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에게 정의를!
일본군성노예생존자들의 끈질긴 활동가 국제적인 연대
본문
“우리는 죽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한사람이라도 남을 때까지 싸울 것이고…"
“언니야, 걱정마라. 언니 몫까지 내가 열심히 싸울 테니까 여기 일은 걱정 말고 편안히 가라!"
한 피해자는 병마와 싸움 끝에 결국은 숨을 거두면서도 죽지 않을 것이라며,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며 절규하고, 그 분 주검 앞의 생존자는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간 동료의 몫까지 다하겠노라며 울부짖는다.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시작한 싸움
'할머니'들은 일본정부가 일본군'위안부'제도에 군의 개입을 부인하고, 민간업자 짓이라며 발뺌할 때, 60평생 어느 누구에도 입을 열지 않았던 아픈 과거를 용기 있게 증언해 일본정부의 범죄를 고발하였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국에는 230명의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였다. 정말 용기 있는 고발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 반세기동안 한국사회로부터 '죄인 아닌 죄인'으로 낙인찍혀 음지 속에서 살아온 피해자들이다.
“과거 역사에 대해서 증언을 한 그 날에는 밤에 악몽을 꿔요. 일본군인들이 나한테 덤벼들고, 나는 발버둥치고 그러느라 잠을 자도 잠을 자는 게 아니에요. 눈을 뜨고 있어도 꿈을 꾸는 것처럼 과거역사가 눈앞에 영화처럼 펼쳐져요. 얼마나 끔찍한지."
“모두들 나를 두고 손가락질을 해요. 그럴 때는 정말 죽고만 싶죠. 그래도 알아야 하니까, 일본군인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래서 부끄럽고 괴롭지만 신고를 했어요."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이제 생존자들은 70대 후반에서 9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고, 한 분 두 분 사망하여 현재는 124명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남아있는 분들도 대부분 일본군성노예 시절의 성적학대로 인한 자궁질환, 매독, 성병의 후유증으로 육체적․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으며, 가임기의 임신을 피하기 위해 강제로 투약했던 약물(살바르산, 일명 606주사)로 인한 피해로 환각․환청, 히스테리 등의 정신질환과 피해의식, 불면증 등 숱한 질병과 싸우며 나날이 살고 있다.
현재 생존자 124명, 그러나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할머니들이 요구하고 바라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이고 평범한 것이다. 일본정부가 자신들에게 저지른 행위가 범죄였음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 법적인 책임을 이행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92년부터 시작한 수요정기시위가 벌써 15년째다. 지난 15년동안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은 언제나 수요시위 맨 앞줄에 섰다. 대구에서 인천에서 서울에서 광주 나눔의 집에서 또 때로는 부산에서 통영에서 마산에서 대전에서 할머니들은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서울 일본대사관 앞으로 모였다.
미국, 독일, 호주, 캐나다, 스위스, 일본 등 일본정부의 범죄를 고발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를 만들기 위해서 팔십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석했다. 한국정부가 외교 보호권을 행사하지 않아서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외교통상부의 적극적인 해결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 외교통상부 앞 생존자 1인 시위도 지난 6월부터 시작하였다.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국제기구 권고를 무시하는 일본
1990년 11월 16일, 정대협이 발족된 이후 15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남북연대와 아시아피해국 여성연대로 힘을 모아, 여성인권문제로 유엔인권소위원회와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소하여 사죄와 법적 배상 권고를 받아냈다. 비인도적인 범죄, 전쟁범죄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라고 한국정부에 요구했고, 일본 시민들이 적극 나서서 일본사법부에 소송을 건지도 15년이 지났다. 미국법원에 일본 기업과 정부를 제소하기도 하였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로써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협약을 위반한 사례로 ILO(국제노동기구)에 제소했고,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제소했으며, 일본 검찰청에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고소․고발장 냈고,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어 히로히토 일 국왕 유죄판결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한 사건이 끝날 때마다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권고가 나왔고, 생존자들은 일본정부가 그 권고들을 받아들일 것을 희망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온갖 노력을 했지만 요지부동인 일본정부를 보면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벽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 매번 절감한다.
그러나 생존자들과 우리들은 늘 새로운 곳을 찾아 활동한다. 지난 해 광복60주년을 보내면서 기어코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해방을 안겨주자며 활동했지만 결국은 해결하지 못했다. 해방 61주년인 올해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하며 세계 각지에 새 친구들을 만드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광복 60주년인 8.15를 앞둔 8월 9일 721차 수요시위에는 미국과 유럽,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 전세계 30 여 개 국에서 “일본군'위안부'에게 정의를!" 구호가 울려 퍼졌다. 국제 엠네스티가 여성폭력 중단 국제캠페인의 하나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택하면서 세계는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논의할 때마다, 전쟁과 평화문제를 생각하고, 여성폭력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함께 논의하였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모든 폭력에 평화의 깃발을 꽂다
2006년 올 한 해 동안 또 일본정부가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간다 해도 실망하거나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또새로운 문제들과 연대하고 친구들을 만들며우리 활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유 역시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의 외침에서 듣는다.
“우리가 돈 땜에 이러는 게 절대로 아니여, 우리가 배상받아봤자 그거 어떻게 쓰고 죽겠어. 당장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알 수 없는 늙은이 인생인 디.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말이여, 우리들은 이렇게 몸이 절단 났지만, 우리 일생은 이미 망가져서 제대로 사람답게 살수 없었지만 이렇게 예쁜 우리 손주들은 우리처럼 되어서는 안되는 거, 그것 땜에 우리가 이렇게 포기 안하는 거라고."
이래서 우리 할머니들은 평화운동 교과서고, 상징이고, 또 우리 미래 세대들의 희망이고, 주춧돌이다. 일본군 성노예라는 인류역사상 전례 없는 범죄에 대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모든 폭력, 인권유린에 평화의 깃발을 꽂아야 한다. 오늘도 전쟁을 하고 있는 범죄자들, 자기가 자행하면 그것이 범죄가 아니라 평화라며, 인권수호라고 주장하는 자들, 그렇게 웃으면서 전쟁을 통한 살인을 범하고 있는 자들의 가슴에 평화의 깃발을 꽂아야 한다.
글 윤미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총장)
★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에 연대하고 있는 아시아, 유럽, 미주 등지의 여성들과 시민들도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지칭할 때 '할머니'라는 말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고 있으며, 영어로 사용할 때도 Halmuny, Grandma 로 번역하고 있다..
“언니야, 걱정마라. 언니 몫까지 내가 열심히 싸울 테니까 여기 일은 걱정 말고 편안히 가라!"
한 피해자는 병마와 싸움 끝에 결국은 숨을 거두면서도 죽지 않을 것이라며,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며 절규하고, 그 분 주검 앞의 생존자는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간 동료의 몫까지 다하겠노라며 울부짖는다.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시작한 싸움
'할머니'들은 일본정부가 일본군'위안부'제도에 군의 개입을 부인하고, 민간업자 짓이라며 발뺌할 때, 60평생 어느 누구에도 입을 열지 않았던 아픈 과거를 용기 있게 증언해 일본정부의 범죄를 고발하였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국에는 230명의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였다. 정말 용기 있는 고발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 반세기동안 한국사회로부터 '죄인 아닌 죄인'으로 낙인찍혀 음지 속에서 살아온 피해자들이다.
“과거 역사에 대해서 증언을 한 그 날에는 밤에 악몽을 꿔요. 일본군인들이 나한테 덤벼들고, 나는 발버둥치고 그러느라 잠을 자도 잠을 자는 게 아니에요. 눈을 뜨고 있어도 꿈을 꾸는 것처럼 과거역사가 눈앞에 영화처럼 펼쳐져요. 얼마나 끔찍한지."
“모두들 나를 두고 손가락질을 해요. 그럴 때는 정말 죽고만 싶죠. 그래도 알아야 하니까, 일본군인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래서 부끄럽고 괴롭지만 신고를 했어요."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이제 생존자들은 70대 후반에서 9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고, 한 분 두 분 사망하여 현재는 124명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남아있는 분들도 대부분 일본군성노예 시절의 성적학대로 인한 자궁질환, 매독, 성병의 후유증으로 육체적․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으며, 가임기의 임신을 피하기 위해 강제로 투약했던 약물(살바르산, 일명 606주사)로 인한 피해로 환각․환청, 히스테리 등의 정신질환과 피해의식, 불면증 등 숱한 질병과 싸우며 나날이 살고 있다.
현재 생존자 124명, 그러나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할머니들이 요구하고 바라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이고 평범한 것이다. 일본정부가 자신들에게 저지른 행위가 범죄였음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 법적인 책임을 이행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92년부터 시작한 수요정기시위가 벌써 15년째다. 지난 15년동안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은 언제나 수요시위 맨 앞줄에 섰다. 대구에서 인천에서 서울에서 광주 나눔의 집에서 또 때로는 부산에서 통영에서 마산에서 대전에서 할머니들은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서울 일본대사관 앞으로 모였다.
미국, 독일, 호주, 캐나다, 스위스, 일본 등 일본정부의 범죄를 고발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를 만들기 위해서 팔십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석했다. 한국정부가 외교 보호권을 행사하지 않아서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외교통상부의 적극적인 해결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 외교통상부 앞 생존자 1인 시위도 지난 6월부터 시작하였다.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국제기구 권고를 무시하는 일본
1990년 11월 16일, 정대협이 발족된 이후 15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남북연대와 아시아피해국 여성연대로 힘을 모아, 여성인권문제로 유엔인권소위원회와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소하여 사죄와 법적 배상 권고를 받아냈다. 비인도적인 범죄, 전쟁범죄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라고 한국정부에 요구했고, 일본 시민들이 적극 나서서 일본사법부에 소송을 건지도 15년이 지났다. 미국법원에 일본 기업과 정부를 제소하기도 하였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로써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협약을 위반한 사례로 ILO(국제노동기구)에 제소했고,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제소했으며, 일본 검찰청에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고소․고발장 냈고,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어 히로히토 일 국왕 유죄판결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한 사건이 끝날 때마다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권고가 나왔고, 생존자들은 일본정부가 그 권고들을 받아들일 것을 희망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온갖 노력을 했지만 요지부동인 일본정부를 보면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벽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 매번 절감한다.
그러나 생존자들과 우리들은 늘 새로운 곳을 찾아 활동한다. 지난 해 광복60주년을 보내면서 기어코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해방을 안겨주자며 활동했지만 결국은 해결하지 못했다. 해방 61주년인 올해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하며 세계 각지에 새 친구들을 만드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광복 60주년인 8.15를 앞둔 8월 9일 721차 수요시위에는 미국과 유럽,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 전세계 30 여 개 국에서 “일본군'위안부'에게 정의를!" 구호가 울려 퍼졌다. 국제 엠네스티가 여성폭력 중단 국제캠페인의 하나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택하면서 세계는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논의할 때마다, 전쟁과 평화문제를 생각하고, 여성폭력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함께 논의하였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모든 폭력에 평화의 깃발을 꽂다
2006년 올 한 해 동안 또 일본정부가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간다 해도 실망하거나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또새로운 문제들과 연대하고 친구들을 만들며우리 활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유 역시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의 외침에서 듣는다.
“우리가 돈 땜에 이러는 게 절대로 아니여, 우리가 배상받아봤자 그거 어떻게 쓰고 죽겠어. 당장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알 수 없는 늙은이 인생인 디.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말이여, 우리들은 이렇게 몸이 절단 났지만, 우리 일생은 이미 망가져서 제대로 사람답게 살수 없었지만 이렇게 예쁜 우리 손주들은 우리처럼 되어서는 안되는 거, 그것 땜에 우리가 이렇게 포기 안하는 거라고."
이래서 우리 할머니들은 평화운동 교과서고, 상징이고, 또 우리 미래 세대들의 희망이고, 주춧돌이다. 일본군 성노예라는 인류역사상 전례 없는 범죄에 대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모든 폭력, 인권유린에 평화의 깃발을 꽂아야 한다. 오늘도 전쟁을 하고 있는 범죄자들, 자기가 자행하면 그것이 범죄가 아니라 평화라며, 인권수호라고 주장하는 자들, 그렇게 웃으면서 전쟁을 통한 살인을 범하고 있는 자들의 가슴에 평화의 깃발을 꽂아야 한다.
글 윤미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총장)
★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에 연대하고 있는 아시아, 유럽, 미주 등지의 여성들과 시민들도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지칭할 때 '할머니'라는 말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고 있으며, 영어로 사용할 때도 Halmuny, Grandma 로 번역하고 있다..
작성자윤미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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