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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PD 20주년 맞은 국제사회, 장애와 기술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다

COSP19 사이드이벤트, "장애인은 기술의 수혜자가 아닌 혁신의 주체"

본문

 
뉴욕 유엔본부에서 6월 8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되고 있는 제19차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 당사국회의(COSP19)에서는 장애와 기술을 주제로 한 다양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 가운데 11일(현지시간) 열린 사이드이벤트 「장애인권 증진을 위한 스타트업과 신기술의 잠재력 활용(Unleashing the Potential of Startups and Emerging Technologies for Promoting Disability Human Rights)」은 기술혁신과 장애인권을 연결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오스트리아 유엔대표부가 주최하고 제로 프로젝트(Zero Project), 하버드대학교 장애법 프로젝트(Harvard Law School Project on Disability)가 공동 주관한 이번 행사는 장애인권리협약 채택 20주년을 맞아, 앞으로의 20년 동안 기술과 혁신이 장애인의 삶과 권리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에서는 벤처투자자, 장애인 창업가,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정부 관계자 등이 참여해 장애기술(Disability Tech) 산업의 현황과 가능성, 그리고 정부의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에서 "장애인이 만드는 기술"로
 
기조연설에 나선 루이스 갈레고스 전 에콰도르 외교장관은 2006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장애인권리협약 협상 과정의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년간 국제사회가 장애를 의료적 관점에서 바라보던 접근에서 권리 기반 접근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장애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고, 사고나 질병, 고령화로 인해 장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어 그는 앞으로의 과제로 기술과 혁신을 제시했다. "우리는 미래를 붙잡아야 합니다. 민관협력을 통해 장애 관련 산업과 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하며, 무엇보다 장애인이 그러한 산업과 서비스를 직접 소유하고 운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토론의 핵심 화두 역시 장애인을 기술의 수혜자가 아닌 혁신의 주체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제 기술은 과거의 실수를 고치는 산업이 아니다"
 
 
미국의 임팩트 투자사 Naval Ventures의 창립자인 레지나 클라인(Regina Kline)은 장애 기술 산업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존의 보조기술 산업이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설계된 기술의 문제를 뒤늦게 수정하는 역할에 머물렀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우리는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신체장애인을 배제한 기술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산업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창업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제는 장애인이 처음부터 기술 설계 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혁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최근 벤처캐피털 업계에서도 장애인 창업가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동안 지나치게 비쌌던 보조기술의 가격을 낮추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성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장애기술 전문 투자사 Adaptation Ventures의 공동창업자 브라이언 팔머(Brian Palmer)는 장애인 창업가들이 여전히 투자시장에서 심각한 장벽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당사자인 그는 2020년 창업 당시 많은 투자자들로부터 "장애 시장은 너무 작고 수익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영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장애인 창업자는 비장애인 창업자보다 투자받을 가능성이 수백 배 낮습니다.“
 
그는 장애인 창업가뿐 아니라 장애 가족, 장애 분야 연구자와 임상가들 역시 혁신의 중요한 주체라고 강조했다. 또한 장애인 커뮤니티와 창업자, 투자자를 연결하기 위한 플랫폼 'Ability Lane'을 소개하며 "장애인이 실제로 원하는 기술을 더 많이 개발할 수 있는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장애혁신 액셀러레이터 Access to Success를 이끄는 곤살로 찬작(Gonçalo Chanjak)은 혁신을 시장에 안착시키는 과정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많은 장애 관련 기술들이 좋은 아이디어에도 불구하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해 사라진다고 지적했다. "정말 훌륭한 기술들이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금세 사라진다. 우리의 역할은 그런 기술들이 1년, 5년,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 전 세계 장애인에게 도달하도록 돕는 것이다."

 

Access to Success는 현재까지 지원 기업들을 통해 전 세계 250만 명 이상의 장애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접근성과 동등한 참여를 실현하는 많은 수단들이 과거의 혁신에서 출발했다며, AI 기반 수어기술이나 실시간 자막과 같은 신기술 역시 향후 접근성의 표준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장애는 혁신의 원천’
접근성을 넘어 참여와 공동설계로
 
장애인 창업가 지원기관 2gether International의 창립자 디에고 마리스칼(Diego Mariscal)은 장애를 사회적 부담이 아니라 혁신의 원천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뇌병변장애 당사자인 그는 어린 시절 멕시코에서 경험한 차별과 배제를 이야기하며, 자신이 처음 COSP에 참석했을 때 장애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장애를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 경험이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그는 현재 2ogether International을 통해 전 세계 1,300명 이상의 장애인 창업가를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장애인권 운동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민권·인권 중심 접근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장애를 경쟁우위(competitive advantage)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장애인권' 중심의 프레임에서 나아가 '장애 주도 혁신(disability-driven innovation)'의 프레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행사 마지막 발언자로 나선 안드레아스 린처 오스트리아 연방 노동·사회·보건·소비자보호부 장애인권국장은 인공지능과 신기술이 장애인의 자립과 사회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접근성이 처음부터 고려되지 않을 경우 새로운 차별과 배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국가장애행동계획을 통해 웹 접근성, 디지털 접근성, AI 관련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유럽연합(EU)의 접근성 관련 법률을 국내법으로 이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Nothing About Us Without Us’ 원칙을 강조하며 장애인이 기술 개발 과정에 처음부터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접근성을 사후적으로 추가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장애인을 포함해 설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기술의 미래를 누가 설계할 것인가
 
이날 토론은 장애인이 기술혁신의 수혜자가 아니라 창업가와 개발자, 투자자로서 혁신을 이끄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술의 성장과 산업 생태계 확대에 대한 논의에 비해 개인정보 보호, 감시 기술, 자기결정권 침해 등 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최근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AI 돌봄기술, 행동 모니터링 시스템, 데이터 기반 지원 서비스 등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자립생활과 의사소통을 지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 동시에 감시와 통제, 개인정보 침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장애인권리협약 20주년을 맞은 국제사회는 이제 기술의 활용 여부를 넘어, 누구를 위해 어떤 가치 아래 기술을 개발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이번 COSP19 논의는 장애인이 기술혁신의 수혜자가 아닌 설계자이자 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작성자김영연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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