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험난한 탈시설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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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걸음 자료사진> | ||
‘그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
1989년 북한과 교류가 시작될 무렵,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인사가 낸 책 이름이다. 이 책은 당시 초등학교 학생들이 북한 사람들을 머리에 뿔 난 도깨비로 그려내게 된 배경, 즉 한국사회의 분단을 역이용한 독재 개발 시대의 반공방첩 교육의 폐해를 단 한 문장으로 뒤집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 상황은 당시 우리 사회의 말초적 국민 감성을 자극했고, 북한과의 교류를 더욱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장애인, 노인 등의 수용시설 예컨대 생활시설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아니, 시설에 ‘사람’이 사는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까.
‘시설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 아무런 파장을 일으키지 못한다. 시설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어느 누구에게도 주목받을 조건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도 없고, 가족도 모른 체 한다. 정부와 사회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안보니,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시설장에게 시설생활인은 정부예산을 따내고 후원금을 받아내는 ‘수단’이다. 무엇보다도 산골외지에 쳐 박혀 사는 시설 생활인 스스로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밥 주고 잠재워주니, 시설장이 고맙다. 때리고, 굶기고, 냉방에 재우고, 골방에 가두고, 성폭력이 일어나도, 잠시 참으면 된다. 심지어 죽임에 이르러도 아무도 모른다.
여러 이유를 들이대며 시설에 가면, 언제나 불안하면서도 체념한 ‘사람’의 눈빛부터 만난다. 미래의 ‘희망’은 고사하고 현재의 삶조차 가까스로 견뎌내는 ‘사람’과 대면할 때, 목울대로 쳐 올라오는 분노보다는 검은 슬픔을 가라앉히느라 수고한다. 시설에 다녀오면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한다.
시설생활인 의지를 기반으로, 지역사회에서 살 곳을 알아보고, 법률을 들이대며 시설장과 한판 말싸움을 벌이지만, 녹록지 않다. ‘돈’이 되는 시설생활인을 붙잡아두고 싶은 시설장이 방해공작을 펴기 때문이다. 최근 퇴소하기 전날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가, 국가인권위원회의 긴급구제조치로 나온 지적장애인의 얘기는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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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걸음 자료사진> | ||
기억 저 편의 시설 생활인 인권
자유민주주의체제인 한국정부의 사유재산과 시장 보호정책에 따라 장애인, 고아, 노인 등 소위 소외계층을 싼 비용이라는 미명 아래 대규모 분리·수용 보호정책을 고스란히 받아 사회복지시설이 운영돼왔다. 따라서 사회복지생활시설은 우리사회의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분리·수용의 기제로써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운영에 따른 각종 비리, 생활인인권유린, 종사자에 대한 착취구조 등의 문제를 발생시켜왔다.
그럼에도 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다. 끊임없이 시설에 사는 ‘사람’에 접근하고, 문제를 공유하며, 해결방법을 찾아내어, 실천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소수의 인권활동가와 장애인 전문 언론 기자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사회는 냉정했다.
1990년에 드러난 양지마을, 소쩍새, 수심원의 생활인 인권 침해 문제는 사회적으로 대대적인 파장을 일으켰지만, 딱 그 때뿐이었다. 사람답게 사는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인권활동가들이 현재까지 그 곳 시설생활인과 만나지만, 그 뿐이다.
일간지 등이 대서특필하였기에 양지마을, 소쩍새 등의 시설 이름만이 아스라이 남아있다. 그나마 89년 함께걸음을 비롯하여 장애인 언론에 소개된 비리 시설, 즉 한국자립원, 무장애육원, 대전종합복지원, 신망애, 신아원 등의 생활인과 시설은 기억 저편에도 없다.
소수의 인권활동가와 장애인 전문 언론 기자들이 무진 애를 썼지만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주 나쁜(?) 소수의 시설장 때문에, 대다수의 착한(?) 시설장들이 욕을 먹는다는 등, 시설 운동에 대한 호도된 평가까지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묵묵히 소수의 인권활동가와 장애인 언론 기자들은 시설 생활인 인권 문제를 알리는 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이후 시설 투쟁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설 투쟁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시설 민주화 투쟁. 1990년대 말부터 2008년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시설 족벌 운영 및 횡령 등 비민주적 운영으로 야기되는 시설생활인 인권 문제에 관한 문제제기와 아울러 이를 해결하는 운동이다. 강력한 조직 결성을 통한 다수의 핵심 조직력으로 시설 투쟁이 일어났다. 끊임없이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투쟁했다.
그런가 하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시설 생활인들과의 접촉 빈도수가 늘어나는 운동이 시작됐다. 굳이 횡령과 족벌운영체계가 아니어도 시설 그 자체가 인권의 사각지대임을 발견하고, 탈시설을 외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즉 시설 생활인 인권 확보운동이 그것.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08년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시설 민주화’에 집중한 시설 투쟁
에바다 비리 복지 재단을 향한 대 투쟁은 시설 민주화 투쟁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시설의 비민주성, 횡령, 족벌운영, 생활인 인권 유린 등 시설에서 나타날 만한 문제를 모두 가진 에바다 재단 문제가 시설생활인과 노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투쟁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공론화됐다. 에바다 투쟁은 만 7년간의 고되고 지난한 투쟁으로 결국 비리 재단을 내몰고, 차츰 안정적인 운영과 더불어 시설생활인의 지역 사회 거점 개발을 향한 몸부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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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걸음 자료사진> | ||
특히 뒤이어 일어난 대구 청암재단, 성람재단 등의 투쟁이 1~2년 내로 해결되는데 주요 기제로 작동한 투쟁으로 평가된다. 에바다 투쟁에서 성람재단까지 장애인 당사자와 노동조합, 그리고 인권활동가들이 결합한 조직의 ‘힘’이 투쟁을 지속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공공성에 기반한 시설 민주화 확보라는 주요 의제를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시설생활인들의 인권 문제가 ‘꿈틀꿈틀’ 대두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시설생활인 ‘인권’에 집중한 시설 투쟁
그런가 하면 시설생활인의 ‘인권’ 문제를 기반으로 한 시설 투쟁이 이어졌다. 이 운동에 참여한 인권활동가들(조건부신고복지시설 생활인 인권확보를 위한 공대위. 이하 공대위)은 초기에 비인가 시설생활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2003년 ‘성실정양원’과 ‘은혜사랑의 집’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한번 입소하면 부모 또는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밖으로 결코 나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쇠창살로 이어진 대규모 시설, 그리고 콘크리트 맨바닥의 감금 방, 문 없는 화장실, 구타, 성폭력 등이 난무하는 시설은 생활인의 인권을 무참히도 짓밟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단죄를 받아 마땅했다.
이런 시설들이 복지부 정책에 따라 조건부신고시설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그 사회적 파급력은 더욱 컸다. 원장이 구속되고, 보건복지부가 시설 해체를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문제가 됐던 시설은 이름만 바꾸고, 감옥에서 나온 그 원장이 다시 운영하고 있다.
후원금과 생활인 노동력을 착취하여 땅을 사고, 부자가 됐으며, 자녀들을 유학 보내고, 가족과 친척들은 이사장, 원장, 관장, 총무부장, 사무국장 등 시설 운영의 실질적 권한을 가졌다. 보건복지부는 실질심사를 하지 않고, 신고시설로 전환케 하여 오히려 국고를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공대위 인권활동가들은 법인 시설생활인들의 인권 문제가 있는가에 집중하며, 사회복지시설 생활인 인권확보 연대회의라는 조직의 이름으로 법인 시설생활인과 접촉을 시도했다. 횡령 또는 족벌체계가 아니어도 시설 생활 그 자체가 인권의 사각지대임을 단 숨에 확인했다. 탈시설을 향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사회복지사업법」 개정과 탈시설
시설 민주화 투쟁과 시설생활인 인권운동은 시설정책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하는 전기로 작동되고 있다. 개별시설의 문제해결을 목표로 한 단기적 대응 수준의 대 시설 투쟁이 사회복지 생활시설을 둘러싼 사회 구조의 모순과 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공공성에 기반한 시설 내 민주화, 그리고 시설생활인 인권의 관점에서 탈시설을 향한 주요 정책의 변화가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성람재단과 석암재단 투쟁이 있다.
횡령과 족벌운영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성람재단 내 5개 대형시설에 대해 성람재단 노동조합(민주노총 금속노조 경기북부지부)이 2004년부터 천막농성 등을 하며 성람재단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종로구청 노숙농성 143일간의 2006년 본격적인 투쟁으로 성람재단이 3개의 시설을 서울시에 기부 채납하면서 승리투쟁이 되는가 싶더니, 2008년 3월 현재까지도 성사되지 않고 있다.
성람투쟁은 한 개 시설 민주화에 그치지 않고 ‘공익이사제’ 도입을 주요 골자로 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투쟁이 시작됐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 법률은 국회에 발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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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일 년여의 투쟁으로 석암재단은 전 이사장을 교체하고, 이사진 구성에 관해 공대위와 협상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생활인 비대위가 중심에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탈시설이 주요 이슈다. 시설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장애인들은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외치고 있다.
시설 투쟁에 참여하는 생활인들이 시설 그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며 탈시설을 향한 강한 열망을 피어내고 있다. 탈시설은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지역 사회 기반 마련이 전제 조건이다. 그동안의 시설 투쟁이 ‘탈시설’ 투쟁으로 이어질 지 주목된다. 활동보조 투쟁에 이은 주거문제, 장애인 연금 등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은 의제다. 멀고도 먼 험난한 길이 예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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