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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길·생명의 길·평화의 길을 찾아서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의 오체투지를 따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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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죽비소리를 신호로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삼보를 걸은 뒤 아스팔트 위에 온몸을 내던 진다. 오체투지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 두 분의 걸음 걸음은 경쟁과 실용, 돈과 일등놀이, 성공지상주의와 이기심이 뒤덮은 사회에 깨달음의 물음을 던진다. ⓒ 김태성 기자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삼보일배가 아닌 삼보 오체투지다. 그것도 지리산에서 묘향산까지 엄청난 고행의 대장정.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서다.

지난 9월4일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고제를 봉행한 뒤 오체투지에 들어갔다. 우선 11월1일까지 두 달간 계룡산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수경스님은 오체투지에 앞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생명의 질서를 거스르는 유일한 생명체”라며 “사람다움은 생명의 실상을 통찰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또 “출가자가 마냥 세상의 시시분별에서 물러나 있을 수는 없다”며 “번뇌의 진흙탕이 보살의 정토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규현 신부도 순례길에 앞서 “다리가 불편한 스님과 늙은 사제가 다시 순례길에 나선다”며 “생즉사, 사즉생의 자세로 임하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이어 “오체투지는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이념과 정치행태에 대한 저항이자 항의”라며 “경쟁과 실용, 돈과 일등놀이, 성공지상주의와 이기심이 뒤덮은 사회는 죽은 공동체임을 몸짓으로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고 못을 박았다.

다리가 불편한 스님과 늙은 사제가 다시 순례길에 나서

9월17일 오체투지 순례 14일째. 아침 7시에 광주를 출발, 구례군 산동면으로 향했다. 희부윰하게 동터오는 여명에 새벽달이 희미해지고 있다. 두 분의 오체투지가 무사히 끝나게 해달라고 달을 향해 오래도록 마음을 모았다.

구례군 초입.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산허리가 벌건 속살을 드러낸 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신음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장날을 맞은 산동면 장터는 이른 아침부터 골프장 반대투쟁을 전하는 확성기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오전 8시35분 구례군 산동면사무소 앞. 오체투지의 일정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순례단 행렬의 꽁무니에 달라붙었다.

   
ⓒ 김태성 기자
“딱!”
확성기 소리와 자동차 소리 등 온갖 소음을 뚫고 명징하게 죽비소리가 울려 퍼진다. 죽비소리를 신호로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삼보를 걸은 뒤 아스팔트 위에 온몸을 내던진다. 양 무릎, 양 팔꿈치에 이어 이마까지 아스팔트와 하나가 된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다. 겸손의 자세로 마음을 비우는 의식이다. 순례단원의 일부는 삼보 오체투지로 보조를 맞추고 나머지는 삼보반배로 깊이 고개를 숙인다.

“딱!”
두 분의 밭은 숨소리가 행렬 끄트머리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한 오체투지 체험자는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가 온 몸으로 전해진다”며 “머리와 등에서는 땀이 비오듯 하고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고 전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죽비소리가 아프게 묻는다. 순례 일정은 매 150m 전진할 때마다 10분씩 휴식으로 진행된다.

수경 스님의 무릎 상태가 좋지 않다.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새만금 삼보일배 투쟁으로 무릎 수술을 받은 데 이어 한반도 대운하 반대를 위해 1000㎞의 강둑을 걸은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까닭이다. 가는 길 내내 찜질과 마사지의 연속이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정도 고통스럽긴 매한가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로 마음 비워

오체투지에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두 분의 머리와 얼굴은 벌써 땀으로 흥건하다. 문규현 신부는 자신의 고통보다는 뒤를 따르는 순례단의 어깨를 일일이 다독이며 위로한다. 문 신부의 세례명은 바오로다. 바오로는 포교를 위해 무려 2만㎞에 이르는 거리를 걸었다지 않는가. 세례명 속에 문 신부의 운명이 예정지어졌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짧게 깎은 머리, 청동빛 피부, 듬성듬성 자라난 턱수염. 두 분은 어느새 닮아 있었다. 예수의 모습이 따로 없고 부처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짧은 휴식시간, 수경 스님이 아예 드러누웠다. 연신 찜질과 마사지를 해보지만 퉁퉁 부은 무릎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스님을 보는 문 신부의 눈엔 수심이 가득하다.
아침나절이지만 벌써 30도를 웃돈다. 바싹 달구어진 아스팔트는 순례단에게는 차라리 비수에 가깝다.

   
새만금 삼보일배 투쟁으로 무릎 수술을 받은 데 이어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며 1000㎞의 강둑을 걸었던 수경스님이 다시 삼보 오체투지 순례에 나섰다. ⓒ 김태성 기자
선도 차량이 만들어주는 한 뼘 그늘에 의지해 휴식을 취하는 두 분의 모습이 애처롭다. 두 분은 한 뼘 그늘에도 감사하는 모습이다. 두 분도 우리에겐 뙤약볕 같은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청량제 같은 그늘 아닐까.

오체투지가 진행되는 동안 지리산 청학동 학사 두 명이 지나가다 오체투지 일행을 반갑게 맞는다. 그들은 “이렇게 오실 줄 알았으면 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지나가는 길이라 죄송하다”며 “목적지까지 건강하게 가시라”고 격려했다.

오전 11시30분. 오체투지 순례단은 산동면 소재지를 지나 19번 국도 인접로에서 오전 일정을 끝냈다. 문규현 신부와 오체투지 호흡을 맞춰왔던 ‘노짱님과 삼겹살파티를 준비하는 모임’의 한 여성이 뜨겁게 눈물로 포옹을 한다.

“개발과 성장 중심에서 벗어나 생태적 가치 세워야”

점심식사는 자급자족이 원칙이다. 식사는 아침나절 준비한 주먹밥과 광주지역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제공한 김밥으로 충당했다. 두 분은 많은 양의 음식이 오체투지에 부담이 된다며 적은 양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수경스님은 기자들과 시국에 관련된 토론을 했다. 최근 종교편향 논란과 관련해서는 “대통령이 사과한다고 어청수가 물러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며 “불교계가 종교편향만 문제삼지 말고 시국 전체적인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불교인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면서 “한국사회가 개발과 성장 중심에서 벗어나 생태적 가치로 의식의 일대전환을 이뤄내야 한다”고 충고했다.
오체투지 순례단의 활동을 동영상에 담느라 동분서주하던 문정현 신부도 기자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문 신부는 “국민전체의 의식변화 없이는 개발논리를 막아낼 수 없다”며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리가 불편한 스님과 늙은 사제가 다시 순례길에 나선다”며 “생즉사, 사즉생의 자세로 임하겠다”고 말했던 문규현 신부. ⓒ 김태성 기자 트럭들 질주하는 위험한 길에서도 오체투지는 계속되고

오후 2시30분. 꿀맛 같은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이 끝나고 오후 일정이 시작됐다. 오후 일정은 오전보다 훨씬 위험하고 힘든 구간에서 진행됐다. 국도 위로는 화물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굉음을 내며 질주했다.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매연과 화학물질 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차바퀴에 밀려 튀어나오는 작은 돌들은 오체투지 순례자들의 얼굴과 가슴에 생채기를 만들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왔다는 정순임씨는 “추석 전에 지리산에 와서 실상사에 머물다가 오늘 순례일정에 참여하게 됐다”며 “직접 참여해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또 “오체투지는 환경파괴에 대해 각성하고 성찰하라는 깨달음의 메시지”라며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반대투쟁에 문정현 신부님이 4차례나 찾아줘서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밝혔다.

오늘 처음 참여했다는 이창건(29·대학생)씨는 문규현 신부가 속해 있는 전주 평화동성당의 신자다. 이씨는 “두 분이 가는 길은 말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기도, 행동으로 하는 기도”라며 “두 분의 힘과 에너지, 행동력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 하루 순례길에 참여하는 동안 육체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정신만큼은 더욱 또렷해졌다. 오로지 죽비소리 하나에만 의지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죽비소리 한번에, 더 겸손해지자. 죽비소리 한번에, 더 낮아지자. 죽비소리 한번에, 더 적게 말하자. 죽비소리 한번에, 더 적게 소비하자. 죽비소리 한번에, 더 느려지자. 죽비소리 한번에,….

    수경 스님의 무릎 상태가 좋지 않다. 연신 찜질과 마사지를 해보지만 퉁퉁 부은 무릎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스님을 보는 문 신부의 눈엔 수심이 가득하다. ⓒ 김태성 기자 탐(貪)·진(瞋)·치(痴)의 삼독(三毒)에서 벗어나야

어느새 걸음, 걸음이 깨달음을 향하고 있었다. 길 위의 신부, 길 위의 스님은 다름 아닌 고난 받는 예수이자 구도를 향한 부처의 모습이었다.
한국사회는 지금 교회와 성당, 사찰 등 종교시설물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불교·개신교·천주교 3대 종교의 신자들을 합하면 우리나라 전체인구를 넘어설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바벨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마구니의 삶’을 살고 있다. 성전과 불사의 이름으로 ‘바벨탑’을 쌓는 데 여념이 없다. 탐(貪)·진(瞋)·치(痴)의 삼독(三毒)에 중독돼 반생명적 마구니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종교가 앞장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체투지에 나선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종교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역설의 구도자를 닮았다. 오체투지는 불가에서 말하는 고집멸도(苦集滅道) 가운데 ‘멸’의 길이다. 깨달음을 향한 ‘도’의 길이다. 소멸의 변증법이자 적멸의 반야(般若)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을 그대로 무화(無化)시켜 버리는 지고지순의 경지가 바로 오체투지의 경지가 아닌가 싶었다.

14일째 일정은 구례 산동면 보건지소 앞에서 시작돼 신밤재 터널 1.3㎞ 입구 앞까지 4.5㎞구간에서 진행됐다. 순례일정은 오후 5시15분 1분명상 후 큰절로 마무리됐다.

글=정영대 <문화웹진 씨네트워크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오체투지 순례 참가자들과 함께

    ⓒ 김창헌 기자 “두 분은 사람들이 가야할 길을 잘 보여줘”
버마 민주화운동 참여한 마웅 저

마웅 저(Maung Zaw·39)씨는 1988년 8월8일 미얀마 민주화항쟁 당시 고등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했다가 이후 버마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94년 군부독재의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 2000년 이후 난민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소송을 진행중이다. 버마 민족민주운동(NLD) 한국지부 결성에 참여했으며 현재 부천시 외국인노동자의 집 이사, 성공회대 아시아 NGO 정보센터 연구원, 함께하는시민행동 인턴으로 활동중이다.

다음은 마웅 저씨와 일문일답.
―오체투지 순례단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소개로 참여하게 됐다. 현재 버마 민주화운동을 위해 한국 민주화운동 방식을 배우고 있다. 특히 이번 오체투지는 불교 스님과 천주교 신부님이 종교간 벽을 허물고 함께 하는 운동이라 관심도 많고 배우고 싶어서 참여했다.”

―버마에서도 스님들이 정치적 역할을 하지 않나?
“버마에서도 스님들이 활동을 하지만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만 행동한다. 평소에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스님은 없다. 버마를 불교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버마 국민의 70% 정도가 불교신자다. 나머지는 이슬람교·기독교 등 타종교와 무신론자가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버마 민주화운동은 군사독재에의 저항 외에도 다민족간 화해, 종교 간 화해 운동 등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오체투지 순례단에는 언제부터 참여했나?
“9월1일 준비모임부터 참여했다. 첫날 두 분의 오체투지를 보고 눈물이 났다. 두 분이 세상을 위해 할 일이 많은데 아플까봐 걱정도 많이 했다. 하지만 두 분의 모습을 보며 지금은 행복감을 느낀다. 두 분의 운동은 사람들이 가야할 길을 너무 잘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생활 13년째라고 했다. 한국에 대해 평가한다면?
“개인적으로 한국생활에 감사한다. 많은 것을 배웠고 배우고 있다. 불만이야 왜 없겠는가. 어쩔 때는 나 혼자만 한국을 너무 짝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한국만 좋아하는 것 같다. 한국 내부를 향해서만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버마 민주화운동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이번 오체투지 정신이 한반도의 평화를 넘어 아시아 평화까지 확장됐으면 좋겠다.”

―현재 난민지위 소송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00년부터 난민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소송중이다. 9월25일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질 것이다.”

―난민지위를 인정받으면 무엇이 달라지나?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좋아지는 것이 있다면 내 이름으로 은행계좌번호를 틀 수 있다는 것, 내 명의의 휴대전화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 해외 출·입국이 가능해진다는 것 정도다. 세금을 내야 한다는 점은 부담이다. 난민지위를 인정받더라도 한국정부의 보호만 받을 뿐 지원은 없다.”

―난민문제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대책은 어떤가?
“이주노동자나 난민문제 대책을 보면 한국정부의 제도가 너무 오래되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10년 전보다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그나마 미국산 쇠고기나 교육문제 등 국내문제가 불거지면 이주노동자 문제는 곧잘 외면 받는다. 난민문제에 대해 고민하거나 함께 해결하는 단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 결혼할 생각은 없나?
“장가는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가고 있다. 아무래도 가족을 이루면 운동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본주의 사회의 한국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결혼하기가 두렵다.”

    ⓒ 김창헌 기자 “얼마나 많이 울어야 하나…차라리 내가 하고 말 일”
문정현 신부

“육순이 넘은 늙은 동생이 결정한 것을 하라마라 할 수 있겠느냐.”
동생의 오체투지를 바라보는 문정현 신부의 심정은 담담했다. 문 신부는 “동생이 결정한 것을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1%의 가능성만 있더라도 하도록 오히려 독려했다”고 말했다.
문 신부는 “왜 말리지 않느냐, 더 고통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며 “나라고 편했겠냐”고 말해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문 신부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얼마 동안 얼마나 많이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차라리 저 꼴을 보지 않거나 내가 하고 말 일이다”고 안쓰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문 신부는 또 오체투지를 이명박에 대한 기피가 아닌 ‘새로운 의식변화 운동’으로 설명했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정권을 바꿨지만 본질적으로 변화된 것이 뭐냐는 거다.

문 신부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매 정권 때마다 사법처리 됐다”며 “이명박 정부뿐만 아니라 이전 정권들도 개발과 성장을 위해 자본과 권력을 총동원했다”고 비판했다.
또 “새만금 경제는 거짓논리로 포장됐지만 DJ도 노무현도 망하는 것을 알면서도 표의 논리에 포섭됐다”며 “단지 정권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민과 민중 전체의 새로운 의식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 신부는 “큰 희생을 바탕으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문 신부가 길 위에서 보낸 세월은 34년! 사람들은 그를 스스럼없이 ‘길 위의 신부’라고 부른다. 1966년 사제수품을 받은 뒤 1974년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사회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미군기지 반대운동, 불평등한 소파(SOFA)개정운동, 여중생 사망사건 대책위 활동, 새만금 반대 삼보일배, 작은자매의집 운영 등. 그러느라 그의 삶은 수십 차례의 투옥과 불법 감금, 백색테러 등으로 채워졌다. 인혁당 사건 때는 중앙정보부가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의 시신을 탈취하려는 것을 저지하려다 크레인에서 추락해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동생 문규현 신부는 그런 그를 ‘동지’이자 ‘살아있는 예수’ 그리고 ‘스승’으로 부른다.

    ⓒ 김창헌 기자 “오체투지는 촛불정신의 계승”
국보법 위반혐의로 재판중인 김형근 교사

“오체투지는 촛불정신의 계승”이라 말하는 김형근 교사는 현재 해직상태다. 지난 1월29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6월23일 법원의 보석결정으로 풀려났기 때문. 현재 12차 재판이 진행중이다. 2005년 5월 임실 관촌중학교 재직시절 학생·학부모 180여 명과 함께 순창 회문산에서 열린 ‘남녘통일애국열사 추모제’에 참가한 것이 빌미가 됐다.

김 교사는 “없는 죄를 만들어 잡아넣으려 하니 재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며 “검찰이 시험지, 개인메모, 일기장, 컴퓨터, 이메일 등 1만6000여 쪽에 이르는 증거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교사가 밝힌 재판의 쟁점은 세 가지. 첫째, 반전버튼을 제작해 반미운동을 했다는 것. 둘째, 학생들의 국가보안법 폐지 편지쓰기가 이적행위라는 것. 셋째, 통일산악회에서 우리민족끼리 통일하자는 리본을 게시한 것이 북의 노선과 동일하다는 것. 이 같은 행위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북을 이롭게 하기 위한 목적성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김 교사는 “국가보안법이 악법인 이유는 누구라도 목적성에 걸릴 수 있고 특히 목적 판단의 주체가 공안기관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2006년 12월 조선일보의 악의적 보도를 시작으로 한나라당과 뉴라이트 등 수구세력들의 마녀사냥이 자행됐다”며 “노무현 정권에서 조사했으나 혐의를 찾지 못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 갑작스럽게 구속됐다”고 밝혔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김 교사는 “그간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누리기만 했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개인적 이익만 추구했다”며 “일제의 식민지잔재와 광주 5·18 진상규명 등 역사청산을 하지 못한 업보다.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김창헌 기자 “새만금 삼보일배 때부터 참여하고 싶었다”
전직 교사 김종순씨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김종순(56·전직 교사)씨는 문정현 신부를 ‘큰신부님’, 문규현 신부를 ‘작은신부님’으로 부른다. 성당활동을 하면서 두 분과 사적으로 맺은 인연 때문이다.

“새만금 삼보일배 때부터 참여하고 싶었는데 교직에 몸담고 있어서 그러질 못했어요.”
김씨는 6개월 전 명예퇴직을 한 후 지난 9월6일 군산미군기지 평화순례행사에 용기를 내서 참여했다.

“본래 나는 투쟁이나 저항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군산미군기지 평화순례 행사에 갔다가 참가자들의 용기와 순수한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와 학생들을 보면서 운동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거죠.”

김씨는 인터넷을 통해 두 분이 오체투지 하는 글과 사진을 보고 많이 울었단다.
“우리 사회가 두 분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왜 두 분만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예수와 살아있는 부처를 뒤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입니다. 두 분이 낮은 자세로 길을 걸으면서 우리를 깨우쳐 주신 것 같아요. 그동안 앞만 보고 내딛던 삶에서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작성자정영대 (문화웹진 씨네트워크 기자)  webmaster@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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