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지체 장애우 진구 명구씨의 가슴 아픈 삶의 이야기
"계속 일 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본문
세 식구가 두 사람 임금 받으며 고물상에서 일 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늘 고단하다. 그 중에서도 장애우 특히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장애우들은 낮은 자리에서 척박한 삶을 어떻게 견뎌내며 살까, 밥은 제대로 먹고살까, 일자리는 있을까, 아플 때는 어떡하지 도와줄 사람도 없을 텐데.....
정신지체 장애우 문제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걱정을 해봤을 것이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에 사는, 정신지체 1급 장애를 갖고 있는 진구 명구 씨를 만나기 전 기자의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역시나 예의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을 소개해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직업센터 서동운 간사가 전해 준 사전 정보에 따르면 인천 계양동에 있는 한 고물상에서 일하는 두 형제가 있는데 두 사람 다 정신지체 1급 장애우고, 같이 일하고 있는 형제의 어머니도 역시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을 돌봐주는 사람이 전혀 없는 실정이고, 결정적인 위기는 설상가상으로 7월이면 이들이 고물상에서 해고돼서 길거리로 내쫓길 예정이라는 얘기를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거다' 라고 치부해버리면 다른 할 말은 없지만, 아무리 세상이 가지지 못한 자, 사회적 약자, 장애우,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정신지체 장애우에게 특히 더 가혹하다고 하지만 그 점을 인정하더라도, 비록 전해들은 얘기였긴 하지만 만남이 예정된 진구네 집이 처한 현실은 무척 심각했고, 또 너무나 암울해 보였다.
언뜻 드는 생각만으로도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건, 다른 것은 몰라도 세상이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세 식구를 방치하다시피 내팽개쳐 놓고 모른 체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고철과 공병 등 재활용품을 수집해서 파는 일을 하는 고물상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갈 데가 없어지면 마지막 스며드는 곳이 고물상이라고, 사람들이 일하기를 기피하기 때문에 장애우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그래서인가, 고물상에서 진구 명구 형제와 그 어머니를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전혀 낯설지 않았다.
마침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천 계양구 화려한 시가지를 뒤로하고 끝자락에 개발되지 않은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한켠에 고물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물상에 들어서자 진구, 명구씨 어머니로 추정되는 한 아주머니가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고철들 속에서 또 다른 고철들을 분류해내느라 바쁘게 손길을 놀리고 있었다. 진구, 명구씨는 바로 눈에 띄지 않았는데, 기자를 맞은 고물상 주인이 "진구야! 명구야!"라고 소리쳐 부르자 갑자기 두 형제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밀짚모자를 쓴 진구씨가 해맑게 웃고, 모자는 쓰지 않았지만 명구씨 역시 수줍어하며 해맑게 웃는다. 둘 다 말은 없다.
고물상 사장님이 배려해줘서 그 날 작업은 더 이상 하지 않고 고물상 사무실에서 어머니와 두 형제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어머니 이름은 도옥순, 53년생이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54세다. 그리고 진구씨는 29세, 명구씨는 27세다. 진구, 명구 씨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절 말이 없다. 그래서 대화는 어머니와 1년여 그들을 돌보고 있다는 고물상 주인, 그리고 기자 사이에 이뤄졌다. 먼저 고물상 주인이 혀를 차며 말을 꺼냈다.
"문제는 이 친구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디 갈 데도 없고, 이 친구들에게 1년 밖에 돈이 안 들어온다는 거, 이게 문제인 거죠. 지금 이 형제 통장에 약 4백 만원이 모여져 있거든요. 1년만 더 일 할 수 있으면 7백에서 8백만원을 모을 수 있는데, 그러면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마련해 아파트도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는 거죠"
주인 말이 무슨 말인지 부연설명을 해보자. 진구 명구씨는 고물상에서 한 달 월급 75만원씩 합쳐서 150만원을 받는다. 그리고 이 월급에는 두 형제 어머니 임금까지 포함되어 있다. 장애 특성상 형제가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어머니가 형제 대신 일을 하는 조건으로 고용돼서 월급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형제가 일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고물상에 취직하게 됐나, 고물상 주인이 자선사업가라서, 천만의 말씀이다. 고물상은 자선사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답은 형제의 임금을 사실상 정부에서 주고 있기 때문에 고용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형제는 고용보험에서 정규직 채용을 전제로 지원하는 한 달 1인당 60만원 합해서 120만원의 고용 지원금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이 지원금이 딱 1년간만 한시적으로 지원된다는 것이다. 만약 계속 고용이 이뤄지면 1년 후부터는 고용촉진공단의 고용장려금을 받게 되는데, 고용장려금은 고용주가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인 70만원 가량의 임금을 근로자에게 준다는 전제 하에 장애우 1인당 최대 월 37만5천원을 지원하고 있다. 언뜻 봐도 60만원 지원과 37만5천원 지원은 지원 액수에서 큰 차이가 난다. 고물상 주인 입장에서는 지금은 고용보험 지원금에 15만원만 더 얹어주면 되지만 장려금으로 넘어가면 한 사람당 약 30만원을 더 얹어줘야 해서 인건비 늘어나는 부담 때문에 계속 고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물상 주인은 "솔직히 말해서 두 형제의 생산성은 비장애우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친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주인은 "이 친구들은 아직도 양은하고 스텐을 구분 못해요. 공병도 하이트하고 카스병 구분을 제대로 못하죠. 일은 성실하게 하는데, 장애의 한계인 거죠."라고 덧붙였다.
주인 말이 끝나자 가만히 앉아 있던 어머니가 나서 반박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일하는 게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나아요. 아이들은 젊은 사람들처럼 꾀를 안 부리니까, 어디 가서도 대우받아요. 우리 아이들 그 동안 공병 구분 작업 많이 했어요. 지루해 하지 않고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
어머니 말에서 어떻게든 해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그렇지만 주인 입장은 여전히 완강하다.
"내가 이 달 초에 어머니에게 얘기했어요. 계약기간이 딱 1년이라 같이 일하는 것이 힘들 것 같다고 얘기했죠. 대신 대안으로 이건 계획이긴 하지만 앞으로 우리 고물상에서 공병 수집 작업을 할 계획인데, 그러면 어머니에게 일을 맡길 계획이에요. 잘 될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획은 어쨌든 계획일 뿐이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두 형제와 어머니는 7월 4일자로 고물상에서 해고될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러면 이들 모자는 어디로 가야 하나.
기자가 나중에 만난, 진구네 집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 정신지체 장애우 어머니는 "지금이 진구네가 살아온 세월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예요. 통장에 4백만원 모은 것도 태어나서 처음일 거고, 진구네 집에 가보면 텔레비전도 있고, 전화, 핸드폰도 있어요. 진구네는 살아오면서 그런 걸 갖추고 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물어보면 식구들도 모두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일자리가 없어지면 다시 암울한 옛날로 돌아가는 거죠."라고 말하고 있다.
학대 때문에 집 나와 사는 세 식구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진구 명구 씨는 모두 장애 등급 1급의 중증정신지체 장애우다. 그러면 이들 형제가 일을 하지 못하면 특별한 재산도 없으니까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받아서 정부로부터 생계비와 장애 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왜 모자는 생계비 대신 일자리에 집착하는 걸까
기자가 까닭을 물어보자 어머니는 "지금도 기생법 수급자예요."라고 대답했다. 이어 "원래 직장이 있으면 수급자에서 떨어지는데 아이들이 중증장애우라고 구청에서 봐줘서 수급권자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 생계비와 장애수당이 나오는데 그 돈은 어디에 쓰느냐고 물어보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따로 사는 아이들 아버지가 다 받아쓴다."고 대답했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형제 아버지가 엄연히 살아있는데, 왜 형제는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지, 이야기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다음은 형제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사는 이유를 설명하는 어머니 말이다.
"애들 아버지가 술을 먹어요. 술을 먹고, 아이들을 나만 일나가면 아침부터 벌을 세우고 있는 거예요. 완전히 술 중독이 된 사람이죠. 남들도 그 사람 보면 다 싫다고 그래요, 내가 공장에서 철야하는 날이면 집 나갈 때 애들 아버지에게 이르거든요. 아이들 우리 자식이니까 남의 사람 갖다 먹이지 말고, 마누라가 벌어 먹이는 거니까 아이들 좀 잘 건사하라고, 그러는데 술만 한 잔 들어가면 동네방네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며 문짝이고 대문이고 박살내 는 거예요. 내가 대전 살 때부터 보따리를 아홉 번 싸다가 풀렀다가 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열 번째 보따리를 싸서 금수장이라는 여인숙에서 2년을 생활했어요. 맨발로 나와서 집에 못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나 죽인다고 칼 갖고 돌아다니는 거 있죠. 내가 왜 집을 나왔냐면 애들은 생판 남이 끌어다가 재우고, 애들 아버지는 여기저기 가게 다니며 외상 술 먹고, 나보고 갚으라고 발랑 나자빠지고, 내가 외상값 다 갚아줘도 소용없었어요. 그래서 열 번째 보따리 싸서 애들하고 맨발로 나와서 이렇게 사는 거예요."
어머니 말이 일관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은 그이와 친하게 지내는 지인의 표현에 따르면 엄마도 조금 부족하기 때문이다. 형제의 어머니인 그이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한글도 모르고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른다. 더욱이 돈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어서 1만원짜리 한 장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게 주위 사람 말이다. 장애등록을 안 했을 뿐이지 사실상 그이도 장애우인 것이다.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그이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이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 얘기에 따르면 그이는 대전이 고향인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젖동냥을 해서 키웠단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도 못 다니고, 동네에 착한 사람 있다고 해서 십대 후반에 시집가서 애 둘 낳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이가 얘기하는 좀 더 구체적인 살아온 과정은 이렇다. "아버지하고 살면서 고생 많이 했어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 지게다리 붙잡고 다녔죠. 그러다가 대전 이모가 시집 보내준다고 해서 이모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여관에 갔는데, 지금 애들 아버지가 여관에 방 얻어 놓고 살고 있었어요. 애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저 아가씨 나 달라고 해서 내가 물건이냐고 소리소리 지른 적이 있었는데, 왔다갔다하다가 나중에는 할머니가 니들 맘대로 해라 그래서, 남편이 결혼하면 잘해준다고 해서 결혼했어요. 그때 남편이 대전에 있는 피혁 공장엘 다녔는데, 준비반에서 일 했으니까 직업도 아니죠. 할머니가 나를 그런데다 떠넘긴 거죠."
주변 사람들 얘기를 모아보면 결혼 후 그이는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에 거의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다. 그이가 사람들을 만나면 진구 명구씨가 정신지체 장애우가 된 이유를 꼽는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결혼 후 바로 밭일을 했는데 아이들을 밭두렁에다 누이고 일을 하다보면 개미를 비롯한 벌레들이 아이들을 끊임없이 물어뜯고 여기다가 남의 눈치보느라 젖도 잘 못 먹여서, 아이들이 잘 먹지 못해 장애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 그이가 말하는 아이들이 장애를 가지게 된 이유는, 아이들 아빠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꾸 찡얼거리면서 운다고 아이들을 집어서 벽에다 내던져서 그때 충격과 뇌손상으로 아이들이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 다 진구 명구 씨의 장애를 제대로 설명하는데는 미흡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이가 하는 얘기에서 알 수 있듯 그이는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척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이는 결혼해서 시골에서는 주로 밭일을 했고 도회지에 나와서는 장롱 광택을 내는 일 같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험한 일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일 할 곳이 없어지자 종착역 고물상에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일하며 사는 게 남은 희망
이제 진구 명구씨 얘기를 해보자.
먼저 진구 씨는 인천에 있는 인혜특수학교 고등부 1기 졸업생이다. 하지만 그것 뿐 고물상에서 일하기 전에는 단 한번도 직장에 다닌 적이 없다. 집에서 놀았는데 설상가상으로 건강이 안 좋아서 간 손상으로 작년초 죽음의 문턱에 갔다와야 했다. 입원한 큰 병원에서 손을 못 쓸 정도니까 장례를 준비하라고 얘기할 정도였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어머니 말은 진구씨가 못 먹어서, 아이들 아빠가 밥을 굶겨서 건강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명구 씨는 부평중학교를 나왔다. 명구씨는 진구씨 보다는 장애가 경한 편이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복지관 빵 만드는 프로그램에 2년간 몸 담고 있다가 복지관을 나와서 플라스틱 그릇 만드는 공장에도 다녔다. 명구씨는 계속 공장에 다니고 싶었는데, 얼마안가 회사 부장 과장이 일 못한다고 자꾸 때려서 공장을 그만둬야 했다.
그나마 명구씨가 효자인 것은 명구씨가 플라스틱 그릇 만드는 공장에 다니면서 지금 살고 있는 월세방 보증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지금 진구네는 인천시 청천동 대우자동자 인근에 방 한칸 월세방을 얻어 사는데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5만원짜리 방이다. 이 방 보증금 50만원이 명구씨가 구타를 당하며 어렵게 번 돈이다.
따로 방을 얻어 나오기 전 진구 명구씨 일상은 지옥 그 자체였다는 것이 주변사람들 말이다. 어머니는 "저녁에 보면 아이들이 아버지가 무서워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다리 밑에 서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이의 지인은 "진구 명구가 아빠와는 같이 못 살아요. 아이들이 집에 들어가면 아빠가 무릎 끓고 앉아 있어 그런데요. 그러면 밤에 아빠가 자라 그러지 않는 한 아이들이 하루종일 무릎 끓고 있어야 한대요. 아빠가 무서우니까 아빠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꼼짝하지 않는 거죠."라고 끔찍한 학대의 실상을 전하고 있다.
내친김에 지인의 말을 더 들어본다.
"진구 엄마가 처음 집을 나왔을 때가 5년 전인데, 그때는 아이들은 아빠와 같이 있고 엄마만 따로 떨어져 나와 살았어요. 아빠가 많이 때려서, 진구 엄마도 많이 맞았는데, 하도 많이 맞아서 지금도 날만 궂으면 여기 저기 쑤신대요. 그러다가 진구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데, 하루는 가보니까 화장실도 없는 여인숙 조그만 방에서 세 식구가 생활하고 있는 거였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죠. 거기다가 진구 엄마가 직장에 다니긴 했는데 부족하니까 월급도 못 받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진구네가 돈 없이 어떻게 살았냐면 여기 저기서 돈을 빌리고 외상을 지고해서 살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여기서도 꾼 게 튀어나오고 저기서도 꾼 게 튀어나오는 거였어요. 심지어는 전철역 매점에도 빚을 잔뜩 져서 다 갚아주고 그랬어요. 집에서 아침을 해먹지 않으니까 출근하면서 전철역에 내려서 매점에서 빵하고 우유 사먹고 출근하는데 그 빚이 쌓인 거죠. 지금도 가끔 전화 오는데 진구 엄마가 가스 떨어져서, 또 뭐가 없어서 밥을 못해 먹는다고 그래요. 다 사먹는 거죠. 식구들이 모두 돈 관리를 못하니까 동네 수퍼에도 외상값이 상당하고, 월급 타서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을 정도예요."라고 말하고 있다.
학대받은 기억 때문에 진구 명구씨는 지금도 아버지만 나타나면 도망간다는 게 어머니 말이다. 그이에 따르면 며칠 전 남편이 그이가 일하고 있는 고물상에 나타났단다. 진구 명구씨는 일하다 말고 도망가서 숨고, 생뚱 맞아 하는 그이에게 남편은 "돈이 필요하니까 천만원만 마련해 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이는 이런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이에 따르면, 집을 나오면 자동으로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서 집을 나왔고, 한 번은 실제로 이혼 서류 가지고 법원에 갔는데 판사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온 적도 있단다. 그이가 남편과 이혼을 원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임대료가 저렴한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싶은데, 호적에 독립세대로 분할되어 있지 않고, 현재 세대주인 남편이 영구임대 아파트를 차지하고 있어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 방은 방세 25만원 내면 남는 게 없어요.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면 13만원에 공과금도 해결된다는데, 아이들이 따뜻한 물로 목욕도 할 수 있고, 지금은 방 한 칸에, 진구는 키가 커서 오그리고 자야 하는 형편이에요" 그이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와줘서 이혼 할 수 있게 해준다면 당장 이혼수속을 밟고 싶다는 게 그이 말이다. 그런데 그이는 정말 이혼을 원하는 걸까,
한편에선 그이의 남편을 동정하는 시각도 있다. 그이처럼 정신지체 장애우 자녀가 있는 그이의 지인은 "정신지체인 부모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독특한 가슴앓이를 한다."며 "정신지체인 부모들은 어느 날 자식들을 보면 딱하고 불쌍하다가도, 어느 날 보면 왜 이런 자식이 내게 생겼는지 견딜 수 없어 하며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서 아이들을 구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진구 아버지도 자식들 때문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게 지인의 말이다. 그이 남편은 그이보다 7살 위인 60살이다. 늙고 병들어서 주변사람들 말에 따르면 살날이 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이도 진심으로 이혼을 원하는 게 아니라 내심은 남편이 사망하고 나면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주변사람들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세 식구는 집을 나와 따로 방을 얻어 살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이는 "남편이 없으니까 세상이 다 편해요."라며 웃는다. 기자가 집에서는 뭐하며 지내냐고 물어보자, 진구 명구씨는 "텔레비전을 본다."고 대답한다. 그이는 "잠을 잔다."고 대답했다.
인터뷰 시간 동안 내내 진구 명구씨는 엄마 팔에 낀 팔짱을 풀지 않고 있었다. 진구 명구씨에게 그렇게 엄마가 좋으냐고 물어보자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인터뷰 말미에 그이가 지나가는 바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돈 많이 벌어서 내가 죽기 전에 아이들을 시설에 보내야 되는데....."
이 이야기를 못들은 척 하고 진구 엄마에게 물었다. "희망이 뭐예요?" "뭐 있나요, 그냥 사는 거죠. 다만 계속 일하고 살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일을 시작하면서 많이 좋아졌거든요. 어떻게든 일을 해야 하는데....." 그이가 대답하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그이 얼굴에 불현듯 수심이 내려앉는다. 그런 그이 얼굴을 보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잘 되겠죠" 뻔한 한 마디 말을 던지고, 그이를 외면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왜 정신지체 장애우들을 외면하나
한 번 따져보자. 세 식구는 왜 직장에서 해고되어야 하나, 근본적인 이유는 진구 명구씨가 생산성이 부족한 정신지체 장애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면 정신지체 장애우들은 모두 일 할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나, 그건 아닐 것이다. 바람에 밀려 굴러다니는 나뭇잎보다 흔한 얘기지만 정부의 존재 이유는 사회 취약 계층인 정신지체 장애우들에게 어떻게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장애우 고용 장려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최대 많이 줘도 월 37만5천원으로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기업에 고용되기를 바라다니. 이건 심하게 말하면 바보 아니면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하긴 정책을 시행하는 높은 분들 입장에선 자기와 자기 가족 일이 아니니까,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고용되든 해고되든 무슨 상관이 있겠냐마는 진구네처럼 정신지체인 당사자들에게는 삶이 걸린 문제다. 일할 곳이 없어 고물상에서라도 일하겠다는 데 왜 이런 작은 소망마저 들어주질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부 말대로 예산이 부족해 고용장려금을 삭감할 수밖에 없었다면 적어도 장애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정신지체 장애우만은 예외로 해서 시행했어야 인간의 얼굴을 한 정부가 아닌가,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처해 있는 삶의 현실 문제도 그렇다. 진구네 경우처럼 방치되고 버려진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고,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섬에 갇혀 혹사당하고, 시설에 격리되어 갇혀 살다가 매 맞아 죽고, 착취당하고, 또 성폭행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정신지체 장애우 현실만 따로 떼어내 보면 이건 말 그대로 지옥이고 아수라장이다. 이러고도 인권을 얘기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권위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존재하나, 정신지체 장애우 학대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면 그뿐, 대책을 세우겠다는 정부 의지가 단 한 번도 가시화 된 적이 없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조만간 진구 명구네는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또 다시 길거리를 떠돌며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대 때문에 아버지가 있는 집에는 못 들어가고, 자칫 잘못하면 월세를 못 내서 살던 방에서 쫓겨나고, 가스가 없어서, 쌀이 없어서 끼니를 굶을 지도 모른다. 이런 가혹한 현실을 그들만의 일으로 치부하고 넘어간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 도대체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나, 바라기는 제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들이 됐으면 좋겠다.
글 이태곤 기자
사진 전진호 기자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늘 고단하다. 그 중에서도 장애우 특히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장애우들은 낮은 자리에서 척박한 삶을 어떻게 견뎌내며 살까, 밥은 제대로 먹고살까, 일자리는 있을까, 아플 때는 어떡하지 도와줄 사람도 없을 텐데.....
정신지체 장애우 문제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걱정을 해봤을 것이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에 사는, 정신지체 1급 장애를 갖고 있는 진구 명구 씨를 만나기 전 기자의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역시나 예의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을 소개해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직업센터 서동운 간사가 전해 준 사전 정보에 따르면 인천 계양동에 있는 한 고물상에서 일하는 두 형제가 있는데 두 사람 다 정신지체 1급 장애우고, 같이 일하고 있는 형제의 어머니도 역시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을 돌봐주는 사람이 전혀 없는 실정이고, 결정적인 위기는 설상가상으로 7월이면 이들이 고물상에서 해고돼서 길거리로 내쫓길 예정이라는 얘기를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거다' 라고 치부해버리면 다른 할 말은 없지만, 아무리 세상이 가지지 못한 자, 사회적 약자, 장애우,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정신지체 장애우에게 특히 더 가혹하다고 하지만 그 점을 인정하더라도, 비록 전해들은 얘기였긴 하지만 만남이 예정된 진구네 집이 처한 현실은 무척 심각했고, 또 너무나 암울해 보였다.
언뜻 드는 생각만으로도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건, 다른 것은 몰라도 세상이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세 식구를 방치하다시피 내팽개쳐 놓고 모른 체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고철과 공병 등 재활용품을 수집해서 파는 일을 하는 고물상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갈 데가 없어지면 마지막 스며드는 곳이 고물상이라고, 사람들이 일하기를 기피하기 때문에 장애우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그래서인가, 고물상에서 진구 명구 형제와 그 어머니를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전혀 낯설지 않았다.
마침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천 계양구 화려한 시가지를 뒤로하고 끝자락에 개발되지 않은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한켠에 고물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물상에 들어서자 진구, 명구씨 어머니로 추정되는 한 아주머니가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고철들 속에서 또 다른 고철들을 분류해내느라 바쁘게 손길을 놀리고 있었다. 진구, 명구씨는 바로 눈에 띄지 않았는데, 기자를 맞은 고물상 주인이 "진구야! 명구야!"라고 소리쳐 부르자 갑자기 두 형제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밀짚모자를 쓴 진구씨가 해맑게 웃고, 모자는 쓰지 않았지만 명구씨 역시 수줍어하며 해맑게 웃는다. 둘 다 말은 없다.
고물상 사장님이 배려해줘서 그 날 작업은 더 이상 하지 않고 고물상 사무실에서 어머니와 두 형제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어머니 이름은 도옥순, 53년생이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54세다. 그리고 진구씨는 29세, 명구씨는 27세다. 진구, 명구 씨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절 말이 없다. 그래서 대화는 어머니와 1년여 그들을 돌보고 있다는 고물상 주인, 그리고 기자 사이에 이뤄졌다. 먼저 고물상 주인이 혀를 차며 말을 꺼냈다.
"문제는 이 친구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디 갈 데도 없고, 이 친구들에게 1년 밖에 돈이 안 들어온다는 거, 이게 문제인 거죠. 지금 이 형제 통장에 약 4백 만원이 모여져 있거든요. 1년만 더 일 할 수 있으면 7백에서 8백만원을 모을 수 있는데, 그러면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마련해 아파트도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는 거죠"
주인 말이 무슨 말인지 부연설명을 해보자. 진구 명구씨는 고물상에서 한 달 월급 75만원씩 합쳐서 150만원을 받는다. 그리고 이 월급에는 두 형제 어머니 임금까지 포함되어 있다. 장애 특성상 형제가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어머니가 형제 대신 일을 하는 조건으로 고용돼서 월급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형제가 일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고물상에 취직하게 됐나, 고물상 주인이 자선사업가라서, 천만의 말씀이다. 고물상은 자선사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답은 형제의 임금을 사실상 정부에서 주고 있기 때문에 고용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형제는 고용보험에서 정규직 채용을 전제로 지원하는 한 달 1인당 60만원 합해서 120만원의 고용 지원금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이 지원금이 딱 1년간만 한시적으로 지원된다는 것이다. 만약 계속 고용이 이뤄지면 1년 후부터는 고용촉진공단의 고용장려금을 받게 되는데, 고용장려금은 고용주가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인 70만원 가량의 임금을 근로자에게 준다는 전제 하에 장애우 1인당 최대 월 37만5천원을 지원하고 있다. 언뜻 봐도 60만원 지원과 37만5천원 지원은 지원 액수에서 큰 차이가 난다. 고물상 주인 입장에서는 지금은 고용보험 지원금에 15만원만 더 얹어주면 되지만 장려금으로 넘어가면 한 사람당 약 30만원을 더 얹어줘야 해서 인건비 늘어나는 부담 때문에 계속 고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물상 주인은 "솔직히 말해서 두 형제의 생산성은 비장애우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친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주인은 "이 친구들은 아직도 양은하고 스텐을 구분 못해요. 공병도 하이트하고 카스병 구분을 제대로 못하죠. 일은 성실하게 하는데, 장애의 한계인 거죠."라고 덧붙였다.
주인 말이 끝나자 가만히 앉아 있던 어머니가 나서 반박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일하는 게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나아요. 아이들은 젊은 사람들처럼 꾀를 안 부리니까, 어디 가서도 대우받아요. 우리 아이들 그 동안 공병 구분 작업 많이 했어요. 지루해 하지 않고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
어머니 말에서 어떻게든 해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그렇지만 주인 입장은 여전히 완강하다.
"내가 이 달 초에 어머니에게 얘기했어요. 계약기간이 딱 1년이라 같이 일하는 것이 힘들 것 같다고 얘기했죠. 대신 대안으로 이건 계획이긴 하지만 앞으로 우리 고물상에서 공병 수집 작업을 할 계획인데, 그러면 어머니에게 일을 맡길 계획이에요. 잘 될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획은 어쨌든 계획일 뿐이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두 형제와 어머니는 7월 4일자로 고물상에서 해고될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러면 이들 모자는 어디로 가야 하나.
기자가 나중에 만난, 진구네 집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 정신지체 장애우 어머니는 "지금이 진구네가 살아온 세월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예요. 통장에 4백만원 모은 것도 태어나서 처음일 거고, 진구네 집에 가보면 텔레비전도 있고, 전화, 핸드폰도 있어요. 진구네는 살아오면서 그런 걸 갖추고 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물어보면 식구들도 모두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일자리가 없어지면 다시 암울한 옛날로 돌아가는 거죠."라고 말하고 있다.
학대 때문에 집 나와 사는 세 식구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진구 명구 씨는 모두 장애 등급 1급의 중증정신지체 장애우다. 그러면 이들 형제가 일을 하지 못하면 특별한 재산도 없으니까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받아서 정부로부터 생계비와 장애 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왜 모자는 생계비 대신 일자리에 집착하는 걸까
기자가 까닭을 물어보자 어머니는 "지금도 기생법 수급자예요."라고 대답했다. 이어 "원래 직장이 있으면 수급자에서 떨어지는데 아이들이 중증장애우라고 구청에서 봐줘서 수급권자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 생계비와 장애수당이 나오는데 그 돈은 어디에 쓰느냐고 물어보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따로 사는 아이들 아버지가 다 받아쓴다."고 대답했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형제 아버지가 엄연히 살아있는데, 왜 형제는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지, 이야기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다음은 형제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사는 이유를 설명하는 어머니 말이다.
"애들 아버지가 술을 먹어요. 술을 먹고, 아이들을 나만 일나가면 아침부터 벌을 세우고 있는 거예요. 완전히 술 중독이 된 사람이죠. 남들도 그 사람 보면 다 싫다고 그래요, 내가 공장에서 철야하는 날이면 집 나갈 때 애들 아버지에게 이르거든요. 아이들 우리 자식이니까 남의 사람 갖다 먹이지 말고, 마누라가 벌어 먹이는 거니까 아이들 좀 잘 건사하라고, 그러는데 술만 한 잔 들어가면 동네방네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며 문짝이고 대문이고 박살내 는 거예요. 내가 대전 살 때부터 보따리를 아홉 번 싸다가 풀렀다가 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열 번째 보따리를 싸서 금수장이라는 여인숙에서 2년을 생활했어요. 맨발로 나와서 집에 못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나 죽인다고 칼 갖고 돌아다니는 거 있죠. 내가 왜 집을 나왔냐면 애들은 생판 남이 끌어다가 재우고, 애들 아버지는 여기저기 가게 다니며 외상 술 먹고, 나보고 갚으라고 발랑 나자빠지고, 내가 외상값 다 갚아줘도 소용없었어요. 그래서 열 번째 보따리 싸서 애들하고 맨발로 나와서 이렇게 사는 거예요."
어머니 말이 일관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은 그이와 친하게 지내는 지인의 표현에 따르면 엄마도 조금 부족하기 때문이다. 형제의 어머니인 그이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한글도 모르고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른다. 더욱이 돈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어서 1만원짜리 한 장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게 주위 사람 말이다. 장애등록을 안 했을 뿐이지 사실상 그이도 장애우인 것이다.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그이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이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 얘기에 따르면 그이는 대전이 고향인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젖동냥을 해서 키웠단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도 못 다니고, 동네에 착한 사람 있다고 해서 십대 후반에 시집가서 애 둘 낳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이가 얘기하는 좀 더 구체적인 살아온 과정은 이렇다. "아버지하고 살면서 고생 많이 했어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 지게다리 붙잡고 다녔죠. 그러다가 대전 이모가 시집 보내준다고 해서 이모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여관에 갔는데, 지금 애들 아버지가 여관에 방 얻어 놓고 살고 있었어요. 애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저 아가씨 나 달라고 해서 내가 물건이냐고 소리소리 지른 적이 있었는데, 왔다갔다하다가 나중에는 할머니가 니들 맘대로 해라 그래서, 남편이 결혼하면 잘해준다고 해서 결혼했어요. 그때 남편이 대전에 있는 피혁 공장엘 다녔는데, 준비반에서 일 했으니까 직업도 아니죠. 할머니가 나를 그런데다 떠넘긴 거죠."
주변 사람들 얘기를 모아보면 결혼 후 그이는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에 거의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다. 그이가 사람들을 만나면 진구 명구씨가 정신지체 장애우가 된 이유를 꼽는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결혼 후 바로 밭일을 했는데 아이들을 밭두렁에다 누이고 일을 하다보면 개미를 비롯한 벌레들이 아이들을 끊임없이 물어뜯고 여기다가 남의 눈치보느라 젖도 잘 못 먹여서, 아이들이 잘 먹지 못해 장애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 그이가 말하는 아이들이 장애를 가지게 된 이유는, 아이들 아빠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꾸 찡얼거리면서 운다고 아이들을 집어서 벽에다 내던져서 그때 충격과 뇌손상으로 아이들이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 다 진구 명구 씨의 장애를 제대로 설명하는데는 미흡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이가 하는 얘기에서 알 수 있듯 그이는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척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이는 결혼해서 시골에서는 주로 밭일을 했고 도회지에 나와서는 장롱 광택을 내는 일 같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험한 일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일 할 곳이 없어지자 종착역 고물상에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일하며 사는 게 남은 희망
이제 진구 명구씨 얘기를 해보자.
먼저 진구 씨는 인천에 있는 인혜특수학교 고등부 1기 졸업생이다. 하지만 그것 뿐 고물상에서 일하기 전에는 단 한번도 직장에 다닌 적이 없다. 집에서 놀았는데 설상가상으로 건강이 안 좋아서 간 손상으로 작년초 죽음의 문턱에 갔다와야 했다. 입원한 큰 병원에서 손을 못 쓸 정도니까 장례를 준비하라고 얘기할 정도였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어머니 말은 진구씨가 못 먹어서, 아이들 아빠가 밥을 굶겨서 건강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명구 씨는 부평중학교를 나왔다. 명구씨는 진구씨 보다는 장애가 경한 편이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복지관 빵 만드는 프로그램에 2년간 몸 담고 있다가 복지관을 나와서 플라스틱 그릇 만드는 공장에도 다녔다. 명구씨는 계속 공장에 다니고 싶었는데, 얼마안가 회사 부장 과장이 일 못한다고 자꾸 때려서 공장을 그만둬야 했다.
그나마 명구씨가 효자인 것은 명구씨가 플라스틱 그릇 만드는 공장에 다니면서 지금 살고 있는 월세방 보증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지금 진구네는 인천시 청천동 대우자동자 인근에 방 한칸 월세방을 얻어 사는데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5만원짜리 방이다. 이 방 보증금 50만원이 명구씨가 구타를 당하며 어렵게 번 돈이다.
따로 방을 얻어 나오기 전 진구 명구씨 일상은 지옥 그 자체였다는 것이 주변사람들 말이다. 어머니는 "저녁에 보면 아이들이 아버지가 무서워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다리 밑에 서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이의 지인은 "진구 명구가 아빠와는 같이 못 살아요. 아이들이 집에 들어가면 아빠가 무릎 끓고 앉아 있어 그런데요. 그러면 밤에 아빠가 자라 그러지 않는 한 아이들이 하루종일 무릎 끓고 있어야 한대요. 아빠가 무서우니까 아빠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꼼짝하지 않는 거죠."라고 끔찍한 학대의 실상을 전하고 있다.
내친김에 지인의 말을 더 들어본다.
"진구 엄마가 처음 집을 나왔을 때가 5년 전인데, 그때는 아이들은 아빠와 같이 있고 엄마만 따로 떨어져 나와 살았어요. 아빠가 많이 때려서, 진구 엄마도 많이 맞았는데, 하도 많이 맞아서 지금도 날만 궂으면 여기 저기 쑤신대요. 그러다가 진구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데, 하루는 가보니까 화장실도 없는 여인숙 조그만 방에서 세 식구가 생활하고 있는 거였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죠. 거기다가 진구 엄마가 직장에 다니긴 했는데 부족하니까 월급도 못 받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진구네가 돈 없이 어떻게 살았냐면 여기 저기서 돈을 빌리고 외상을 지고해서 살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여기서도 꾼 게 튀어나오고 저기서도 꾼 게 튀어나오는 거였어요. 심지어는 전철역 매점에도 빚을 잔뜩 져서 다 갚아주고 그랬어요. 집에서 아침을 해먹지 않으니까 출근하면서 전철역에 내려서 매점에서 빵하고 우유 사먹고 출근하는데 그 빚이 쌓인 거죠. 지금도 가끔 전화 오는데 진구 엄마가 가스 떨어져서, 또 뭐가 없어서 밥을 못해 먹는다고 그래요. 다 사먹는 거죠. 식구들이 모두 돈 관리를 못하니까 동네 수퍼에도 외상값이 상당하고, 월급 타서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을 정도예요."라고 말하고 있다.
학대받은 기억 때문에 진구 명구씨는 지금도 아버지만 나타나면 도망간다는 게 어머니 말이다. 그이에 따르면 며칠 전 남편이 그이가 일하고 있는 고물상에 나타났단다. 진구 명구씨는 일하다 말고 도망가서 숨고, 생뚱 맞아 하는 그이에게 남편은 "돈이 필요하니까 천만원만 마련해 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이는 이런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이에 따르면, 집을 나오면 자동으로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서 집을 나왔고, 한 번은 실제로 이혼 서류 가지고 법원에 갔는데 판사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온 적도 있단다. 그이가 남편과 이혼을 원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임대료가 저렴한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싶은데, 호적에 독립세대로 분할되어 있지 않고, 현재 세대주인 남편이 영구임대 아파트를 차지하고 있어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 방은 방세 25만원 내면 남는 게 없어요.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면 13만원에 공과금도 해결된다는데, 아이들이 따뜻한 물로 목욕도 할 수 있고, 지금은 방 한 칸에, 진구는 키가 커서 오그리고 자야 하는 형편이에요" 그이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와줘서 이혼 할 수 있게 해준다면 당장 이혼수속을 밟고 싶다는 게 그이 말이다. 그런데 그이는 정말 이혼을 원하는 걸까,
한편에선 그이의 남편을 동정하는 시각도 있다. 그이처럼 정신지체 장애우 자녀가 있는 그이의 지인은 "정신지체인 부모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독특한 가슴앓이를 한다."며 "정신지체인 부모들은 어느 날 자식들을 보면 딱하고 불쌍하다가도, 어느 날 보면 왜 이런 자식이 내게 생겼는지 견딜 수 없어 하며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서 아이들을 구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진구 아버지도 자식들 때문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게 지인의 말이다. 그이 남편은 그이보다 7살 위인 60살이다. 늙고 병들어서 주변사람들 말에 따르면 살날이 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이도 진심으로 이혼을 원하는 게 아니라 내심은 남편이 사망하고 나면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주변사람들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세 식구는 집을 나와 따로 방을 얻어 살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이는 "남편이 없으니까 세상이 다 편해요."라며 웃는다. 기자가 집에서는 뭐하며 지내냐고 물어보자, 진구 명구씨는 "텔레비전을 본다."고 대답한다. 그이는 "잠을 잔다."고 대답했다.
인터뷰 시간 동안 내내 진구 명구씨는 엄마 팔에 낀 팔짱을 풀지 않고 있었다. 진구 명구씨에게 그렇게 엄마가 좋으냐고 물어보자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인터뷰 말미에 그이가 지나가는 바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돈 많이 벌어서 내가 죽기 전에 아이들을 시설에 보내야 되는데....."
이 이야기를 못들은 척 하고 진구 엄마에게 물었다. "희망이 뭐예요?" "뭐 있나요, 그냥 사는 거죠. 다만 계속 일하고 살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일을 시작하면서 많이 좋아졌거든요. 어떻게든 일을 해야 하는데....." 그이가 대답하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그이 얼굴에 불현듯 수심이 내려앉는다. 그런 그이 얼굴을 보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잘 되겠죠" 뻔한 한 마디 말을 던지고, 그이를 외면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왜 정신지체 장애우들을 외면하나
한 번 따져보자. 세 식구는 왜 직장에서 해고되어야 하나, 근본적인 이유는 진구 명구씨가 생산성이 부족한 정신지체 장애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면 정신지체 장애우들은 모두 일 할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나, 그건 아닐 것이다. 바람에 밀려 굴러다니는 나뭇잎보다 흔한 얘기지만 정부의 존재 이유는 사회 취약 계층인 정신지체 장애우들에게 어떻게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장애우 고용 장려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최대 많이 줘도 월 37만5천원으로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기업에 고용되기를 바라다니. 이건 심하게 말하면 바보 아니면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하긴 정책을 시행하는 높은 분들 입장에선 자기와 자기 가족 일이 아니니까,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고용되든 해고되든 무슨 상관이 있겠냐마는 진구네처럼 정신지체인 당사자들에게는 삶이 걸린 문제다. 일할 곳이 없어 고물상에서라도 일하겠다는 데 왜 이런 작은 소망마저 들어주질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부 말대로 예산이 부족해 고용장려금을 삭감할 수밖에 없었다면 적어도 장애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정신지체 장애우만은 예외로 해서 시행했어야 인간의 얼굴을 한 정부가 아닌가,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처해 있는 삶의 현실 문제도 그렇다. 진구네 경우처럼 방치되고 버려진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고,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섬에 갇혀 혹사당하고, 시설에 격리되어 갇혀 살다가 매 맞아 죽고, 착취당하고, 또 성폭행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정신지체 장애우 현실만 따로 떼어내 보면 이건 말 그대로 지옥이고 아수라장이다. 이러고도 인권을 얘기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권위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존재하나, 정신지체 장애우 학대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면 그뿐, 대책을 세우겠다는 정부 의지가 단 한 번도 가시화 된 적이 없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조만간 진구 명구네는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또 다시 길거리를 떠돌며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대 때문에 아버지가 있는 집에는 못 들어가고, 자칫 잘못하면 월세를 못 내서 살던 방에서 쫓겨나고, 가스가 없어서, 쌀이 없어서 끼니를 굶을 지도 모른다. 이런 가혹한 현실을 그들만의 일으로 치부하고 넘어간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 도대체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나, 바라기는 제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들이 됐으면 좋겠다.
글 이태곤 기자
사진 전진호 기자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