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깊은 우물,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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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함께걸음>을 생각할 때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고리인 ‘인연’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어느새 20년 전의 까마득한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당시 집과 회사를 오가며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에 지쳐있던 나에게 퇴근길에 꾸벅꾸벅 졸다 차창 밖으로 얼핏 스쳐 지나간 ‘장애인…’는 처음에는 묘한 거부감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1988년 여름 끝 무렵인 어느 날 오후 퇴근길에 연희동에 있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문을 두드린 것이 오늘 <함께걸음>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다 만들어진 잡지의 발송을 위해 봉투에 풀을 붙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연구소 초짜는 슬슬 기사도 쓰고 편집을 하는 전문인(?)으로 바뀌었고, 급기야는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아예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편집장이라는 거창한 직함까지 얻게 되었다.
연구소를 알기 전까지 나 역시 장애를 지극히 개인적인 불행으로만 여기고, 열등한 신체적 조건을 비관하면서 삶을 경멸해왔던 전형적인 장애를 가진 30대 소시민이였다.
하지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함께걸음>을 통해 평평하다고 믿었던 지구가 사실은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충격과 내적 혁명을 경험하게 되었다.
취재를 위해 만났던 많은 장애인들은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삶의 밑바닥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거나 아예 삶을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고 있었으며, 이들의 처절한 그리고 무기력한 삶을 <함께걸음>을 통해 전하면서 사실은 나 스스로가 변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걸음>을 통해 만난 수많은 우리 이웃들은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며 내 삶의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토양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두 사람과의 인연을 꼽자면 막걸리(우리는 동동주라고 불렀다.)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박용수 선생님과 시원한 우물물처럼 삶의 갈증을 달래준 양원태를 잊을 수 없다.
어릴 적 장티푸스를 앓아 소리의 세계에서 멀어졌지만 이로 인해 세상의 온갖 소리에 현혹되지 않고 파인더를 통해 오히려 삶과 세상을 더 정직하게 바라 볼 수 있었다는 박용수 선생님.
사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술과 인생 그리고 정치와 사상이 뒤얽힌 우리 현대사의 질곡 그 자체였다.
피카디리극장 뒤쪽 허름한 사무실에서 임수경 씨의 방북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정신차려라 이놈아, 분단으로 허리가 꺾인 나라만큼 장애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을 치시던 선생님. 막걸리가 마치 통일의 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권하시던 선생님은 마침내 ‘우리말갈래사전’이라는 말의 통일을 스스로 이루고야 말았다.
그리고 <함께걸음>을 통해 만난 또 한사람 양원태.
서울대 학생시절 구로구청 투표부정을 온몸으로 저지하다 구청 옥상에서 전경에 밀려 떨어진 해맑은 청년. 뒤늦게 찾아온 장애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담담하게 말하는 원태를 보면서 경외의 감정까지 느끼기도 했다.
일상에 지쳐 처음 연구소를 찾았을 때처럼 연구소에서의 삶도 일과 사람에 지치고 때가 묻어, 갈수록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 있었던 때 원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형, 형이 이 바닥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 장애인들 덕분인데 형은 마치 내가 이렇게 많이 희생하고 봉사했는데 너희들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냐는 식으로 말하는 건 이해할 수 없어.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순간 뒷머리가 띵 해지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 화끈거림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나를 다시 돌아 볼 수 있었다.
‘누가 너에게 이 길을 가라고 강요했느냐…’
연구소와 <함께걸음>의 품을 떠난 지 어느덧 십 수 년이 넘었지만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짐을 느낀다. 이제 다시 예전의 모습처럼 그 자리로 되돌아 갈 수는 없지만 <함께걸음>이 맺어준 슬프고도 아름다운 수많은 인연들은 오늘도 내 삶의 갈증을 달래주는 깊고도 시원한 우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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