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국민을 소외시키지 말아야 한다
[만난사람] 김수행 성공회대학교 교수
본문
출범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정부의 경제정책과 외교행보 모두가 삐걱거리고 있다. 처방전이라고 발표하는 각종 보완책들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 반전의 기미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국민의 시름이 이만큼 뒤틀어지게 된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응급조치가 가능할까.
실용(實用)을 추종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관료들의 잇단 실기(失機)와 실책(失策)은, 미국식 학문체계에 지배당한 한국 경제학계의 위기로도 드러나고 있다. 보다 넓은 시야로 근본적인 진단을 내리고자, 대한민국의 대표적 경제학자이자 마르크스경제학의 최고 권위자인 김수행 석좌교수와 함께 그 대안을 풀어 보기로 한다.
- ‘소외’의 개념을 알기 쉽게 정의 내린다면.
노동자가 노동을 하면 노동의 성과가 자기한테 와야 한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남한테 돌아간다. 이것이 하나의 소외이다. 두 번째로 일을 하긴 하는데, 스스로가 볼 때 영 재미가 없고 하기 싫은 것들뿐이다. 그렇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걸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 이것이 또 하나의 소외이다.
더불어 같은 맥락이지만, 자본가와 노동자는 사실 적(敵)인 관계이다. 적인데도 노동자는 일을 해서 자신의 적을 지속적으로 이롭게 만들어 준다. 적의 힘을 키워 준다는 거다. 그것도 하나의 소외가 된다. 그리고 일을 하며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상대방인 적의 힘만 자꾸 세워 준다는 거,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자신의 저서인 ‘자본론’에서 그런 의미로 소외를 규정했다.
- 그렇다면 노동 자체에서도 제외되는 이들이 사회적 소외계층이라 볼 수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로 간다고 말했다. 새로운 사회로 간다는 건 그 안에 있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그 사회 전체의 계획에 의해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어느 사회든 그 사회 안에는 토지나 공장 같은 물적자원, 지식이나 숙련에 따른 인적자원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생산을 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켜 주고, 더 많은 수확을 위해 새로운 생산수단을 추가하며 생산량을 확대하는 것이다.
운동장을 짓고 학교를 짓고 도로를 짓고 병원을 짓는 등,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들을 건설하고 설립하며, 그 다음에 남는 것들을 그동안 함께 노동했던 사람들이 분배하며 살아간다는 뜻이 되니까, 사실 거기에는 소외라는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생각할 때는 소외된 자, 대표적으로 장애인을 예로 들어야겠다. 실제로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문제가 뭐냐 하면, 장애인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개인적 차원으로만 치부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실업자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정책과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실업을 했다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떻게 평가 내리는가. 실업자 당사자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라 몰아붙이면서, 이 사회가 책임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도적으로 없애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신자유주의, 혹자(或者)는 시장만능주의나 시장지상주의라고도 하는데, 거기에서 강조하는 게 바로 그 대목이다. 개인이 실업을 했다, 개인이 아프다, 개인이 먹고 살기 힘들다 하는 국민적·서민적 고통을 사회의 문제로 인식 안 하고 개인의 문제인 양 일방적으로 돌리며 축소하려 한다는 것이다.
서구의 복지국가라는 개념이 어떻게 발전했는가.
복지국가라는 것은 1945년 이후에 가시적으로 발달하게 됐는데, 그 기본은 ‘실업은 우리 사회의 문제이다.’ ‘그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잘못해서 발생하는 거다.’라는 국가적 정책 과제로 사회구성원들을 판단했던 거다.
- 그렇다면 소외계층과 실업을 줄이기 위해서는 공공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지금도 북구(北歐)에서는 실업 해결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정부 고용을 실시한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드는 거다. 환자들이나 장애인, 부모가 일하러 나간 아이들을 돌보는 것, 환경 보호 등에 필요한 일자리들을 대폭적으로 늘렸다. 그렇게 가는 게 옳은 거다.
다만 그렇게 가는 과정에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결국엔 세금으로 충원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는 세계 곳곳의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하고, 거기에 투입되던 비용을 정부의 사회보장비, 사회복지비로 들어가게끔 정책을 전환했던 거다.
세금을 올릴 생각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도 남북한간의 긴장을 줄이고 평화체제로 해버리면, 60만 군인이 필요 없지 않은가. 방법은 많이 있다. 찾겠다는 노력이 부족할 뿐이다.
- 우리나라 정부는 예산 절약의 영순위로, 언제나 복지 분야를 축소·연기하거나 일방적으로 폐지한다. 복지 분야가 왜 타깃이 되는 건가.
정부가 보다 적극적·계획적으로 경제를 운영한다면 그런 일이 생길 필요가 없다. 복지국가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스웨덴이나 핀란드의 예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자본가 중심의 이윤추구로 정책을 펼치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마가렛 대처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의 등장을 언급할 수 있다.
자본가들이 더 많은 이윤획득을 위해 세금 감면을 요구했다. 그래서 사회보장 등의 공공 부분에 들어가던 비용을 줄이면서 세금을 내려 주는 대신,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 보조나 병원·학교 등의 혜택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20세기 후반의 표본적인 이데올로기가 등장한 거다. 개인이 잘 살고 못 사는 건 완전히 개인 책임이다. 사회 책임이 없다.
- 이런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거다.
복지 분야의 축소가 불가피한 게 아니라, 실제로는 싸움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복지에 쓸 자금이 없다는 핑계를 댄다면, 그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다.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장애인과 어려운 서민들을 국가가 어떻게든 끌어안아야 할 게 아닌가. 더불어 살아야 할 게 아닌가.
핑계만 대지 말고 간단한 방법부터 우선 실천하라. 세금 안 내고 잘 사는 이들의 미납세금을 강력하게 걷어 들이면 된다.
변호사나 의사, 고수입의 자유직업인들 중에 탈세한 자금만 모아도 충분하다. 세금 한푼 내지 않으면서 외국으로 골프여행 나가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 그렇다면 감세정책은 안 된다는 건가.
안 된다.
감세는 절대로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미국의 경우 부시가 정권을 잡으면서 감세정책을 펼쳤다. 그 이전에는 레이건이 감세정책을 했었는데, ‘스타워즈’라는 군비확장정책을 추진하면서 군비를 엄청나게 늘려버렸다. 그러면서도 세금은 적게 걷고 전쟁 준비를 한다 하니, 지출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적자가 엄청나게 발생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그런데 1990년대 중반의 클린턴 정부가 세금을 올려버렸고, 적자규모를 상당부분 없애버렸다. 하지만 그 다음이 뭔가. 부시라는 인물이 등장해서 다시 감세정책을 폈다. 그러면서도 전쟁을 계속 일으켰다. 지금 미국의 재정적자가 어느 정도인가. 적자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물가가 많이 오르는 건 당연하지만, 자기 나라의 달러 값이 폭락한다는 걸 해결 못하고 있다. 그 문제는 굉장히 심각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빚이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규모는 크지 않는데, 우리한테 아직까지 걸림돌로 남아 있는 게 한 가지 있다. 바로 IMF의 후유증이다.
IMF 사태 때 금융기관들이 전멸하듯 망해갔다. 그걸 정부의 돈으로, 즉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의 혈세로 다 해결해 줬다. 우리나라는 늘 이런 식으로 해버린다. 그게 얼마인가. 대략 170조원 정도의 국민의 돈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은행들이 왜 망했는지가 간단하게 드러난다. 쉽게 말해서 은행장이든 임원이든 간에, 은행의 책임자들이 대출을 잘못 하고 운영해서 모두 다 망해버린 게 아닌가. 그걸 정부가 다 갚아 줬다는 게 문제이다. 방만한 대기업과 금융권한테는 수백조를 쏟아 부으면서, 상대적으로 비교조차 안 되는 소액(?)을 필요로 하는 국민들의 대출 요청은 왜 외면하는가.
공적자금 170조원은 정말 엄청나게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것 때문에 국민들, 서민들을 위한 자금이 모자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부가 개개의 국민들 앞에 돈이 없다고 둘러대면 안 된다. 정부가 돈이 없다면, 만들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들을 바라봐야 할 게 아닌가. 시급하지 않은 무기 한두 개만 구입을 연기해도, 정말 많은 서민들의 깊은 시름을 덜어낼 만치의 자금이 생기는 거다.
- 자본가들도 그렇고 정부부처 역시 성장지상주의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이 단계보다 더 높게 성장해야 한다는 건, 오히려 사람들을 피곤하고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맞는 얘기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이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년에 2천만 원을 번다는 의미가 된다.
4인 가족이라면 8천만 원을 번다는 얘기인데, 이렇게 버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있다는 건가. 국가적 총수입의 대부분은 극소수의 자본가들 수중으로 흘러들어간다.
그걸 전체 액수 대비로 나누기 계산을 하다 보니, 일반 가정도 1년에 8천만 원씩이나 번다는 숫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국민들 앞에 얘기할 만한 게 성장밖에 없는가. 돈 버는 게 최고라고, 증권사고 펀드에 투자하고, 노후 보장을 위한 재산증식이 인생의 목적인 양 몰아가지 말라는 거다. 돈 버는 거 말고 국민 개개인의 잠재력, 다른 능력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갖자 하면 안 되는가.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인데, 석유 소비량은 전 세계에서 3,4위를 달리고 있다 한다. 이건 정말 엄청난 문제이다. 이런 걸 하지 않아야 한다. 쓸 것은 다 쓰고 소비하면서도, 더 쓸 수 있기 위해선 더 생산하고 더 수출하며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논리는 도대체 뭔가. 아끼고 절약하면서 개개인이 자기능력을 개발하는 여유를 갖는 게 본질적인 생산이다. 그게 환경파괴를 막는 길이고, 그것이 바로 국민 복지의 초석이 되는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며 성장을 외치는 건 통치철학의 빈곤일 뿐이다.
- 마르크스 시대에는 주로 생산이나 공장 얘기가 많은데, 지금은 금융 얘기를 많이 한다. 공장이 없는 상태에서 투자와 투기를 언급하는 상황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금융은 전부 사기이다. 생산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국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노동자를 고용해서 제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획득하려는 시스템이 제대로 안 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국제경쟁력의 측면으로 본다 해도, 임금은 최고로 올랐는데 기술 수준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보니, 물건을 생산하는 걸로는 운영이 안 되게 된 거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기술은 금융이다. 은행 운영과 투자를 하는 데는 최고로 발달되어 있다. 달러가 세계 화폐이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두 다 달러를 원하기 때문에, 대출과 주식 증권 등을 달러로 사고파는 데는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 물건의 생산 대신 금융 즉, 달러의 유통으로 국가적 수익을 본다는 거다.
주식과 증권을 사고팔고 남의 나라에 대부한다는 건, 그 이자를 현금으로 뺏어오는 게 아닌가. 간단히 말해서 자기는 일을 안 하고, 국가적으로 대출해 준 다음 이자를 받아오는 금리생활자들이 된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금리생활을 하려는 거다. 그걸로 수익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겠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나라나 굴지의 대기업들까지도, 그렇게 하면 떼돈을 벌겠다 싶어서 다 나서게 됐다. 그것은 노름과 똑같다. 우리나라도 펀드니 뭐니 하며 우왕좌왕 들떠 있지만, 사실을 들여다보면 누구는 돈을 잃고 누구는 돈을 따는 단순한 시스템이다. 새로운 무언가가 생산되는 게 전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문제라는 거다. 미국이 전 세계에 있는 개별 재산들을, 그들만의 금융 시스템을 통해 자기 나라로 일제히 흡수해 가고 있다. 한마디로 노름을 해서 다 가져간다는 의미이다.
결국 자신들도 비우량주택금융 때문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 크게 망할지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전체적으로 1929년과 같은 금융대공황이 다시 올 가능성이 굉장히 커졌다. 매우 높다는 거다. 새로운 무언가를 자꾸 생산해내면서 사회 전체와 세계 전체가 더 부유해지고 더 살기 좋게 편안해지는, 그런 게 전혀 아니다. 이건 완전히 노름판의 수준일 뿐이다.
- 사무자동화나 IT의 등장 같은 부분을 제외하고, 마르크스가 활동할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본질적으로 변한 게 있는가.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점점 더 자신의 부를 증대시키는 사회라고 자본주의를 정의 내렸다. 그런데 지금도 자본주의사회가 지속하고 있기에, 근본에서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지금의 문제가 발생한다.
국민총생산과 국민소득이 늘어났으면,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아니냐?
- 이렇게 평가해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 자본가들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다.
끊임없이 더 많은 이익을 보려 노력하고,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려 한다는 거다. 그런 과정 속에서 빈부격차가 더 크게 늘어나고, 새로운 기계와 기술의 개발로 실업자는 계속 증가하며 환경은 파괴된다. 다른 나라와의 경쟁은 더 심해지고, 모든 사람들이 스트레스 쌓이는 식으로 끝없이 지속해 간다. 더 나쁜 사회로 나아간다는 거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볼 수 있는, 이익을 추구하려는 기회와 영역을 대폭 줄여야 한다. 그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육은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 자본가들이 투자해서 이익을 취할 영역이 아니라는 거다.
병원 진료를 의료보험을 통해 공공부문으로 만들어 놓은 게 바로 그것이다. 자본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영역으로 규정짓는다는 거,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바로 그 대목이다. 스웨덴 등의 북구 복지국가들이 발전하는 요인과 원인을, 바로 그런 측면에서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요즘의 최대 이슈인 민영화와 관련된 주제가 안 나올 수 없는데.
민영화,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이다. 어떤 공기업을 민간에게 판다고 하자. 그걸 왜 팔려고 하고, 민간은 그걸 왜 사려고 하는가. 이윤이다.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 민간기업이 수도를 샀다고 치자.
현재까지는 정부가 수도는 안 팔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사실 수도가 독점이지 독점이 아닐 수가 있는가? 일반 시민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수도 파이프를 두세 개씩 선택적으로 연결할 수 있겠는가?
전부 독점이다. 철도도 그렇고 전기도 그렇고, 모든 게 다 독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정부가 독점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영화라는 걸 하고 나면, 민간이 독점으로 이윤을 보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수도 요금은 자꾸 올리고 서비스는 더디게 하고, 투자를 안 하면서도 엄청나게 돈을 벌어들일 게 아닌가.
- 민영화의 폐해에 대한 실제 예가 있는가.
영국이 철도를 민영화했었다. 민간에게 팔았다가 몇 년 가지도 못하고 다시 국유화를 했다. 왜 그랬을까? 철도를 세 가지 영역으로 분리해서 팔았는데, 그 중에 철도 노선과 신호등을 샀던 기업이 있었다. 잘 아시다시피 철도는 침목(枕木) 하나 놓으면 엄청나게 오래가는 장기적인 투자이다. 신호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민간 기업은 이윤을 많이 내서 주주들에게 배당을 하고, 주가를 확 올리고, 주가가 오를 때 주식을 더 발행해서 돈을 끌어 모으는 데만 치중했다. 보수하지 않고 새로 투자하지 않아도 이윤이 계속 생겨나니까, 그 이익의 배분에만 몰두했다는 거다.
그러다가 옥스퍼드 가는 방향의 패링턴역에서 서른 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점검 없이 방치했던 신호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던 거다. 결국 그 기업은 망해버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정부가 다시 인수하게 된 거다.
그런 비극은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자본가라는 사람들이라는 게 실제로는 수준이 엄청나게 낮다. 낮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렇게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기본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거다. ‘자기가 이윤만 보면 끝!’이라는 계산법만 존재한다. 몇몇 재벌들의 행태만 보면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온갖 비리와 탈법은 다 저질러놓고도, 사법부마저 자기 소유물인 양 주물럭거리는 식으로 털어버리는데… 이건 정말 국가적인 불행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기업을 정부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되나.
정부는 현실적으로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투표를 통해 견제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하는 거다.
하지만 독점자본가들은 그런 게 없지 않은가. 국민이 어떡할 것인가. 값 올려버린다고 그걸 안사고 버틸 방법이 없지 않은가. 물 안 먹고 살 수 있는가? 방법 자체가 없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데모를 할 것인가? 데모를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 그렇다면 민영화를 논하기 이전에, 공기업 자체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공기업 운영이 안 되는 이유는 전부 다 낙하산 인사 때문이다. 최고위층의 결정이라며, 철도나 전기나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을 그 자리에 내려앉힌다. 집권자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자기 선거 때 많이 도와 줬다는 인간들을 무조건 이사장 자리에 갖다 앉힌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거대 공기업을 어떻게 운영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낙하산으로 자리를 꿰차고 앉으면, 노동조합이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수순을 밟는가. 솔직히 말해서, 노동자들 중에서도 나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사장이라는 게 자기 눈에도 약점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노동조합 대표진을 불러서 스스로 제의를 한다. 잘해 보자. 당신들이 원하는 걸 주겠다. 그런 식으로 대외적으로 알 길이 없는 타협과 협상이 진행된다. 한마디로 나눠먹기이다. 그것이 바로 ‘복마전’이라는 거다.
거기에서 하나의 해답이 나온다. 공기업을 효율성 있게 운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짜로 운영할 수 있는 경영진, 정말 훌륭하게 관리할 수 있는 전문 경영진을 보내면 간단하고 깨끗하게 해결된다.
그게 정답인 것이다.
왜 공기업 자체의 문제를 뜬금없는 민영화로 풀려 하는가. 민영화로는 아무것도 해결 안 된다. 제대로 된 경영진을 똑바로 임명하라는 거다. 노동자들의 현실적 수입을 훌쩍 뛰어넘는, 1년에 몇 억씩의 연봉을 챙겨가는 낙하산들이 그 자리에 앉아 뭘 하겠는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 주제와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주의는 이론과 현실 모두에서 끝났다고 보시는가.
사회주의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미 붕괴된) 소련이 사회주의의 대표 모델이라고 쉽게 떠올리는데, 그건 전혀 아니라고 판단한다. 원래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라는 게 노동자들이 해방되는 사회라는 거다. 노동자들의 해방이라 함은 자본가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자신들 스스로의 창의력이 생겨나면서 헌신하게 되고, 이런 과정의 결론으로 자신들이 하나의 사회를 운영해가는 그런 사회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소련에서는 공산당이나 관리들이 자본주의사회의 자본가들과 똑같이 해버렸다는 것 말고 내세울 만한 게 없다. 노동자들이 아무것도 못하게 해놓았다는 거다. 노동조합이든 뭐든 간에, 노동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할 것도 없는 사회로 만들었다.
새로운 사회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직접적으로 참여해가면서, 자신의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해 가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함이 기본적인 본질이다. 그런데 그런 형태가 지금 2008년에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이건 각 나라마다 싸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모든 단계적 발전은 싸움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씩의 답이 나오는 법이다. 우리의 경우는 촛불의 등장이 그 명확한 증거가 된다.
- 좋은 말씀 감사드린다. 마무리 차원에서 질문을 드리겠다. 이젠 모든 이들이 아래로부터 자신의 요구를 발언하는 국민적 시스템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런 세상을 바람직하다고 보시는가.
그렇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사실 지금의 정부도 국가를 책임지고 있다면, 국민들이 그렇게 하도록 방향을 제시해 줘야 한다. 국민들의 기(氣)를 살리라는 거다. 그러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솟아나게 만들어야 할 게 아닌가. 국민 전체의 능력과 창의성, 자발성을 도모하게 만드는 건 국가 지도자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억압하지 말고 국민을 위해 다가서야만 훨씬 더 나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소·영’이나 ‘강·부·자’ 이런 식으로 한다는 건, 21세기의 현재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예전 70년대 강압통치시절에는 국민들이 말이나 못하며 지냈겠지만,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국민 앞에서 꼼짝 못하는 게 국가의 지도자이어야 한다. 힘 있는 자한테 굽실거리고 자기보다 약한 이들한테는 군림하려는, 이런 사고방식으로 무얼 하겠는가. 밖에 나가서는 머리를 숙이고, 국민들 앞에서는 똑바로 고개 들며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며 처리하려는 거… 그런 마인드와 시스템은 절대 오래 못 간다. 우리는 이미 지난 역사에서 생생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실용(實用)을 추종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관료들의 잇단 실기(失機)와 실책(失策)은, 미국식 학문체계에 지배당한 한국 경제학계의 위기로도 드러나고 있다. 보다 넓은 시야로 근본적인 진단을 내리고자, 대한민국의 대표적 경제학자이자 마르크스경제학의 최고 권위자인 김수행 석좌교수와 함께 그 대안을 풀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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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대학교 김수행 석좌교수 ⓒ채지민 객원기자 | ||
노동자가 노동을 하면 노동의 성과가 자기한테 와야 한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남한테 돌아간다. 이것이 하나의 소외이다. 두 번째로 일을 하긴 하는데, 스스로가 볼 때 영 재미가 없고 하기 싫은 것들뿐이다. 그렇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걸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 이것이 또 하나의 소외이다.
더불어 같은 맥락이지만, 자본가와 노동자는 사실 적(敵)인 관계이다. 적인데도 노동자는 일을 해서 자신의 적을 지속적으로 이롭게 만들어 준다. 적의 힘을 키워 준다는 거다. 그것도 하나의 소외가 된다. 그리고 일을 하며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상대방인 적의 힘만 자꾸 세워 준다는 거,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자신의 저서인 ‘자본론’에서 그런 의미로 소외를 규정했다.
- 그렇다면 노동 자체에서도 제외되는 이들이 사회적 소외계층이라 볼 수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로 간다고 말했다. 새로운 사회로 간다는 건 그 안에 있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그 사회 전체의 계획에 의해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어느 사회든 그 사회 안에는 토지나 공장 같은 물적자원, 지식이나 숙련에 따른 인적자원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생산을 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켜 주고, 더 많은 수확을 위해 새로운 생산수단을 추가하며 생산량을 확대하는 것이다.
운동장을 짓고 학교를 짓고 도로를 짓고 병원을 짓는 등,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들을 건설하고 설립하며, 그 다음에 남는 것들을 그동안 함께 노동했던 사람들이 분배하며 살아간다는 뜻이 되니까, 사실 거기에는 소외라는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생각할 때는 소외된 자, 대표적으로 장애인을 예로 들어야겠다. 실제로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문제가 뭐냐 하면, 장애인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개인적 차원으로만 치부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실업자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정책과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실업을 했다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떻게 평가 내리는가. 실업자 당사자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라 몰아붙이면서, 이 사회가 책임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도적으로 없애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신자유주의, 혹자(或者)는 시장만능주의나 시장지상주의라고도 하는데, 거기에서 강조하는 게 바로 그 대목이다. 개인이 실업을 했다, 개인이 아프다, 개인이 먹고 살기 힘들다 하는 국민적·서민적 고통을 사회의 문제로 인식 안 하고 개인의 문제인 양 일방적으로 돌리며 축소하려 한다는 것이다.
서구의 복지국가라는 개념이 어떻게 발전했는가.
복지국가라는 것은 1945년 이후에 가시적으로 발달하게 됐는데, 그 기본은 ‘실업은 우리 사회의 문제이다.’ ‘그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잘못해서 발생하는 거다.’라는 국가적 정책 과제로 사회구성원들을 판단했던 거다.
- 그렇다면 소외계층과 실업을 줄이기 위해서는 공공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지금도 북구(北歐)에서는 실업 해결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정부 고용을 실시한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드는 거다. 환자들이나 장애인, 부모가 일하러 나간 아이들을 돌보는 것, 환경 보호 등에 필요한 일자리들을 대폭적으로 늘렸다. 그렇게 가는 게 옳은 거다.
다만 그렇게 가는 과정에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결국엔 세금으로 충원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는 세계 곳곳의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하고, 거기에 투입되던 비용을 정부의 사회보장비, 사회복지비로 들어가게끔 정책을 전환했던 거다.
세금을 올릴 생각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도 남북한간의 긴장을 줄이고 평화체제로 해버리면, 60만 군인이 필요 없지 않은가. 방법은 많이 있다. 찾겠다는 노력이 부족할 뿐이다.
- 우리나라 정부는 예산 절약의 영순위로, 언제나 복지 분야를 축소·연기하거나 일방적으로 폐지한다. 복지 분야가 왜 타깃이 되는 건가.
정부가 보다 적극적·계획적으로 경제를 운영한다면 그런 일이 생길 필요가 없다. 복지국가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스웨덴이나 핀란드의 예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자본가 중심의 이윤추구로 정책을 펼치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마가렛 대처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의 등장을 언급할 수 있다.
자본가들이 더 많은 이윤획득을 위해 세금 감면을 요구했다. 그래서 사회보장 등의 공공 부분에 들어가던 비용을 줄이면서 세금을 내려 주는 대신,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 보조나 병원·학교 등의 혜택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20세기 후반의 표본적인 이데올로기가 등장한 거다. 개인이 잘 살고 못 사는 건 완전히 개인 책임이다. 사회 책임이 없다.
- 이런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거다.
복지 분야의 축소가 불가피한 게 아니라, 실제로는 싸움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복지에 쓸 자금이 없다는 핑계를 댄다면, 그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다.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장애인과 어려운 서민들을 국가가 어떻게든 끌어안아야 할 게 아닌가. 더불어 살아야 할 게 아닌가.
핑계만 대지 말고 간단한 방법부터 우선 실천하라. 세금 안 내고 잘 사는 이들의 미납세금을 강력하게 걷어 들이면 된다.
변호사나 의사, 고수입의 자유직업인들 중에 탈세한 자금만 모아도 충분하다. 세금 한푼 내지 않으면서 외국으로 골프여행 나가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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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 ||
안 된다.
감세는 절대로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미국의 경우 부시가 정권을 잡으면서 감세정책을 펼쳤다. 그 이전에는 레이건이 감세정책을 했었는데, ‘스타워즈’라는 군비확장정책을 추진하면서 군비를 엄청나게 늘려버렸다. 그러면서도 세금은 적게 걷고 전쟁 준비를 한다 하니, 지출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적자가 엄청나게 발생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그런데 1990년대 중반의 클린턴 정부가 세금을 올려버렸고, 적자규모를 상당부분 없애버렸다. 하지만 그 다음이 뭔가. 부시라는 인물이 등장해서 다시 감세정책을 폈다. 그러면서도 전쟁을 계속 일으켰다. 지금 미국의 재정적자가 어느 정도인가. 적자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물가가 많이 오르는 건 당연하지만, 자기 나라의 달러 값이 폭락한다는 걸 해결 못하고 있다. 그 문제는 굉장히 심각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빚이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규모는 크지 않는데, 우리한테 아직까지 걸림돌로 남아 있는 게 한 가지 있다. 바로 IMF의 후유증이다.
IMF 사태 때 금융기관들이 전멸하듯 망해갔다. 그걸 정부의 돈으로, 즉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의 혈세로 다 해결해 줬다. 우리나라는 늘 이런 식으로 해버린다. 그게 얼마인가. 대략 170조원 정도의 국민의 돈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은행들이 왜 망했는지가 간단하게 드러난다. 쉽게 말해서 은행장이든 임원이든 간에, 은행의 책임자들이 대출을 잘못 하고 운영해서 모두 다 망해버린 게 아닌가. 그걸 정부가 다 갚아 줬다는 게 문제이다. 방만한 대기업과 금융권한테는 수백조를 쏟아 부으면서, 상대적으로 비교조차 안 되는 소액(?)을 필요로 하는 국민들의 대출 요청은 왜 외면하는가.
공적자금 170조원은 정말 엄청나게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것 때문에 국민들, 서민들을 위한 자금이 모자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부가 개개의 국민들 앞에 돈이 없다고 둘러대면 안 된다. 정부가 돈이 없다면, 만들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들을 바라봐야 할 게 아닌가. 시급하지 않은 무기 한두 개만 구입을 연기해도, 정말 많은 서민들의 깊은 시름을 덜어낼 만치의 자금이 생기는 거다.
- 자본가들도 그렇고 정부부처 역시 성장지상주의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이 단계보다 더 높게 성장해야 한다는 건, 오히려 사람들을 피곤하고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맞는 얘기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이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년에 2천만 원을 번다는 의미가 된다.
4인 가족이라면 8천만 원을 번다는 얘기인데, 이렇게 버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있다는 건가. 국가적 총수입의 대부분은 극소수의 자본가들 수중으로 흘러들어간다.
그걸 전체 액수 대비로 나누기 계산을 하다 보니, 일반 가정도 1년에 8천만 원씩이나 번다는 숫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국민들 앞에 얘기할 만한 게 성장밖에 없는가. 돈 버는 게 최고라고, 증권사고 펀드에 투자하고, 노후 보장을 위한 재산증식이 인생의 목적인 양 몰아가지 말라는 거다. 돈 버는 거 말고 국민 개개인의 잠재력, 다른 능력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갖자 하면 안 되는가.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인데, 석유 소비량은 전 세계에서 3,4위를 달리고 있다 한다. 이건 정말 엄청난 문제이다. 이런 걸 하지 않아야 한다. 쓸 것은 다 쓰고 소비하면서도, 더 쓸 수 있기 위해선 더 생산하고 더 수출하며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논리는 도대체 뭔가. 아끼고 절약하면서 개개인이 자기능력을 개발하는 여유를 갖는 게 본질적인 생산이다. 그게 환경파괴를 막는 길이고, 그것이 바로 국민 복지의 초석이 되는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며 성장을 외치는 건 통치철학의 빈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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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 ||
금융은 전부 사기이다. 생산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국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노동자를 고용해서 제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획득하려는 시스템이 제대로 안 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국제경쟁력의 측면으로 본다 해도, 임금은 최고로 올랐는데 기술 수준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보니, 물건을 생산하는 걸로는 운영이 안 되게 된 거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기술은 금융이다. 은행 운영과 투자를 하는 데는 최고로 발달되어 있다. 달러가 세계 화폐이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두 다 달러를 원하기 때문에, 대출과 주식 증권 등을 달러로 사고파는 데는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 물건의 생산 대신 금융 즉, 달러의 유통으로 국가적 수익을 본다는 거다.
주식과 증권을 사고팔고 남의 나라에 대부한다는 건, 그 이자를 현금으로 뺏어오는 게 아닌가. 간단히 말해서 자기는 일을 안 하고, 국가적으로 대출해 준 다음 이자를 받아오는 금리생활자들이 된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금리생활을 하려는 거다. 그걸로 수익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겠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나라나 굴지의 대기업들까지도, 그렇게 하면 떼돈을 벌겠다 싶어서 다 나서게 됐다. 그것은 노름과 똑같다. 우리나라도 펀드니 뭐니 하며 우왕좌왕 들떠 있지만, 사실을 들여다보면 누구는 돈을 잃고 누구는 돈을 따는 단순한 시스템이다. 새로운 무언가가 생산되는 게 전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문제라는 거다. 미국이 전 세계에 있는 개별 재산들을, 그들만의 금융 시스템을 통해 자기 나라로 일제히 흡수해 가고 있다. 한마디로 노름을 해서 다 가져간다는 의미이다.
결국 자신들도 비우량주택금융 때문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 크게 망할지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전체적으로 1929년과 같은 금융대공황이 다시 올 가능성이 굉장히 커졌다. 매우 높다는 거다. 새로운 무언가를 자꾸 생산해내면서 사회 전체와 세계 전체가 더 부유해지고 더 살기 좋게 편안해지는, 그런 게 전혀 아니다. 이건 완전히 노름판의 수준일 뿐이다.
- 사무자동화나 IT의 등장 같은 부분을 제외하고, 마르크스가 활동할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본질적으로 변한 게 있는가.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점점 더 자신의 부를 증대시키는 사회라고 자본주의를 정의 내렸다. 그런데 지금도 자본주의사회가 지속하고 있기에, 근본에서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지금의 문제가 발생한다.
국민총생산과 국민소득이 늘어났으면,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아니냐?
- 이렇게 평가해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 자본가들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다.
끊임없이 더 많은 이익을 보려 노력하고,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려 한다는 거다. 그런 과정 속에서 빈부격차가 더 크게 늘어나고, 새로운 기계와 기술의 개발로 실업자는 계속 증가하며 환경은 파괴된다. 다른 나라와의 경쟁은 더 심해지고, 모든 사람들이 스트레스 쌓이는 식으로 끝없이 지속해 간다. 더 나쁜 사회로 나아간다는 거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볼 수 있는, 이익을 추구하려는 기회와 영역을 대폭 줄여야 한다. 그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육은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 자본가들이 투자해서 이익을 취할 영역이 아니라는 거다.
병원 진료를 의료보험을 통해 공공부문으로 만들어 놓은 게 바로 그것이다. 자본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영역으로 규정짓는다는 거,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바로 그 대목이다. 스웨덴 등의 북구 복지국가들이 발전하는 요인과 원인을, 바로 그런 측면에서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요즘의 최대 이슈인 민영화와 관련된 주제가 안 나올 수 없는데.
민영화,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이다. 어떤 공기업을 민간에게 판다고 하자. 그걸 왜 팔려고 하고, 민간은 그걸 왜 사려고 하는가. 이윤이다.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 민간기업이 수도를 샀다고 치자.
현재까지는 정부가 수도는 안 팔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사실 수도가 독점이지 독점이 아닐 수가 있는가? 일반 시민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수도 파이프를 두세 개씩 선택적으로 연결할 수 있겠는가?
전부 독점이다. 철도도 그렇고 전기도 그렇고, 모든 게 다 독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정부가 독점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영화라는 걸 하고 나면, 민간이 독점으로 이윤을 보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수도 요금은 자꾸 올리고 서비스는 더디게 하고, 투자를 안 하면서도 엄청나게 돈을 벌어들일 게 아닌가.
- 민영화의 폐해에 대한 실제 예가 있는가.
영국이 철도를 민영화했었다. 민간에게 팔았다가 몇 년 가지도 못하고 다시 국유화를 했다. 왜 그랬을까? 철도를 세 가지 영역으로 분리해서 팔았는데, 그 중에 철도 노선과 신호등을 샀던 기업이 있었다. 잘 아시다시피 철도는 침목(枕木) 하나 놓으면 엄청나게 오래가는 장기적인 투자이다. 신호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민간 기업은 이윤을 많이 내서 주주들에게 배당을 하고, 주가를 확 올리고, 주가가 오를 때 주식을 더 발행해서 돈을 끌어 모으는 데만 치중했다. 보수하지 않고 새로 투자하지 않아도 이윤이 계속 생겨나니까, 그 이익의 배분에만 몰두했다는 거다.
그러다가 옥스퍼드 가는 방향의 패링턴역에서 서른 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점검 없이 방치했던 신호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던 거다. 결국 그 기업은 망해버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정부가 다시 인수하게 된 거다.
그런 비극은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자본가라는 사람들이라는 게 실제로는 수준이 엄청나게 낮다. 낮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렇게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기본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거다. ‘자기가 이윤만 보면 끝!’이라는 계산법만 존재한다. 몇몇 재벌들의 행태만 보면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온갖 비리와 탈법은 다 저질러놓고도, 사법부마저 자기 소유물인 양 주물럭거리는 식으로 털어버리는데… 이건 정말 국가적인 불행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기업을 정부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되나.
정부는 현실적으로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투표를 통해 견제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하는 거다.
하지만 독점자본가들은 그런 게 없지 않은가. 국민이 어떡할 것인가. 값 올려버린다고 그걸 안사고 버틸 방법이 없지 않은가. 물 안 먹고 살 수 있는가? 방법 자체가 없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데모를 할 것인가? 데모를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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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 ||
공기업 운영이 안 되는 이유는 전부 다 낙하산 인사 때문이다. 최고위층의 결정이라며, 철도나 전기나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을 그 자리에 내려앉힌다. 집권자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자기 선거 때 많이 도와 줬다는 인간들을 무조건 이사장 자리에 갖다 앉힌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거대 공기업을 어떻게 운영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낙하산으로 자리를 꿰차고 앉으면, 노동조합이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수순을 밟는가. 솔직히 말해서, 노동자들 중에서도 나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사장이라는 게 자기 눈에도 약점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노동조합 대표진을 불러서 스스로 제의를 한다. 잘해 보자. 당신들이 원하는 걸 주겠다. 그런 식으로 대외적으로 알 길이 없는 타협과 협상이 진행된다. 한마디로 나눠먹기이다. 그것이 바로 ‘복마전’이라는 거다.
거기에서 하나의 해답이 나온다. 공기업을 효율성 있게 운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짜로 운영할 수 있는 경영진, 정말 훌륭하게 관리할 수 있는 전문 경영진을 보내면 간단하고 깨끗하게 해결된다.
그게 정답인 것이다.
왜 공기업 자체의 문제를 뜬금없는 민영화로 풀려 하는가. 민영화로는 아무것도 해결 안 된다. 제대로 된 경영진을 똑바로 임명하라는 거다. 노동자들의 현실적 수입을 훌쩍 뛰어넘는, 1년에 몇 억씩의 연봉을 챙겨가는 낙하산들이 그 자리에 앉아 뭘 하겠는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 주제와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주의는 이론과 현실 모두에서 끝났다고 보시는가.
사회주의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미 붕괴된) 소련이 사회주의의 대표 모델이라고 쉽게 떠올리는데, 그건 전혀 아니라고 판단한다. 원래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라는 게 노동자들이 해방되는 사회라는 거다. 노동자들의 해방이라 함은 자본가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자신들 스스로의 창의력이 생겨나면서 헌신하게 되고, 이런 과정의 결론으로 자신들이 하나의 사회를 운영해가는 그런 사회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소련에서는 공산당이나 관리들이 자본주의사회의 자본가들과 똑같이 해버렸다는 것 말고 내세울 만한 게 없다. 노동자들이 아무것도 못하게 해놓았다는 거다. 노동조합이든 뭐든 간에, 노동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할 것도 없는 사회로 만들었다.
새로운 사회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직접적으로 참여해가면서, 자신의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해 가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함이 기본적인 본질이다. 그런데 그런 형태가 지금 2008년에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이건 각 나라마다 싸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모든 단계적 발전은 싸움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씩의 답이 나오는 법이다. 우리의 경우는 촛불의 등장이 그 명확한 증거가 된다.
- 좋은 말씀 감사드린다. 마무리 차원에서 질문을 드리겠다. 이젠 모든 이들이 아래로부터 자신의 요구를 발언하는 국민적 시스템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런 세상을 바람직하다고 보시는가.
그렇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사실 지금의 정부도 국가를 책임지고 있다면, 국민들이 그렇게 하도록 방향을 제시해 줘야 한다. 국민들의 기(氣)를 살리라는 거다. 그러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솟아나게 만들어야 할 게 아닌가. 국민 전체의 능력과 창의성, 자발성을 도모하게 만드는 건 국가 지도자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억압하지 말고 국민을 위해 다가서야만 훨씬 더 나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소·영’이나 ‘강·부·자’ 이런 식으로 한다는 건, 21세기의 현재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예전 70년대 강압통치시절에는 국민들이 말이나 못하며 지냈겠지만,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국민 앞에서 꼼짝 못하는 게 국가의 지도자이어야 한다. 힘 있는 자한테 굽실거리고 자기보다 약한 이들한테는 군림하려는, 이런 사고방식으로 무얼 하겠는가. 밖에 나가서는 머리를 숙이고, 국민들 앞에서는 똑바로 고개 들며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며 처리하려는 거… 그런 마인드와 시스템은 절대 오래 못 간다. 우리는 이미 지난 역사에서 생생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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