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PD 20주년 맞은 뉴욕 시민사회포럼, 장애운동의 다음 20년을 묻다 > 해외소식


CRPD 20주년 맞은 뉴욕 시민사회포럼, 장애운동의 다음 20년을 묻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 6개 단체 국제사회에 연대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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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포럼 전경
 
지난 6월 8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제4회의실에서는 제19차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 당사국회의(COSP19)를 하루 앞두고 시민사회포럼(Civil Society Forum, CSF)이 개최됐다.
 
올해 포럼은 CRPD 채택 20주년을 맞아 "성과를 기념하고 공고히 하며,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차세대 이행 방향을 설정한다"는 주제 아래 진행됐다. 전 세계 장애인단체(OPD)와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네 개의 세션을 통해 지난 20년의 성과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논의했다.
 
포럼은 ▲CRPD 20년: 성과와 격차, 그리고 유엔 개혁 속 미래 ▲모든 장애인을 위한 착취·폭력·학대 없는 세상 ▲모든 장애인의 자율성과 독립을 보장하는 돌봄·지원체계 강화 ▲참여에서 대표성으로: 정치·공공생활에서의 시민참여와 리더십 확대 등 네 개 세션으로 구성됐다.
 
하루 동안 이어진 논의의 결론은 분명했다. 장애인의 참여는 더 이상 회의장 입장권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정책과 기술, 돌봄과 정치, 국제협력과 지역사회 전반에서 장애인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CRPD 20년,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남았나"
 
첫 번째 세션은 CRPD 채택 20주년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발표자들은 지난 20년 동안 CRPD가 장애인을 시혜와 보호의 대상에서 권리의 주체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많은 국가에서 차별금지법과 접근성 제도가 도입됐고, 장애인단체(OPD)의 정책 참여도 확대됐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CRPD가 만들어낸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장애여성 활동가들은 장애와 젠더가 교차하는 영역에서 폭력과 차별이 지속되고 있으며, 장애여성과 장애소녀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충분히 대표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라질 장애인연맹은 장애 원주민들이 장애와 빈곤, 지리적 고립, 원주민이라는 정체성이 중첩되며 복합적인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하나의 배제가 또 다른 배제 안에 존재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또 국제 NGO인 휴머니티 앤 인클루전(Humanity & Inclusion)은 장애인권 운동이 직면한 또 다른 위기로 국제원조 삭감을 꼽았다. 발표자는 최근 실시한 전 세계 장애인단체 조사 결과를 소개하며 응답 단체의 82%가 원조 삭감으로 인해 지역사회 장애인의 삶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이 발생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79%는 단체 운영 예산이 크게 감소했다고 밝혔다. 또한 응답 단체의 14%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조직 폐쇄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응답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세션에서는 장애인권 운동이 직면한 새로운 과제도 제기됐다.
 
이 세션에서 발표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영연 센터장은 CRPD가 지난 20년 동안 계단과 시설, 분리와 배제 같은 눈에 보이는 장벽을 허물어 왔다면 앞으로는 알고리즘과 데이터, 디지털 시스템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장벽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사회포럼에서 발표 중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영연 센터장
 
김 센터장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한 ‘장애와 인공지능 연구: 기회와 위기의 경계에서’ 연구결과와 AI기업 대상으로 제작 중인 체크리스트 내용을 언급하며 특히 "AI 시대의 차별은 반드시 악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 데이터의 부재와 접근성 없는 설계, 그리고 장애인을 배제한 의사결정 구조 속에서도 차별은 발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AI로 인한 차별이 발생했을 때 개발자와 기업, 데이터 제공자 사이에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는 문제를 지적하며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CRPD의 다음 20년은 AI 거버넌스를 포함해야 한다"며 "정부와 기술기업이 장애인 없이 AI를 논의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국제사회가 함께 목소리를 제기하고 연대할 때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CRPD가 만들어낸 변화가 분명 존재하지만, 급속한 기술혁신과 사회 변화 속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가 앞으로의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폭력과 학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
 
두 번째 세션은 ‘모든 장애인을 위한 착취·폭력·학대 없는 세상 만들기’를 주제로 진행됐다.
 
발표자들은 장애인에 대한 폭력과 학대를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나 범죄가 아니라 장애인을 종속적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 구조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시설과 정신병원, 보호를 명분으로 한 통제 환경이 여전히 많은 국가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장애여성과 장애아동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더욱 높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한편 이번 세션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학대에 대한 문제제기도 주목을 받았다. 한국장애인재활협회의 이리나 국장은 디지털 전환이 장애인에게 교육과 고용, 정보 접근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만, 동시에 온라인 공간이 새로운 착취와 폭력의 장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장애인이 온라인 괴롭힘, 혐오발언, 사이버폭력, 사기, 개인정보 도용, 기술을 활용한 학대 등에 불균형적으로 노출돼 있으며, 특히 장애여성과 장애소녀는 다중차별로 인해 더 큰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할 수 있다는 점도 경고했다.
 
나아가 최근 일부 AI 챗봇이 이용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정서적 의존을 유발해 심각한 정신적 피해로 이어진 사례들을 언급하며 "AI는 더 이상 단순한 기술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의사결정과 관계, 삶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돌봄은 보호가 아니라 자립을 위한 지원이어야"
 
세 번째 세션은 모든 장애인의 역량걍화와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돌봄·지원체계 강화를 주제로 진행됐다.
 
발표자들은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전통적인 복지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했다. 진정한 지원은 장애인을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러 발표자들은 시설과 의료 중심 접근이 여전히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지역사회 기반 지원체계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미주 활동가는 한국의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을 소개하며 지원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다.
 
그는 접근성 모니터링, 권익옹호 활동, 장애예술 활동 등 CRPD 이행을 위한 활동 자체를 노동으로 인정하는 이 모델이 "노동의 개념을 재정의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참여자의 90% 이상이 발달장애인 또는 최중증 신체장애인이며, 과거 시설에 거주했던 장애인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박 활동가는 "이들은 더 이상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자"라며, 장애인을 수동적인 복지 수혜자가 아닌 사회 변화를 만드는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해당 사업을 폐지하면서 약 400명의 중증장애인이 일자리를 잃게 됐다며 이를 CRPD 정신에 반하는 인권 후퇴라고 비판하고 국제사회의 연대를 요청했다.
 
▲ASEAN Disability Forum 발표자
 
ASEAN Disability Forum 발표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여성이 겪는 통제와 차별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는 1992년 사고로 척수장애를 갖게 된 이후 의료진으로부터 불임수술을 권유받았던 경험을 소개하며, 사회가 장애여성을 권리를 가진 시민이 아니라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발표자는 장애여성이 원하지 않는 의료행위와 강제 불임수술, 재생산권 침해를 경험하는 현실을 언급하며 "이는 의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페루의 Neurodivergent Peruvian Coalition 역시 정신장애인과 신경다양인에게 필요한 것은 시설수용이 아니라 지역사회 기반 지원이라고 강조했다. 발표자는 동료지원(peer support) 체계가 정신장애인들이 사회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돕고, 당사자의 경험과 지식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발표자들은 돌봄과 지원의 목적은 장애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데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시설과 보호 중심 체계에서 지역사회 기반 지원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참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포럼의 마지막 세션은 정치와 공공생활에서의 시민참여와 대표성 확대를 주제로 진행됐다.
 
발표자들은 장애인이 단순히 회의에 참석하거나 의견을 제출하는 수준을 넘어 정책과 사회 변화를 이끄는 리더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이팅게일 글로벌 보건 이니셔티브(Nightingale Global Health Initiative)는 장애인을 기존 제도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의미 있는 포용은 결국 리더십의 문제"라며 장애인이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 뇌성마비 협회(International Cerebral Palsy Society)는 기술 발전이 장애인의 정치 참여와 대표성을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치 구조에서 더욱 배제돼 온 뇌병변장애인, 지적장애인, 중복장애인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장애인을 대신 대변하는 정치가 아니라 장애인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호주 다운증후군 협회와 ACT 다운증후군 및 지적장애 협회는 지적장애인의 고용과 사회참여 문제를 제기했다. 발표자는 4년 전 유엔에서 호주 정부에 지적장애인의 고용 확대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을 촉구했던 경험을 소개하며, 여전히 많은 지적장애인이 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장애인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장애인연맹은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선언한 CRPD의 정신을 강조하며 "참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장애여성,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 등 다양한 장애인이 리더십과 의사결정 구조 안에 포함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국가와 시민사회 간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장애포럼은 아시아·태평양 탈시설연대(APDI)의 활동을 소개하며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혜란 활동가는 탈시설 문제를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전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 의제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Asia and Pacific Disability Forum(APDF)에서는 장애인의 정치적 대표성 부족 문제를 제기했다. 이기환 대리는 최근 한국 지방선거에서 장애인권 활동 경험을 가진 후보가 전체 후보의 0.8%에 불과했다는 점을 소개하며, 장애인은 여전히 투표권뿐 아니라 피선거권 행사에서도 구조적 장벽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협회에서는 AI·IT 교육 프로그램인 글로벌IT챌린지(Global IT Challenge)를 사례로 소개하며 장애청년이 수혜자가 아닌 사회 변화를 만드는 주체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CRPD의 다음 20년을 향해
 
20년 전 채택된 CRPD는 장애인을 보호와 시혜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국제사회는 차별금지법 제정, 접근성 확대, 탈시설 논의 진전 등 적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뉴욕 유엔본부에 모인 시민사회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장애인의 권리가 법과 제도 속에 기록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인공지능이 확산되는 디지털 사회에서도, 돌봄과 지원체계가 설계되는 과정에서도, 정치와 공공정책이 결정되는 자리에서도 장애인은 여전히 주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 시민사회포럼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Nothing About Us Without Us(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것을 결정하지 말라)"는 구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과제였다. 특히 발표자들은 이제 장애인의 참여를 넘어 대표성과 리더십을 확대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장애인이 직접 만드는 정책, 장애인을 대변하는 정치가 아니라 장애인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CRPD 20주년을 맞은 올해 시민사회포럼은 지난 20년의 성과를 축하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의 20년 동안 장애인이 기술과 정치, 돌봄과 지역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어떤 연대를 만들어 갈 것인지를 묻는 자리였다.
 
작성자함께걸음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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