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계, 겉으로는 반대 속으로는 암묵적 합의? > 기획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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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계, 겉으로는 반대 속으로는 암묵적 합의?

특집Ⅲ - 시각차이 따라 상반된 길 걷는 장애인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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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7일 보건복지부가 '엘피지 지원제도의 폐지'와 '장애수당 대폭확대'를 골자로 한 장애인 정책안이 발표되자, 어느 단체할 것 없이 반대의 목소리를 외쳤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불과 보름도 안 돼 거짓말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다.

현행 교통체계로는 장애인들이 세상에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엘피지 폐지를 밀어붙이는 보건복지부.
하지만 이를 막아야 할 장애인 단체들은 구호만 있을 뿐, 특별한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속사정이 있는 걸까. 그 속을 <함께걸음>이 열어봤다.


기획예산처, "엘피지 제도 수정해야 돈 주겠다"

해묵은 논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90년에 재정해, 입맛에 따라 좌충우돌하던 엘피지 지원제도가 결국 폐지로 가닥이 잡혔다. 하지만 지난 2005년 '250리터로 축소'되던 때와 달리 장애인 단체의 반발은 생각보다 거세지 않아 보인다.

이는 알려진 것과 달리 보건복지부가 단독으로 제도개선을 추진해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몇 달 전부터 여러 차례 장애인 단체와 의견조율을 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미리 예측했던 것. 하지만 이를 대신할만한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일반 장애인들에게 '줬다 빼앗아갔다'는 거센 항의를 들으면서도 예산확보에 강한 집착을 보이며 '빨리 빨리'를 외치는 보건복지부 모습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보건복지부 내부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처럼 파격적인 제도를 신속하게 추진한 배경에는 대통령의 영향이 큰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4월 노무현 대통령이 장애인들과 영화 '맨발의 기봉이'를 관람한 자리에서 '장애인 복지를 획기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라는 것.

대통령의 발언수준에 걸맞는 정책을 고심하던 실무자들은 '획기적인 수준으로 장애인 복지예산을 증액하는 것'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에 따라 이번 개편안을 비롯해 대대적인 장애인 복지정책의 틀을 잡았지만 실행을 위해서는 예산확보가 관건. 하지만 기획예산처는 '대통령의 지시사항이니 예산은 마련해보겠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엘피지 지원제도를 개선하지 않으면 돈을 줄 수 없다'고 거부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되자 또 다시 엘피지 지원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됐고, 결국 '엘피지 제도는 폐지'로, 그 대신 '장애수당 및 장애아동 수당규모를 대폭확대' 쪽으로 가닥을 잡아 장애인 단체와 의견조율에 들어간 것이다.

   
공동주최 하려던 공청회, 특정단체 주도로 열리며 장애계 두 목소리로 엇갈려


논의에 참석했던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김정렬 사무총장은 "이 방안을 놓고 지난 7월 12일에 1박2일 동안 밤새워 토론 한 것을 비롯해 4차례에 걸쳐 실무자들과 의견조율을 했고, 두 번에 걸쳐 보건복지부 장관과 단체장 면담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장애인 단체들은 엘피지 지원제도 개선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처럼 무조건 엘피지 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총장은 "각 단체의 의견을 서로 듣는 수준의 원칙론적인 대화만 오고갔다. 다만 여기서 결정된 사안은 전체 장애인의 견해를 들어볼 수 있는 공청회를 마련하고, 이를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하 장총)과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이하 장총연)가 주관하기로 합의한 정도"라고 말했다.

이 결정에 따라 지난 7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공청회를 개최하기에 이른 것.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초 장총과 장총연 주최로 개최하기로 한 공청회가 장총연을 비롯한 산하단체들과 한나라당 정화원 의원 주최로 열리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장총의 한 관계자는 "반쪽짜리 공청회가 열릴 형국에 처하니 보건복지부 등에서 난리가 났다. 하지만 ▲뚜렷한 대안 없이 공청회를 개최할 경우 정부제도에 대한 성토 외에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없다고 판단했고 ▲당초 장총과 장총연이 공동주관 하고 엘피지 지원제도에 관심 있는 모든 장애인 단체들이 주최하는 형식으로 가자는 약속이 어겨진 점 ▲각 당의 목소리가 전부 다른 상황에서 특정정당만 참가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들어 참석을 거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열린우리당은 장애계 전반의 목소리를 담는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해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예측대로 이 공청회는 엘피지 지원 폐지를 결정한 정부의 성토장이 됐고, 공청회를 중계한 언론보도를 통해 한나라당 주장인 면세안이 장애계 전체 목소리처럼 비쳐지게 됐다.

20개 단체장 모여 '이동수당'골자로 한 장애인 단체안 청와대 전달해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지난 8월 9일 장총을 비롯한 한국지체장애인협회(이하 지장협), 한국농아인협회,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한국장애인부모회, 한국정신지체애호협회 등 20여 개 단체장들이 모여 장애인 단체안을 마련해 청와대 등에 제출했다.

이날 제시된 엘피지 제도의 개선안을 요약하자면 ▲국가적 차원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며 이를 위해 장애인복지조정위원회 소집 및 실무위원회를 가동하고 ▲엘피지 제도는 중증장애인(보호자 포함)에 한해 현행제도를 유지하되 3년 후인 2010년에 제도를 폐지 ▲장애수당 및 장애아동부양수당의인상과 차상위까지로의 확대 ▲차량 미소유 중증장애인(수급권자, 차상위는 제외)에게 이동수당을 지급해 형평성 문제를 해소하자고 주장했다.

이 안을 일부 수용한 보건복지부는 지난 17일 '단계적 폐지'에서 '중증장애인에 한해 3년간 유예'로 수정한 '엘피지 지원제도 폐지 및 장애수당 확대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장애인 단체 관계자는 "장애인 단체들 대부분이 '설마 줬던 것을 뺏으랴'는 안일한 생각과 어느 쪽 손을 들어주게 되더라도 비난의 목소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관망했기 때문에 지금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적극적인 대책마련을 하지 못한 장애인 단체를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의 장애계 분위기도 무척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보건복지부의 제도 개편안만을 놓고 생각하더라도 '엘피지 지원 폐지'라는 팩트도 있지만, '장애수당확대' 등의 다양한 팩트도 존재한다. 지금 상황은 다양한 변수를 놓고 어떤 쪽으로 가는 게 전체 장애인들에게 도움이 될지에 대해 살펴봐야 할 때인데 목소리 큰 사람의 뜻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몰매 맞는 분위기"라며 "지금은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장애인에게 이익이 갈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지에 대해 뜻을 모으며 슬기롭게 대처해야 할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장총, 중증장애인 중심 '이동수당' VS 장총연 경증장애인 중심 '면세'


그렇다면 이 상황을 놓고 장애인 단체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확인결과 "엘피지 지원제도 폐지에는 반대하나, 문제가 있으니 개선의 여지는 필요하다"는 견해였다.
다만 이 개선안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장총연의 입장은 한나라당과 같은 엘피지 면세추진, 즉 경증장애인의 경제활동에 무게중심을 둔 대안을 제시했다.

장총연 백혜련 실장은 "차량을 운행하는 장애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면세로의 전환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산하단체간의 이견 등 구체적인 입장조정 중이라 아직까지 구체적인 투쟁방안은 나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장총은 정부의 안을 받아들여 폐지하되 중증장애인에게는 3년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엘피지 차량을 운행하지 않는 장애인들에게 이동수당을 지급해 형평성 문제를 해소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즉 중증 저소득 장애인을 우선 생각한 대안을 제시한 것.

장총의 김동범 사무총장은 "이제 장애계도 단순히 욕구만 분출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사회적 책임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소리 내지 못하는 밑바닥 장애인을 생각해야 한다"며 "대안이나 실현가능성 희박한 '주장'은 누구인들 못하겠나. 진정으로 장애인을 생각한다면 장애인이 혜택 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범위 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에게 한 푼이라도 많은 지원이 돌아가도록 고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장애아동을 데리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 엘피지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 부모회 역시 정부의 안에 동의하고 있었다. 장애아동부양수당이 23억 원에서 414억으로 뛰는 마당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장애인부모회의 권유상 사무처장은 "수급권자 중 1급 장애아동에게만 지급하던 장애아동부양 수당이 수급권자에게는 중증 20만원, 경증 10만원이, 차상위 계층에는 중증 15만원, 경증 10만원으로 대폭 증액된다. 엘피지 지원제도를 통해 한 달에 6만 원 정도의 지출이 절감되는 것 보다 지원이 절실한 이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고 찬성했다.

이에 반해 지장협은 양쪽에 한발씩 걸쳐놓은 형국이다.
지장협 강민수 조직지원팀장은 "개인적인 입장을 밝힌다면 면세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며, 수혜 받지 못하는 장애인에게는 이동수당이 지급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공식적인 입장은 장총연과 협의 중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입장표명은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강 팀장은 "조직 전체의 안과 별도로 지장협을 비롯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한국산재노동자협회, 한국교통장애인협회 등으로 꾸려진 '장애인자동차연료면세쟁취연대'에서는 한나라당의 면세 안이 정기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는 별도로 지장협 박덕경 회장은 장총의 주도로 열린 장애인 단체 안을 마련하는 자리에 참석해 힘을 실어줬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초반에는 장총연과 한나라당 중심으로 내놓은 '면세안'이 장애계의 목소리처럼 비쳐졌다. 하지만 지금은 장총을 중심으로 20여 개 단체장이 모여 '3년 유예를 전제로 한 엘피지 지원폐지 및 이동수당 지급'을 골자로 한 새로운 안에 힘이 몰리는 형국이다.

통과 가능성 여부가 불투명한 '면세'만을 주장하느니 3년간의 유예기간 동안 '이동수당'을 쟁취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계산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3년 동안 현 제도가 계속 유지되는 만큼, 정권이 바뀌면 또 다른 정치적 고려에 의해 엘피지를 계속 지원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계산도 깔려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중증장애인, 개선안은 찬성하지만 지속될지 여부는 '글쎄?'

이번 정부의 제도개선으로 인해 많은 경우 월 15만원(서울에 거주하는 수급권 대상자인 중증장애인의 경우)까지 장애수당을 받게 될 중증장애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교통사고 때문에 장애인이 된 김 모 씨(지체 1급 수급권자, 40)는 "중증장애인야말로 차량운행이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자기직업을 갖고 일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에 있는 우리들이 유류비 외에도 적잖은 비용이 지출되는 차량을 구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또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도로로 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며 "경증장애인이 받던 혜택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쉬쉬하고 있지만,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중증장애인들이 장애수당이 확대되는 것에 대해 환영하는 눈치다"고 말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정 모 씨(뇌병변 1급 수급권자, 26)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씨는 "장애인콜택시 몇 번 타기에도 부족했던 장애수당이 실질적으로 확대된 것에 대해서는 환영한다. 하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아니라고 본다. '이동'이라는 기본권조차 제한된 상황을 놓고 다들 인식만 하고 있었을 뿐, 개선되지 않았다. 저쪽에 줬던 걸 이쪽에 줬으니, 언제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장애인 단체가 머리를 모아 장애인 이동권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따끔하게 꼬집었다.

공중파에서 방영중인 시대극의 한 장면에서 "승리를 위해서라면 작은 희생쯤은 감수해야 한다"라는 대사가 등장했다. 지금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정부와 장애인 단체들이 장애인을 놓고 힘겨루기 한판이 진행되는 동안 전투에 참전한 수많은 장애인들이 전장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과연 작은 희생을 치른다면 언젠가는 큰 대가가 장애인들에게 찾아올까.
그렇다면 그때까지 희생해야 하는 장애인의 삶은 누가 책임져 줄 것일까?
작성자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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