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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기구, 권리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날 언제 올까

국내 보조기구 지원 실태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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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45) 교수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갑작스런 큰 사고에도 멈추지 않은 학문에 대한 열의,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보조공학기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2006년 여름 미국에서 지질탐사 활동을 하다가, 차량이 뒤집히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네 번째 목뼈를 다쳤다. 이 사고로 이 교수는 지금 네 번째 목뼈 아래쪽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상 전신마비 장애인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밝힌 사고 후 그의 심정은 그리 절망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머리를 안 다친 덕분에 육체가 다친 후 정신이 오히려 해방된 느낌”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사고 직후 미국에서 수술을 받고 한 유명 재활원으로 옮겨져 재활치료를 받게 됐는데, 거기서 난생 처음 희한한 장치들을 접하게 됐다. 모두 장애인의 신체활동을 돕는 보조기구였다. 이 교수는 몇 가지 기구를 테스트해 본 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 강단에 복귀했다.

   
▲ 입으로 작동하는 인테그라 마우스 ⓒ채지민 객원기자
이 교수가 이동수단으로 삼는 전동 휠체어에는 ‘인테그라 마우스’라는 이름의 빨대처럼 생긴 특수장치가 달려 있다. 그는 이것을 입으로 살짝 빨거나 불어 컴퓨터 화면의 커서를 움직인다. 비장애인들이 사용하는 마우스와 똑같은 기능이다.

손을 쓸 수 없지만 글을 쓸 수는 있다. ‘윈도 비스타’ 안에 내장된 음성인식 기능 덕분이다. 이 교수가 말을 하면 컴퓨터가 척척 타이핑을 해준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윈도 비스타가 영어만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교수는 또한 ‘이지콜’이라는 음성인식 자동전화연결 프로그램을 통해, 전화도 자유자재로 걸고 받는다. 이 정도면 강단에서 수업을 하고 연구실에서 업무를 보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이렇듯 장애의 특성에 잘 맞는 보조공학기구만 잘 갖춘다면, 장애인은 일상에서 더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펼쳐나가며 삶의 질을 확실히 한층 더 높일 수 있다.
하지만 보조공학이 장애인의 가능성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대체전략으로 미국·유럽 등에서는 장애인 고용에 기여하는 효과가 크다고 평가되고 있으나, 아직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인식과 정보가 부족한 실정이다.

아직은 생소한 보조공학, 무엇인가

보조공학(assistive technology)의 사전적인 정의는 장애인이 처해 있는 환경을 변화시켜,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높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나와 있다. 보조공학은 집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장난감 같은 것에서부터 컴퓨터와 같은 하이테크를 이용한 장치들에 이르기까지 장애인의 기능적 능력을 유지, 향상시켜 이들의 학습과 사회생활에 도움을 주는 모든 장비 및 기계장치, 더 광범위하게는 서비스와 전략까지를 포함한다.

이와 같은 보조공학기구들은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도움을 주는 보조적 수단으로써, 장애인은 보조공학기구의 도움을 통해 기능적 능력을 향상시키고 교육적 기회를 넓혀나갈 수 있다.

한신대 재활학과 오길승 교수는 “재활공학은 장애인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장애인의 기능적 한계를 극복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치료나 교육·훈련에만 지나치게 집중하기보다는, 장애인의 주변환경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개선할 것이냐는 자립생활패러다임에 기초한다.”며 “장애인의 ADL(일상생활동작)을 향상시키기 위한 치료나 교육·훈련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릴 수는 있지만 완전히 문제를 없앨 수는 없는 것으로, 사회나 조건을 바꾸는 것이 오히려 쉬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보조공학에 대한 이해와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이 장애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보조공학은 장애인 개인이 사회에 맞춰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속한 사회를 공학적 방식을 활용하여 사회환경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 기립형 휠체어의 모습. 일반 휠체어 자세뿐만 아니라 침대형과 기립형으로 형태를 바꿀 수가 있다. ⓒ채지민 객원기자
문제는 일상생활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보조기구의 가격이 매우 비싸다는 점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수요 자체가 적어 대량생산에 의한 가격인하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조기구에 대한 장애인의 접근권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지원 마련이 필요한 실정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보조공학이라 하면, 엄청난 예산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냐는 선입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장애인개발원 남세현 연구원은 “자본의 논리가 첨예한 미국의 경우도 장애인 개인의 삶의 질 향상과 국가복지 예산의 효율적 운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보조기구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보조기구 지원을 통해 장애인의 독립성이 증진되고 역량이 강화되면 활동보조필요시간의 감소, 2차적 장애나 질병예방으로 인한 의료 예산 지출 절감, 장애인의 교육 및 고용참여를 통한 소득수준 향상으로 복지급여 지출의 감소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비용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적극 지원하고 있다.”며 선진국의 경우를 전했다.

정부차원의 지원 부족함

그렇다면 한국의 보조기구에 대한 지원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 오도영 연구실장은 보건복지가족부에서 무료로 교부하는 보조기구의 품목은 ▲욕창방지용 매트 ▲음향신호기의 리모컨 ▲음성탁상시계 ▲휴대용 무선신호기 ▲자세보조용구 ▲진동시계 ▲워커 ▲식사보조기구 ▲기립보조기구 등 9가지로 한정되어 있고, 지급액도 한정되어 있어 이용자들의 선택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지적한다.

국내 보조공학 제도 현황은 보조공학 도입 초기인 우리나라의 경우 정책적 차원에서 법·제도의 정비가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보조공학 관련 법률은 「장애인복지법」 「장애인고용촉진및직업재활법」 「정보격차해소에관한법률」 「장애인·노인·임산부를 위한편의증진에관한법률」 「국민건강보험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노인장기요양보험법」 등이 있다.

   
▲ 한손 전용 키보드. 위의 제품은 왼손용 제품이다. ⓒ채지민 객원기자
이와 같이 적지 않은 법률적 기반으로 겉으로 보기엔 선진 복지국가의 보조기구 법·제도와 비교하여 부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며 지극히 한정적인 서비스만 제공할 뿐이어서 이용자들이 실제적인 혜택을 받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보조기구 서비스에 대한 서비스가 5개 부처 9개 영역이나 되지만 보조공학 서비스 전반에 대한 전문기관이 부재하며, 영역별·부문별 전문기관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보조공학 서비스의 핵심부처인 보건복지가족부는 주로 지자체의 행정전달체제를 이용하고 있고, 건강보험의 경우도 공단업무의 일환으로 단순 교부 업무만 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서비스의 공적전달체계 구조가 확립돼 있지 않은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공적 전달체계 위주의 구조는 서비스 대상도 유형화, 영역화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한다.

보장구센터는 국가보훈처에 속해 있으며, 재활공학연구소와 보조공학센터는 노동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 서비스 대상도 군인 또는 퇴역군인, 산재, 장애인, 근로장애인 등 특정 범주에 한정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는다.

공적 전달체계의 불완전한 구조는 이용자의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민간부분의 의존도를 증가시키게 되는데, 민간부문 서비스 기관들의 재원 및 인력의 제약은 전체 서비스 공급의 부족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보조공학 관련 정책 및 서비스의 추진에 있어서 구체적인 이용자 실태조사 및 욕구조사 등이 진행되지 않아, 구조 마련을 위한 토대가 부실하다는 점이다. 서비스의 가장 핵심 요인인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가 제공되기 위해서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조사 및 계획이 선행돼야 한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의 남세현 연구원은 “아무리 훌륭한 보조기구가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혹은 개발되도록 연구비와 개발비를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장애인 개인에게 보조기구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으면 장애인들에게는 그림의 떡만 늘어나는 것이고, 개발된 보조기구는 연구자들의 실적만 한 건 올려준 시제품의 형태로 국가의 예산만 잡아먹은 채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반대로 앞서 미국이나 영국의 예처럼 필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보조기구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생겨나면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개인과 가족, 사회의 효율성이 증가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용자들의 욕구에 입각해서 제작된 보조기구들이 판매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기 때문에 보조기구를 생산·판매하거나 연구·개발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난 17대 국회에서 보조기구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한 ‘장애인·노인 등을 위한 보조기기 관련산업 육성 및 서비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으나, 통과되지 못하고 사장된 상태이다.

보건복지가족부 장애인재활팀 신병숙 사무관에 따르면, 보조기구와 관련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연구 용역을 발주한 상태라고 한다. 또한 “연구용역의 결과는 6월에 나오며, 이에 따라 정책마련을 위해 고심할 것”이라고 전했다. 장애인의 삶에 있어 더 많은 자유를 줄 보조기구, 정부는 앞으로 어떤 지원 정책을 만들어 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작성자김형숙 기자  odyssey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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