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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티모르 여성장애인 차별금지 캠페인 배너
시내 곳곳에 설치된 광고판은 장애인인식개선을 위해 힘쓰는 정부의 노력을 보여준다.
 
21세기에 독립한 유일한 국가, 동티모르. 2002년 독립을 맞이한 이 작은 나라는 짧은 역사 속에서도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동티모르는 1999년 유엔 주도의 국민투표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점령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 이후 한국은 유엔 평화유지군 ‘상록수 부대’를 파견해 동티모르의 복구와 재건을 지원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독립 이후 동티모르는 여러 도전에 직면했지만, 국제사회와 협력하며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동티모르는 장애인 권리를 중심으로 한 정책과 제도를 강화하며 포용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2023년, 동티모르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에 가입했다. 누군가는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는 동티모르에게 있어 중요한 성과였다. 단순히 서명을 넘어서, 동티모르가 장애인 권리 증진을 국가적 우선순위로 설정했다는 강력한 선언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는 시민사회단체와 장애인단체의 오랜 노력이 빛을 발했다. 다른 주요 UN 인권 협약들은 독립 직후 빠르게 체결되었지만, CRPD는 장애인과 시민단체가 정부를 움직여 쟁취한 성과였기에 더욱 특별하다. 많은 노력이 담긴 협약인 만큼, 동티모르에게 CRPD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필자는 현재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동티모르 사무소에서 인권 및 사회통합 전문가(Human Rights and Inclusiveness Specialist)로 일하고 있다. 주요 업무는 동티모르의 장애 포용과 인권 증진을 목표로 CRPD의 이행을 지원하는 것이다. UNPRPD(United Nations Partnership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 기금을 통해 펀딩을 받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CRPD가 제대로 이행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지원하고 있다. 국가 공무원을 대상으로 CRPD 교육을 제공하고, 복지부(Ministry of Social Solidarity and Inclusion)가 첫 국가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동티모르 정부와 협력하여 장애인위원회(National Council on Disability)를 설립해 장애인의 목소리가 정책과 시스템에 반영될 수 있도록 동료들과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동티모르에서 일하며 가장 절실히 느낀 점은, 이곳의 장애 관련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이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공식적인 국가 수어가 없다는 점이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유일한 학교는 수도 딜리에 하나뿐이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익힌 수어를 사용하며, 여기에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영어 수어가 혼합된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진다. 수어 체계가 부재하다는 것은 청각장애인들이 교육은 물론,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데도 큰 제약을 주고 있다. 또한, 장애 관련 데이터 부족도 큰 문제다. 2022년 인구조사에서는 장애인을 전체 인구의 약 1.6%로 보고했으나, 이는 실제 수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세계 평균 장애율이 약 15%인 점을 고려하면 동티모르의 조사 결과는 심각한 과소평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데이터의 부재는 정책 설계와 예산 편성에서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접근성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공공기관에 경사로는 거의 없으며,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 화장실도 찾아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도로는 곳곳에 홈이 파여 있거나 철근이 드러나 있어, 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들에게 이동의 어려움을 준다. 이는 단지 장애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 전반적인 시스템이 여전히 부족함을 보여준다.
 
△ 동티모르 택시에 반쯤 실린 휠체어
장애인의 필수 이동 수단인 휠체어조차 불안정하게 실려 이동해야 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티모르가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확신을 느낀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첫 번째는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순간이다. 우리 프로그램은 분기마다 운영위원회(Steering Committee) 회의를 여는데, 여기에서 시민단체들이 지역사회의 문제를 생생하게 전한다. 특히, 시설이 부족해 학대나 폭력을 겪는 장애인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호소하며, 장애인 보호 및 재활을 위한 시설 설립의 필요성을 정부에 강하게 전달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탈시설이 주요한 담론으로 자리 잡았지만, 동티모르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곳은 아직 기본적인 장애인 보호 시설조차 없는 상태다. 특히, 학대를 당하거나 긴급히 분리되어야 할 장애인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심리적·신체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시민단체들의 이야기는 단지 시설이 필요하다는 차원을 넘어, 이러한 시설이 동티모르에서 장애인의 존엄을 보호하고 자립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필수 요소임을 강조한다. 이들의 노력은 정부가 시설 설립을 주요 아젠다로 다루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두 번째는 정부의 실질적인 노력을 확인했을 때다. 작년에 동티모르의 첫 CRPD 국가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11개 주요 부처와 워크숍을 열었다. 각 부처는 장애인 권리 증진을 위해 진행 중인 활동과 성과를 열정적으로 발표하며, 보고서에는 담기지 않는 작은 노력들까지 공유했다. 특히, 장애인접근성을 개선하려는 일부 부처의 프로젝트나,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모습은 정부의 진정성과 협력 의지를 잘 보여줬다. 이 워크숍은 단순히 보고서를 위한 자리를 넘어, 부처 간 협력과 장애인 권리에 대한 책임 의식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동티모르 CRPD 첫 국가보고서 작성 워크숍 현장
포용의 의미를 담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포즈를 취한 참가자들
 
마지막으로, 국제장애인의 날 지방 행사에 다녀왔을 때다. 수도 중심의 활동만 보았던 나는 지방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솔직히 큰 기대 없이 갔는데 내가 본 것은 남녀노소가 어울리는 ‘잔치’였다. 온 지역 사람들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장애인의 날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시가행진을 하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고, 어울려 댄스 공연도 펼쳤다. 장애인 인권을 외치는 자작곡 밴드가 무대를 가득 채우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사람들의 열정과 포용적인 분위기는 내가 그동안 동티모르에서 느꼈던 여러 부족함과 답답함을 모두 덮어주고도 남았다. 그 순간, 동티모르 사람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앞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동티모르는 여전히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많은 것들이 이곳에는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작은 경험들은 동티모르만의 포용 문화를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 포용의 정신이 장애인 정책과 현장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변화의 여정에 제3자로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이 작은 나라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더 많은 지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날을 기대한다.
 
△ 국제장애인의 날 지방 행사 현장.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손을 잡고 춤추며 축제를 즐기는 모습
작성자글과 사진. 정평화 유엔인권최고대표 사무소 동티모르 인권 및 사회통합 전문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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