유서로 남겨놓았다. 이 사회 전체에게 그 해답을 요구한 것이다. <함께걸음>은 36년 전 퇴색된 신문 지면의 희미한 그의 사진 하나를 놓고, 그의 얼굴을 최대한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거듭해 왔다. ‘김순석’의 재조명이 장애인권운동사의 구체적인 시발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번 호 <함께걸음>은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최소한이나마 ‘인간 김순석’과의 눈 마주침(eye contact)을 제안하고자 한다. 마주보는 그 눈빛이 더욱 또렷한 하나의 음성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아직도 남겨진 모든 턱을 전부 없애라!’라는 외침으로 말이다. 김순석 열사의 삶을 가장 치열하게 탐구했을 한 사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이기도 한 장애해방열사_단 박김영희 대표의 의견에 답이 담겨져 있다.
“장애해방열사_단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김순석 열사의 추모제를 지내게 됐다. 추모제를 거듭할 때마다 ‘이 분의 이야기, 그 삶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서울의 턱을 없애주시오!’ 이 절규는 매일 우리가 일상에서 겪고 살아가지 않는가. 그런데 그때 그 분의 절망감, 그 안타까움, 혼자서 싸움을 할 수조차 없는, 척박한 장애인권운동마저 없었던 그 시절에 그분은 오로지 죽음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건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저항의 몸짓이었던 거다. 그가 되살아나야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문 밖을 나가면 만나는 계단, 만나는 턱, 그것 때문에 나갈 수 없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고, 누군가에게 시혜적인 동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접근 할 권리가 침해당해 왔던 그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되살린다는 말도 틀릴 수 있겠다. 왜냐, 그는 살아있어야 했던 분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모두가 김순석이다. 그는 돌아가시지 않았다. 우리가 이 모든 턱을 없앰으로써, 그는 우리 곁에 살아나신다. 오늘 우리가 이것을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한다. 우리 모두가 김순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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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권투쟁의 첫 밑불을 놓은

고 김순석 열사 36주기 추모제 열려 (2020. 9. 18. 서울시청 앞)
- 장애계의 전태일, 이젠 열사의 동상과 기념관이 건립돼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취지에 동참하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 참석한 고 김순석 열사의 36주기 추모제가 지난 9월 18일 정오에 서울시청 정문 앞에서 거행됐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해방열사_단,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박종필추모사업회가 공동주관한 이날 추모제에서는 ‘장애해방운동가 김순석 열사 동상·기념관 추진위원회’가 공식 제안되면서, 그동안의 추모제와는 다른 새로운 과제를 모두에게 던져놓았다. 추진위원회제안 기자회견을 주제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대표의 발언을 요약 정리한다.
“1984년 9월 19일 돌아가신 김순석 열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그 턱을 없애는 운동으로 함께 가기를 제안합니다. 그래서 김순석 열사 동상 그리고 기념관을 설치할 것을 서울시한테 강력하게 요청 드립니다. 열사의 그 동상을 보고 비장애인 중심의 물리적 환경이 아닌,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운동으로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거리의 턱을 없애고, 지역사회의 님비를 없애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로막는 이 모든 환경을 없애나가는 보편적인 유니버설 운동으로 함께 나가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함께하는 모든 장애인 단체들에게 제안해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이 뜻을 같이하는 시민사회 인권단체 노동단체 모두에게 제안드릴 겁니다. 단체뿐만 아니라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에게 이 뜻을 모아서, 우리의 운동이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운동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려나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36주기 김순석 열사를 추모합니다. 이 추모제의 뜻을 이어받아서, 비장애인 중심의 물리적 환경들 모두를 바꿔 나가는 투쟁으로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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