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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누구에게나 평등했으면”

다큐영상 찍는 시각장애인 노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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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 김태성 기자
“아직 안 오셨나요?”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두리번거리며 전화를 걸어본다.
“아니요, 도착했는데요. 정문 앞에요.”
저만치 서 있는 한 청년의 뒷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아, 알겠네요. 흰모자 쓰셨죠?”

묻다가 아차 한다. ‘흰’이라는 말이 걸려서. “모자 쓰셨죠?”라고 고쳐 묻는다.
색깔이 식별의 표지가 되는 이 익숙한 습관이라니.
다가가서 인사를 나눈 다음 자리를 옮겨 이야기하기로 한다. 무심코 걸음을 떼는 순간, 그가 불쑥 팔을 붙잡는다. “잡아도 될까요?” 이런이런, 그의 눈앞이 어둠이란 걸 또 깜빡 잊었다.

<당신이 고용주라면…>으로 인권영상공모전서 우수상

그와의 만남은 비엔날레공원(광주 용봉동)에서 이뤄졌다.
“집에서 가까워서 산책하러 자주 오는 곳이에요. 그래서 어디에 계단이 있는지 턱이 있는지 길이 있는지 잘 알아요.”
전시관 앞을 지나 공원에 접어들자 그는 정말 혼자서도 잘 걷는다.
“여기에선 달릴 수도 있어요.”

‘달릴’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풍선처럼 부푼다. 그가 달릴 수 있는 유일한 곳.
나무들 늘어선 공원은 늦가을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단풍철’은 이제 그에게 없다. “겨울이면 추워지는 것으로 겨울을 느끼고 봄이면 꽃향기로 꽃핀 걸 알고….” 눈이 보였던 시절 마음 속에 담아둔 풍경들 몇 장으로 오가는 계절의 풍경을 그려볼 뿐.
그런 그가, 빛과 어둠을 겨우 구별하고, 저기 있는 것이 전봇대인지 사람인지 움직임으로 겨우 짐작하는 그가 영상을 찍었다. 1급 시각장애인 노동주(26)씨.

국가인권위원회 광주사무소와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 등이 주최한 2008인권영상공모전에서 그는 <당신이 고용주라면 시각장애인을 채용하시겠습니까?>라는 작품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먼저는, 지난 9월27일 KBS <열린채널>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만난 작품이기도 하다.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시각장애인이 영상을 찍는다구? 그게 가능해?

다발성경화증이란 희귀병으로 시력 상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증상이 나타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어지럽고 눈을 뜨기만 하면 구토증에 시달렸어요.”
검사만 하러 다니는데도 광주 전남 지역의 온갖 병원을 순례해야 했다. 어렵사리 알아낸 병명은 다발성경화증이란 희귀병. 중추신경계(뇌·척수)의 손상으로 일어나는 면역체계 이상 질환으로 시력 상실, 평행·운동 장애, 언어·감각 장애, 하지 마비 등이 주요 증상.

세상으로 나있던 많은 문들이 철커덕 철커덕 모두 닫히고 어둠 속에 혼자 던져진 기분이었다. 학교를 자퇴한 뒤 병원에서의 투병생활이 2년 동안 이어졌다. 그때 품었던 소망은 단하나. ‘평범해지고 싶다!’는 것. “날마다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들이랑 공 차고 떡볶이 먹고…그런 평범한 생활이 미치도록 부러웠어요.”

대학(조선대)에 들어간 건 검정고시를 거쳐서였다. 하지만 대학 2학년 때 시신경 마비로 한쪽 눈을 실명했고 졸업 무렵에는 나머지 눈의 시력마저 잃고 말았다.
“처음 한 쪽 눈을 잃을 때는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지요. 남은 눈을 잃어가는 과정은 너무 바빠 힘든 줄도 몰랐어요.”

   
자신의 등 뒤로 펼쳐진 늦가을의 풍경을 그는 보지 못한다. 하지만 보지 못해서 보는 것들도 많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키우거나 펼칠 수 없는 장애 많은 이 사회의 현실도 그 중 하나.
<당신이 장애인이라면…>이란 다큐영상엔 그가 시각장애인들을 통해 본 세상이 담겨 있다.  ⓒ 김태성 기자
눈이 보이는 동안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연극, 스킨스쿠버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고, 전공과 관련한 온갖 자격증들도 따 놓았다.
그의 전공은 환경공학. “21세기 유망직종 분야가 환경이라 하더라구요. 그래서 선택했지요.”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시력을 잃은 그 순간 그의 인생에선 ‘유망’이란 단어 자체가 무의미해져 버렸다. 졸업하면서 취업을 시도했지만 시각장애인을 채용하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각장애인용 컴퓨터프로그램을 이용해 웬만한 사무는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어요.”
잇단 거부, 혹은 거절. 그러려니 하면서도, 그는 번번이 상처받고 좌절했다.

수없이 취업 실패한 뒤 희망처럼 다가온 카메라

그 좌절 끝에 카메라가 희망처럼 다가왔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소리신문 제작 때문에 시청자미디어센터를 오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6밀리 캠코더 등 촬영장비를 지원받아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어요. 바로 영상제작지원팀을 찾아갔죠. 영상을 찍고 싶다고 말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때 아버지가 집에 비디오를 들여놓았던 날의 설렘을 기억하는 그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그도 무던히 영화를 보았다. 그러는 동안 품게 된 꿈이 영화감독.
뜻밖의 시련들을 겪으면서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꿈이 그때 예기치 않게 튀어 나왔다. “영상을 찍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 반응은 어땠을까. “처음엔 얼척없었대요.” 하지만 그의 진지함에 모두 설득당했다.

“그때 누군가 날 찍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눈도 안 보인다면서 영화를 찍겠다는 놈이 하도 신기하고 특이해서 자기도 모르게 촬영을 했대요.”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이는 김항빈씨. 이후 그의 작업과정을 일일이 동행해 촬영하고 세상을 향한 그의 발언을 담아낸 김씨는 이번 인권영상공모전에서 <동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다>는 작품으로 장려상을 받았다.

“그 순간이 바로 그 형의 도전도 시작되고 나의 도전도 시작된 순간이었죠. 영상활동을 계속 해오던 형인데, 나를 본 순간 자신이 많이 나태해져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대요.”

‘넌 안돼’가 아니라 ‘넌 할 수 있어’란 말 절실했던 마음

영상작업은 그에게 세상을 다시 만나고 마음을 열어 가는 과정이었다. 작품이 이루어지기까지 또 한 명의 친구가 함께 했다. 전성용(26·조선대 경제학과)씨.
“시력을 잃은 뒤 거의 모든 친구들이랑 연락을 끊고 살았어요.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도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사람들하고도 세상하고도 점점 멀어졌는데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연락을 해온 친구가 성용이에요.”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했던 때였다. 그는 성용씨랑 통화했다. “먼저, 내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한 번의 놀람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그 다음 말은, 내가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말이었죠. 성용이는 반대하지 않았어요. 의아해 하지도 않았어요. 대개의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무슨 영화촬영이냐고 말리고 무시했는데, 성용이는 ‘난 니가 뭔가 할 놈인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어요. 그는 나를 믿어준 거죠.”

가장 큰 힘은 그 믿음이었다. ‘넌 안돼’가 아니라 ‘넌 할 수 있어’. 그에겐 너무도 절실하고 결핍됐던 말이었다.

   
영상작업은 그에게 세상을 다시 만나고 마음을 열어 가는 길이 돼주었다. ⓒ 전라도닷컴
지난 여름 한달 동안 성용씨는 그의 손과 발이 돼 주고 눈이 돼 주었다. 비장애인이 두세 컷이면 끝낼 수 있는 장면을 그는 스무 번이고 서른 번이고 반복해서 찍어야 했다.
“근거리 영상은 카메라 앞에 손을 대고 휘휘 저어가며 짐작으로 찍을 수 있었지만 먼 거리 영상은 찍기 어려웠어요. 일일이 설명하고 지켜보며 감을 잡게 해준 것이 성용이었어요.”
촬영 내내 화기애애했던 건 아니다. “내가 작품에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 찍고 또 찍고,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도 불러내고 그러니 삐그덕거리기도 하고. 다퉜다가도 그 다음 현장에 성용이는 또 어김없이 나와 주었지요.”

성용씨는 <동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다>란 다큐 속에서 말한다. “동주는 촬영 내내 들떠 있었어요. 너무 설레어서 잠도 안 온다고 했어요. 동주가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은 나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어요.”
내내 붙어 다녔기에, KBS <열린채널>에 방송이 결정됐다는 소식도 함께 있을 때 들었다.
그때 동주씨의 첫마디는 “우리가 해냈어!”였다. 성용씨의 반응은 “왜 우리야? 니가 해냈지!”

시각장애인들이 ‘안마밖에 할 수 없는’ 현실

동주씨가 만든 영상의 첫 장면은 시각장애인들이 시위하는 장면이다. <맹인들의 생계수단 현정부는 보장하라> 같은 플래카드들의 물결. 지난 10월말 시각장애인만 안마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규정한 의료법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이 내려지기 전, 시각장애인들이 안마 업을 둘러싸고 생존권 보장을 부르짖는 시위 모습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그가 만난 시각장애인들의 이야기. 열정과 재능을 갖고도 꿈을 펼칠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의 현실을 담았다. 라디오 DJ가 되고 싶은 한나, 클라리넷 연주를 잘 하는 제윤. 꿈 많은, 그렇지만 자기 앞에 놓인 벽도 아는, 열 여덟 살 소녀들이다.

육상선수가 꿈이라는 하은이가 달리는 모습도, 댄서가 되고픈 민지가 춤추는 모습도 담았다.
꿈은 아이들의 숫자만큼, 세상의 온갖 직업만큼, 많고 다양하다. 카메라 앞에서 아이들은 수줍게, 발랄하게,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꿈을 이야기한다. 환경지킴이, 선생님, 태권도 사범, 목사, 작가, 가수, 야구선수, 컴퓨터프로그래머, 비행기 조종사….
누가 이 아이들한테 네 꿈이 뭐냐고 물어준 적 있을까. 그 꿈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환하다.

아이들의 꿈을 듣다 보면, 첫 장면이 곱씹어진다. 안마업을 보장해 달라는 절박한 목소리 뒤에는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이 ‘안마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 사회 현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꿈은 안돼!’라고 강고한 벽을 치는 현실 속에서 그도 세광학교를 다니며 안마를 배우고 있다. 침술, 쑥뜸, 해부학, 생리학 등등을 두루 배워야 하고, 엄지손가락이 퉁퉁 부어 오르도록 고된 실습을 해야 하는 과정이다.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도 많이 담았다. 영화제목과 같은 질문을 거리에서 그대로 던졌다. “당신이 고용주라면 시각장애인을 채용하시겠습니까?” 대답은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아요”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안될 것 같아요” 등등. 한마디로 “아니오”다.

작품을 맺는 그의 말은 이렇다. “나 자신도 1급시각장애인으로서 다큐를 제작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영상에 담고 싶었습니다. 비록 보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세광학교 친구들에게 이 영상을 바치고 싶습니다.”

제일 보고 싶은 건 엄마!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나 보다. 그는 벌써 다음 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거짓말도 들려요>(가제). “눈이 보이지 않으니 만만한 대상으로 여겨져서인지 시각장애인들이 사기를 많이 당해요. 그 문제를 다뤄보고 싶어요.”
영화 빼고 평상시 가장 좋아하는 일은 책읽기. “시각장애인사이트 들어가서 책을 많이 읽어요, 아니 들어요.”

책으로 만나는 세상이 그에겐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다. “새로운 곳, 아름다운 곳이 제게는 다 의미가 없지요. 바다에 가도 바다냄새가 나서 바다인 줄 알지, 어느 장소든 그저 ‘집 바깥’과 같은 의미니까. 소설을 들으며 마음으로 여행을 하는 게 더 좋아요.”
제일 보고 싶은 건 엄마! “주름살 많이 느셨을 것 같아요.”
자나깨나 그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건 부모님의 건강. 어머니는 위암, 아버지는 폐암에 걸려 투병중이다.

“지난 9월 제 작품이 텔레비전으로 방송됐을 때 엄마 아버지는 한없이 울기만 하셨어요. 어떻게 눈도 안보이는데 이것을 찍었냐며.”
그 때 받은 상금은 어머니 병원비와 생활비로 썼다. 형도 투병생활을 하고 있어 네 가족이 기초생활 수급비로 어렵게 생계를 잇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더더욱 동주씨에게는 취업이 절실하다.
‘희망의 증거’인 동시에 ‘저항의 몸짓’이기도 한 그의 영상. 보이지 않는 눈으로 카메라를 든 건, ‘넌 안돼!’라고 미리 못박고 장애를 장애로 내버려두는 사회를 향해 가능성을, 꿈의 치열함을 증명하는 분투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은 이것. “사랑하는 일을 하세요. 저도 하잖아요!” ‘저도’라는 말이 아프다.
작성자남신희 기자  miru@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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