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장애인권리협약 20주년, 한국 장애계가 뉴욕으로 향하는 이유
국제사회와 함께 ‘다음 20년’의 장애포용 의제를 설계하다
본문
한국 장애계가 유엔 뉴욕 본부로 향한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개발협력연대 DAK SDGs10(장애) 분과 소속 6개 단체는 오는 6월 8일(월)부터 11일(목)까지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제19차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 당사국회의(Conference of States Parties, COSP19)에 참석해 국제사회와 함께 향후 장애인권 의제를 논의한다.
특히 올해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채택 20주년을 맞는 해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 장애계는 디지털 전환 시대의 장애인 권리, 민주주의와 장애인의 정치적 참여, 장애포괄적 국제개발협력 등을 주제로 공식 부대행사를 직접 주관하며 국제사회와 경험을 공유할 예정이다.
협약이 채택된 2006년에는 인공지능도, 알고리즘도, 디지털 플랫폼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기후위기와 초고령사회, 디지털 전환 등 새로운 환경이 등장한 오늘, 국제사회는 장애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그리고 CRPD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뉴욕에 모인다.
올해 당사국회의는 ‘CRPD 20주년: 성과를 기념하고 공고히 하며, 변화하는 세계 속 다음 단계의 이행 방향 설계’를 대주제로 열린다. 지난 20년의 성과를 돌아보는 동시에 앞으로의 20년을 준비하는 자리인 만큼, 전 세계 정부와 장애인 당사자단체, 시민사회, 국제기구가 대거 참여할 예정이다.
2006년 12월 13일 채택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을 보호와 시혜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선언한 국제인권조약이다. 당시 192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며, 이후 전 세계 장애인 정책과 제도의 방향을 바꾸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단순 참가가 아닌 ‘의제 형성’
당사국회의는 CRPD를 비준한 국가들이 협약 이행 현황을 점검하고 향후 과제를 논의하는 자리다. 그러나 실제 회의장에서는 정부 대표단뿐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단체(DPO), 시민사회, 학계, 국제기구, 기업 등이 함께 모여 새로운 글로벌 장애 의제를 형성한다. 이번 회의에서는 ▲폭력·착취·학대 없는 사회 ▲회복력 있는 사회와 돌봄·지원체계 ▲참여를 넘어 대표성으로 등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 한국 장애계는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라 공식 부대행사를 직접 주관하며 국제 논의를 이끄는 역할을 맡는다. 첫 번째는 6월 8일(월) 뉴욕 현지 시간 오후 1시 15분에 진행되는‘장애 포괄적 디지털 발전(Inclusive Digital Development)’이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급속히 확산되는 시대에 장애인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미래 CRPD 의제는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지를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논의한다.
두 번째는 6월 11일(목) 뉴욕 현지 시간 오전 11시 30분‘장애와 민주주의(Disability and Democracy)’를 주제로 한 행사다. CRPD 시행 이후 20년 동안 장애인이 정치·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 얼마나 실질적으로 참여해 왔는지, 그리고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자리다.
한국의 경험을 국제사회와 공유하다
당사국회의와 함께 개최되는 시민사회포럼에서도 한국 장애계는 직접 발표에 나선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시민사회포럼에서 ‘AI 시대의 장애인권’을 주제로 발표한다. 발표에서는 AI가 장애인의 접근성과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데이터 수집과 알고리즘 기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차별과 권리 침해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특히 기술 활용을 넘어 장애인이 AI 정책과 규범 형성 과정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도 제기할 계획이다.
이외 대표단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장애인 정책 발전의 기반이 된 인천전략(Incheon Strategy) 추진 경험과 장애포괄적 국제개발협력(ODA) 사례를 공유할 예정이다. 또한 지난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장애정상회의(Global Disability Summit, GDS)에서 채택된 베를린-암만 선언 이후 국제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권리 기반 접근의 강화 방안도 함께 논의한다.
특히 장애포괄적 개발협력이 단순히 장애인을 사업 대상에 포함시키는 수준을 넘어, 사업 기획과 집행, 평가 전 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계획이다.
회의 기간에는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들과 각국 장애인 당사자조직,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시민사회단체들과의 양자·다자 간담회도 예정돼 있다. 이를 통해 현장의 요구를 직접 청취하고, 한국이 축적해 온 장애포괄적 ODA 경험을 공유하며 향후 협력 기반을 구축할 계획이다.
국제협력도 ‘의무’가 된 시대
CRPD는 단순한 선언문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6조 제1항에 따라 국제조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CRPD에 따라 국내 제도 개선뿐 아니라 국제협력 과정에서도 장애인의 참여와 접근성을 보장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실제로 CRPD 제32조는 국제협력 과정에서 장애인을 배제하지 말 것을 명시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탈시설 정책 논의 확대, 접근성 제도 강화 등 다양한 변화를 이뤄왔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도 장애포괄성을 고려한 사업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과제 역시 여전히 남아 있다.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을 가로막는 시설 중심 정책, 여전한 차별과 편견, 그리고 국제개발협력 사업 초기 단계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참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구조적 한계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COSP19는 이러한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국제사회와 공유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CRPD 채택 20주년을 맞은 올해, 뉴욕에서 열리는 COSP19는 과거의 성과를 기념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장애인의 권리가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과 국제개발협력, 민주주의의 미래 속에서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지 논의하는 출발점이다.
한국 장애계 역시 이번 회의를 통해 단순한 국제행사 참가를 넘어, 글로벌 장애포용 의제를 함께 설계하는 주체로서 국제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20년 전 CRPD는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선언했다. 이제 국제사회는 AI와 디지털 전환, 민주주의의 변화 속에서 그 약속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묻고 있다. 한국 장애계의 이번 뉴욕행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될 전망이다.
작성자김영연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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