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십년, 누가 보상할까
[기자의 눈]시설에서 탈출한 윤인영씨와 함께한 가족상봉기
본문
자신의 삶을 자신 스스로 선택할 기회없이 살아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소망의 집에 대한 비리를 처음 제보한 김숙자 씨의 어머니가 구조요청을 했던 윤인영(가명, 40, 지적장애 1급)씨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온갖 노동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는 김 씨의 어머니 증언대로 윤 씨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시설장 부인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시설장 앞에서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던 윤 씨가 창문을 넘어서 탈출을 했다.
도대체 그이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윤 씨와 함께했던 숨 막혔던 1박2일간의 탈출기를 담은 취재수첩을 공개한다.
▲ 윤씨가 못나가게 막고있는 방장의 모습 ⓒ전진호 기자
“나가고 싶어요. 그런데 무서워서 말할 수 없어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팀과 방송사에서 소망의 집 생활인들의 인권침해에 관한 조사가 시작되자, 윤 씨는 남들 들을세라 속삭이듯 ‘나가고 싶다’는 한마디를 남겼다.
하지만 그이의 말과 달리 시설장 부부나 방장(시설에서 생활인들 감시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이 있을 때의 태도는 ‘무조건 싫어요’였다.
본인의 의사에 따라 더 좋은 시설이나 지역사회로 나갈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고개만 흔드는 그이의 모습이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폭압적이고 억눌린 분위기속에서 십여 년을 생활해온 그이의 환경을 생각해보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면사무소 사회복지담당공무원의 도움을 받아 「사회복지사업법」에 규정돼 있는 자유로운 퇴소를 희망했건만 기대였을 뿐, 경찰이 출동했어도 막무가내로 못가게 막는 시설장 부부를 막지는 못했다.
윤 씨가 생각한 방법은 ‘야반도주’. 하지만 이뤄지지 못했고, 결국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시끄러운 틈을 타 시설장과 방장의 눈을 피해 창문을 타넘는 ‘탈출극’을 벌이고서야 소망의 집에서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빨리 다른데로 가요”
“엊저녁에 올 줄 알고 옷도 나갈 옷들 다 입고 있었어요.”
“주머니에 화장품하고 약하고는 다 챙겨 나왔는데 속옷은 못 챙겨가지고 왔어요.”
자신 소유의 신발조차 없어 공용으로 신는 슬리퍼를 두 손에 든 채 차에 탄 윤 씨에게 시설생활 10년간 소지품이라고는 안경과 간단한 화장품, 그리고 약 봉투가 전부였다.
소망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한 번도 옷을 사본 적 없었다는 그이는 “머리는 자원봉사 온 이들이 잘라주고, 옷은 구호물품 들어오는 것들 중에서 챙겨 입었다.”고 전했다.
시설에서 빠져나와 차로 이동한지 한 시간이 넘었지만 윤 씨는 극도의 불안에 떨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제 안심하라고, 차에 커튼이 쳐져 있기 때문에 밖에서 우리를 볼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빨리 다른 데로 가요.”라며 커튼 고리를 꼭 붙들고 울부짖는 그이의 모습에서 소망의 집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토록 시설에서 나가고 싶어 했던 마음을 몇 번쯤은 부딪혔을지도 모르는 면사무소, 시청사회복지담당공무원들에게 털어놓지 못했을까.
‘시설장과의 친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는 대답을 들을까봐? 이도 저도 아니면 ‘지적장애가 있는 이들의 말이기 때문에 들을 가치가 없다’고 외면당할까봐는 아닐까 궁금해졌다.
▲ ⓒ전진호 기자
마음껏 텔레비전 보는 게 소원
두어 시간쯤 흘렀을까,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윤 씨가 시장기를 호소했다.
그이가 먹고 싶다던 만두를 먹기 위해 찾은 식당에서 소망의 집에서 겪은 참담한 생활상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아침식사 못하셨어요?”
“네. 오늘은 아침 안줬어요.”
“배 많이 고팠겠어요.”
“네. 맨날 조금밖에 안줘서 배고파요.”
“점심때는 항상 라면을 먹었다던데요.”
“사모님(시설장 부인)이 라면 꺼내줘요. 그거 끓여서 먹었어요.”
“그런데 조금 밖에 안줘서 배고팠어요.”
서글픈 마음에 이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물었더니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한대뿐이긴 했으나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왜 그걸 꼽았을까 의아한 마음에 다시 물었더니 “여자 방에 있는 텔레비전은 사모님이 전기료 많이 나온다고 화장실에 치워버렸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십년이라는 세월을 하루같이 새벽 4시면 일어나 예배를 보고, 세탁기도 없이 그 많은 빨래서부터 설거지, 청소 등을 종종거리며 해야 했고, 점심이면 멀쩡한 식당 놔두고 나무를 지펴 유통기한이 지나 벌레가 나오는 라면을 끓여서는, 그것도 배부르게도 못 먹는 생활을 해왔을 그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 밑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올라왔다.
가장 행복했었을 짧은 결혼생활, 그러나...
다음날, 윤 씨가 앞으로 생활하게 될 부산의 그룹홈에 입소하기 전에 그이가 애타게 그리는 어머니와 자녀들을 만나기로 했다.
윤 씨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아 언제, 어떤 이유 때문에 마산 끄트머리에 위치한 소망의 집까지 오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윤 씨의 친정 근처에서 살고 있는 친척들과 이웃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향인 밀양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됐는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윤 씨의 변한모습에 깜짝 놀랐다는 한 마을 주민은 “어렸을 때는 제대로 생활 못했어. 쟈 엄마도 저래서(지적장애) 쟈도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지금 보니께 예전하고는 완전히 다르네. 이젠 사람구실하며 살 수 있갔어.”라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곧잘 집안일을 거들었고, 워낙 심성이 착해 동네 사람들과도 원만하게 잘 지냈다는 것.
윤 씨의 친척들은 “누이(윤 씨 부모) 집이 너무 가난해 계속 같이 생활할 수 없어 일찍 시집을 보내야 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나이 많도록 결혼 못한 사람한테 시집보낼 수밖에 없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털어놨다.
친척들과 이웃주민들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윤씨가 19~20세 되던 해 결혼하게 됐고, 밀양을 떠나 부산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3남매를 키우며 생활했던 7~8년의 시간이 그이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 아니었을까, 그래서 고향땅이 아닌 부산으로 가고 싶다고 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봤다.
하지만 행복했던 순간들도 잠시, 윤 씨의 버팀목이 돼줬던 남편이 지난 1997년 지병으로 사망하자 가족해체의 슬픔을 겪게 됐다.
3남매는 고아원에 맡겨졌고, 윤 씨는 소망의 집에 입소하게 된 것. 더 가슴 아픈 건 이들이 생이별을 할 때쯤 윤 씨의 어머니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누가 소망의 집에 보냈어요?”
“태동교회 목사님이요.”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아니요.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마산에서 있다가 부산으로 온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저보고 그리로 가라고 했어요.”
“가고 싶으셨어요?”
“아니요. 가기 싫었어요.”
“안가고 싶다고 이야기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불교신자였다는 윤 씨 부부가 어떻게 목사의 소개로 소망의 집에 가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들 부부가 생활했던 지역의 한 목사에 의해 온 가족이 뿔뿔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하나 관심 갖지 않은 듯 보였다.
온전히 가족에게만 책임지우는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 구조상 의지할만한 사람이 없고, 돈 없는 지적장애인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시설 말고는 갈데없는 현실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사랑한데이, 보고싶었데이”
지적장애가 있는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인영씨 어머니(76) 와의 만남을 통해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지적장애인으로 알고 있는 그이의 어머니가 어떤 이유에선지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하고 있었다.
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의 하룻밤을 꿈꿨던 윤 씨의 소망이 물거품이 돼 버린 것.
직계가족이건만 면회조차 쉽지 않았다.
담당의는「정신보건법」상 ‘보호의무자의 동의’절차가 없으면 면회조차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해줬지만, 정신장애인이 아닌 윤 씨의 어머니가 어떤 이유에서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는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꺼리고 꺼리다가 면담을 허락했는지에 대해서는 시원스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여러 차례 문의한 끝에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은 “치매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에 의해서 맡겨졌으며, 장애는 ‘정신지체’가 약간 경증인 정도.”라는 게 고작이었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지만 어렵사리 마련한 모녀상봉의 자리를 깰 수 없어 다음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엄마 나 알겠어.”
“모른다.”
“엄마 딸 나 모르겠어?”
십년만의 모녀상봉은 이렇게 이뤄졌다.
윤 씨는 자신조차 못 알아보는 어머니를 꼭 끌어안은 채 남편이 해줬다는 반지를 품속 깊숙한 곳에서 꺼내 어머니에게 끼워주고는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십여 분이 흘렀을까, 이들은 예전의 살갑던 모녀지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왜 그동안 나 안찾았노.”
“...”
“아버지 돌아가셨다메?”
“어. 죽었다.”
“왜 나한테 연락 안했나.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나.”
“뭐 먹고 싶은 거 없나.”
“밀감 먹고 싶다.”
“이제 나랑 같이 살자.”
“싫다, 내는 집 팔아버리고 여기서 살 끼다.”
“왜 여기서 사나. 집 못 판다. 나랑 같이 집에 가서 살자.”
“사랑한데이. 보고싶었데이.”
그렇게 짧은 면회시간이 끝났다.
더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이제 자주 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반나절도 안 되는 거리를 찾는데 걸린 시간은 ‘십년’
그렇게 자녀들을 보러 가는 길, 윤 씨는 조심스레 “이제는 외출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제 자주 엄마 보러 올 수 있어서.”란다.
“그동안은 외출할 수 없었냐”는 질문에 윤씨는 “마을 사람들이 우리 돌아다니는 거 싫어하기 때문에, 동네에서 욕한다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지만 나가서 딱히 갈 곳이 있지 않기 때문에, 시설장 부부의 폭압이 무서워서, 수중에 돈 한 푼 없기 때문에 문밖출입조차 금지당한 채 하루하루를 마당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보내온 것이다.
다시 그리운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 고아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피끼리는 당기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가보다.
일행들이 먼저 고아원에 들어가 인영 씨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랄 자녀들에게 미리 상황설명을 하려 했건만 5살 때 헤어진 막내딸이 먼발치에 서있는 인영 씨를 알아보고 다가온 것이다.
이들의 상봉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한껏 들뜬 엄마의 표정과 달리 막내(15)와 둘째(16)는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고 있는 채 말문을 닫고 있었다.
게다가 흔쾌히 어머니와의 만남을 허락한 두 동생들과 달리 취업준비에 한창인 큰딸(18)은 그이와의 만남을 거절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처음 만남에는 머뭇거렸던 큰 딸이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 방이라도 구한다면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단다.
윤 씨가 수용됐던 소망의 집에서 고향집까지 가는 길은 불과 두어 시간, 여기서 어머니가 있는 정신병원까지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있었으며 자녀들이 생활하고 있는 고아원까지의 거리도 몇 시간 안 걸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산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상봉하는 데 걸린 시간은 반나절도 안 걸렸지만, 이 만남을 위해 윤 씨는 악몽 같은 곳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사이 노모는 딸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고, 부모의 손길이 필요했었을 자식들은 자기 혼자서 세상을 개척해야 할 나이가 돼버렸다.
생때같은 자식과 떨어져 지새웠을 슬픔의 시간들, 유일하게 투정부릴 수 있는 대상인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보낸 시간들은 과연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현재 윤 씨는 그이의 의지대로 부산으로 왔다.
얼마 전에는 소망의 집 입소 직전에 당한 교통사고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후유증 치료 때문에 눈 수술도 받고 그룹홈에 입소해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항상 조금 밖에 못 먹어 배고팠다.”던 그이가 소망하던 대로 자유롭게 외출해서는 맛있는 것도 사먹을 수 있고, 마음껏 텔레비전도 볼 수 있는 곳에서 잃어버렸던 가족들과 함께 새 출발을 준비 중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적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벽들이 그려져서일까.
그이의 앞날에 힘껏 박수치고 싶은 마음 한 구석에는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 한 느낌, 지울 수 없었다.
소망의 집에 대한 비리를 처음 제보한 김숙자 씨의 어머니가 구조요청을 했던 윤인영(가명, 40, 지적장애 1급)씨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온갖 노동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는 김 씨의 어머니 증언대로 윤 씨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시설장 부인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시설장 앞에서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던 윤 씨가 창문을 넘어서 탈출을 했다.
도대체 그이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윤 씨와 함께했던 숨 막혔던 1박2일간의 탈출기를 담은 취재수첩을 공개한다.
▲ 윤씨가 못나가게 막고있는 방장의 모습 ⓒ전진호 기자
“나가고 싶어요. 그런데 무서워서 말할 수 없어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팀과 방송사에서 소망의 집 생활인들의 인권침해에 관한 조사가 시작되자, 윤 씨는 남들 들을세라 속삭이듯 ‘나가고 싶다’는 한마디를 남겼다.
하지만 그이의 말과 달리 시설장 부부나 방장(시설에서 생활인들 감시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이 있을 때의 태도는 ‘무조건 싫어요’였다.
본인의 의사에 따라 더 좋은 시설이나 지역사회로 나갈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고개만 흔드는 그이의 모습이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폭압적이고 억눌린 분위기속에서 십여 년을 생활해온 그이의 환경을 생각해보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면사무소 사회복지담당공무원의 도움을 받아 「사회복지사업법」에 규정돼 있는 자유로운 퇴소를 희망했건만 기대였을 뿐, 경찰이 출동했어도 막무가내로 못가게 막는 시설장 부부를 막지는 못했다.
윤 씨가 생각한 방법은 ‘야반도주’. 하지만 이뤄지지 못했고, 결국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시끄러운 틈을 타 시설장과 방장의 눈을 피해 창문을 타넘는 ‘탈출극’을 벌이고서야 소망의 집에서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빨리 다른데로 가요”
“엊저녁에 올 줄 알고 옷도 나갈 옷들 다 입고 있었어요.”
“주머니에 화장품하고 약하고는 다 챙겨 나왔는데 속옷은 못 챙겨가지고 왔어요.”
자신 소유의 신발조차 없어 공용으로 신는 슬리퍼를 두 손에 든 채 차에 탄 윤 씨에게 시설생활 10년간 소지품이라고는 안경과 간단한 화장품, 그리고 약 봉투가 전부였다.
소망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한 번도 옷을 사본 적 없었다는 그이는 “머리는 자원봉사 온 이들이 잘라주고, 옷은 구호물품 들어오는 것들 중에서 챙겨 입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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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진호 기자 | ||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제 안심하라고, 차에 커튼이 쳐져 있기 때문에 밖에서 우리를 볼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빨리 다른 데로 가요.”라며 커튼 고리를 꼭 붙들고 울부짖는 그이의 모습에서 소망의 집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토록 시설에서 나가고 싶어 했던 마음을 몇 번쯤은 부딪혔을지도 모르는 면사무소, 시청사회복지담당공무원들에게 털어놓지 못했을까.
‘시설장과의 친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는 대답을 들을까봐? 이도 저도 아니면 ‘지적장애가 있는 이들의 말이기 때문에 들을 가치가 없다’고 외면당할까봐는 아닐까 궁금해졌다.
▲ ⓒ전진호 기자
마음껏 텔레비전 보는 게 소원 두어 시간쯤 흘렀을까,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윤 씨가 시장기를 호소했다.
그이가 먹고 싶다던 만두를 먹기 위해 찾은 식당에서 소망의 집에서 겪은 참담한 생활상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아침식사 못하셨어요?”
“네. 오늘은 아침 안줬어요.”
“배 많이 고팠겠어요.”
“네. 맨날 조금밖에 안줘서 배고파요.”
“점심때는 항상 라면을 먹었다던데요.”
“사모님(시설장 부인)이 라면 꺼내줘요. 그거 끓여서 먹었어요.”
“그런데 조금 밖에 안줘서 배고팠어요.”
서글픈 마음에 이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물었더니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한대뿐이긴 했으나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왜 그걸 꼽았을까 의아한 마음에 다시 물었더니 “여자 방에 있는 텔레비전은 사모님이 전기료 많이 나온다고 화장실에 치워버렸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십년이라는 세월을 하루같이 새벽 4시면 일어나 예배를 보고, 세탁기도 없이 그 많은 빨래서부터 설거지, 청소 등을 종종거리며 해야 했고, 점심이면 멀쩡한 식당 놔두고 나무를 지펴 유통기한이 지나 벌레가 나오는 라면을 끓여서는, 그것도 배부르게도 못 먹는 생활을 해왔을 그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 밑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올라왔다.
가장 행복했었을 짧은 결혼생활, 그러나...
다음날, 윤 씨가 앞으로 생활하게 될 부산의 그룹홈에 입소하기 전에 그이가 애타게 그리는 어머니와 자녀들을 만나기로 했다.
윤 씨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아 언제, 어떤 이유 때문에 마산 끄트머리에 위치한 소망의 집까지 오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윤 씨의 친정 근처에서 살고 있는 친척들과 이웃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향인 밀양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됐는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윤 씨의 변한모습에 깜짝 놀랐다는 한 마을 주민은 “어렸을 때는 제대로 생활 못했어. 쟈 엄마도 저래서(지적장애) 쟈도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지금 보니께 예전하고는 완전히 다르네. 이젠 사람구실하며 살 수 있갔어.”라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곧잘 집안일을 거들었고, 워낙 심성이 착해 동네 사람들과도 원만하게 잘 지냈다는 것.
윤 씨의 친척들은 “누이(윤 씨 부모) 집이 너무 가난해 계속 같이 생활할 수 없어 일찍 시집을 보내야 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나이 많도록 결혼 못한 사람한테 시집보낼 수밖에 없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털어놨다.
친척들과 이웃주민들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윤씨가 19~20세 되던 해 결혼하게 됐고, 밀양을 떠나 부산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3남매를 키우며 생활했던 7~8년의 시간이 그이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 아니었을까, 그래서 고향땅이 아닌 부산으로 가고 싶다고 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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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겨있는 친정집 대문을 바라보고 있는 윤 씨의 모습 ⓒ전진호 기자 | ||
3남매는 고아원에 맡겨졌고, 윤 씨는 소망의 집에 입소하게 된 것. 더 가슴 아픈 건 이들이 생이별을 할 때쯤 윤 씨의 어머니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누가 소망의 집에 보냈어요?”
“태동교회 목사님이요.”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아니요.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마산에서 있다가 부산으로 온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저보고 그리로 가라고 했어요.”
“가고 싶으셨어요?”
“아니요. 가기 싫었어요.”
“안가고 싶다고 이야기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불교신자였다는 윤 씨 부부가 어떻게 목사의 소개로 소망의 집에 가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들 부부가 생활했던 지역의 한 목사에 의해 온 가족이 뿔뿔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하나 관심 갖지 않은 듯 보였다.
온전히 가족에게만 책임지우는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 구조상 의지할만한 사람이 없고, 돈 없는 지적장애인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시설 말고는 갈데없는 현실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사랑한데이, 보고싶었데이”
지적장애가 있는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인영씨 어머니(76) 와의 만남을 통해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지적장애인으로 알고 있는 그이의 어머니가 어떤 이유에선지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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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원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있는 윤씨 ⓒ전진호 기자 | ||
직계가족이건만 면회조차 쉽지 않았다.
담당의는「정신보건법」상 ‘보호의무자의 동의’절차가 없으면 면회조차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해줬지만, 정신장애인이 아닌 윤 씨의 어머니가 어떤 이유에서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는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꺼리고 꺼리다가 면담을 허락했는지에 대해서는 시원스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여러 차례 문의한 끝에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은 “치매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에 의해서 맡겨졌으며, 장애는 ‘정신지체’가 약간 경증인 정도.”라는 게 고작이었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지만 어렵사리 마련한 모녀상봉의 자리를 깰 수 없어 다음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엄마 나 알겠어.”
“모른다.”
“엄마 딸 나 모르겠어?”
십년만의 모녀상봉은 이렇게 이뤄졌다.
윤 씨는 자신조차 못 알아보는 어머니를 꼭 끌어안은 채 남편이 해줬다는 반지를 품속 깊숙한 곳에서 꺼내 어머니에게 끼워주고는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십여 분이 흘렀을까, 이들은 예전의 살갑던 모녀지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왜 그동안 나 안찾았노.”
“...”
“아버지 돌아가셨다메?”
“어. 죽었다.”
“왜 나한테 연락 안했나.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나.”
“뭐 먹고 싶은 거 없나.”
“밀감 먹고 싶다.”
“이제 나랑 같이 살자.”
“싫다, 내는 집 팔아버리고 여기서 살 끼다.”
“왜 여기서 사나. 집 못 판다. 나랑 같이 집에 가서 살자.”
“사랑한데이. 보고싶었데이.”
그렇게 짧은 면회시간이 끝났다.
더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이제 자주 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반나절도 안 되는 거리를 찾는데 걸린 시간은 ‘십년’
그렇게 자녀들을 보러 가는 길, 윤 씨는 조심스레 “이제는 외출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제 자주 엄마 보러 올 수 있어서.”란다.
“그동안은 외출할 수 없었냐”는 질문에 윤씨는 “마을 사람들이 우리 돌아다니는 거 싫어하기 때문에, 동네에서 욕한다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지만 나가서 딱히 갈 곳이 있지 않기 때문에, 시설장 부부의 폭압이 무서워서, 수중에 돈 한 푼 없기 때문에 문밖출입조차 금지당한 채 하루하루를 마당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보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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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아원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있는 윤씨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전진호 기자 | ||
‘피끼리는 당기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가보다.
일행들이 먼저 고아원에 들어가 인영 씨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랄 자녀들에게 미리 상황설명을 하려 했건만 5살 때 헤어진 막내딸이 먼발치에 서있는 인영 씨를 알아보고 다가온 것이다.
이들의 상봉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한껏 들뜬 엄마의 표정과 달리 막내(15)와 둘째(16)는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고 있는 채 말문을 닫고 있었다.
게다가 흔쾌히 어머니와의 만남을 허락한 두 동생들과 달리 취업준비에 한창인 큰딸(18)은 그이와의 만남을 거절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처음 만남에는 머뭇거렸던 큰 딸이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 방이라도 구한다면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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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년만의 가족 상봉이었으나 서먹서먹함은 어쩔 수 없었다 ⓒ전진호 기자 | ||
산산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상봉하는 데 걸린 시간은 반나절도 안 걸렸지만, 이 만남을 위해 윤 씨는 악몽 같은 곳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사이 노모는 딸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고, 부모의 손길이 필요했었을 자식들은 자기 혼자서 세상을 개척해야 할 나이가 돼버렸다.
생때같은 자식과 떨어져 지새웠을 슬픔의 시간들, 유일하게 투정부릴 수 있는 대상인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보낸 시간들은 과연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현재 윤 씨는 그이의 의지대로 부산으로 왔다.
얼마 전에는 소망의 집 입소 직전에 당한 교통사고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후유증 치료 때문에 눈 수술도 받고 그룹홈에 입소해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항상 조금 밖에 못 먹어 배고팠다.”던 그이가 소망하던 대로 자유롭게 외출해서는 맛있는 것도 사먹을 수 있고, 마음껏 텔레비전도 볼 수 있는 곳에서 잃어버렸던 가족들과 함께 새 출발을 준비 중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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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진호 기자 | ||
그이의 앞날에 힘껏 박수치고 싶은 마음 한 구석에는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 한 느낌, 지울 수 없었다.
작성자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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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어린왕자옆집님의 댓글
어린왕자옆집 작성일
역시나 마음이 먹먹해 지는군요...ㅠㅠ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진심으로 행복하시고 빨리 건강도 회복하셔서
가족들과 행복하고 편안하게 사시면 좋겠어요 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