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붕어빵 아버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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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그와 나는 외모가 많이 닮았다. 어릴 때는 심하다 할 정도로 닮아 붕어빵 소리를 들으며 컸었다. 그러나 그와 난 성격이 극과 극이라고 표현해야 할만큼 다르다. 단순히 다른 것이 안라 성격이 서로 맞지 않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난 아버지와 다툼이 많았고 자연히 우린 다정다감한 부녀사이가 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분이시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딸이 태어났으면 하고 바라셨단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을 때 그 분은 너무나 좋아하셨고 한밤중에 내가 울면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셔서 달래고 기저귀 가는 일은 그분 전담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뻐하던 당신의 딸이 골형성부전증이란 것을 아시게 되면서 난 아버지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많이 아프면서 지냈던 시절이었지만 어릴 때의 나는 행복했었다.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나보다 더 큰 개를 말처럼 타고 다니면서 친구들과 노는데 정신이 팔려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엄마 속을 많이 썩히는, 여자아이치곤 극성스런 아이였다. 그러나 병원을 드나드는 일이 반복되고 걸어다닌 시간보다 누워있거나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난 어쩔 수 없는 욕구불만 때문에 이유 없는 심술과 투정이 심했다.
자라면서 점점 나의 상태는 나빠졌고 서서히 내게 지치신 아버지는 오랫동안 내가 이해할 수 없었고 원망스러워 했던 모습을 보이셨다. 그때 일로 불과 10살 안팎의 어렸던 나는 더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아버지에게 쌀쌀맞은 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집에서는 다정한 말도 없는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언제나 내게 물질적인 선물을 주는 것을 좋아하셨다. 예를 들면 12살 때 큰댁에서 사촌언니의 피아노를 보고 지나가는 말로 피아노 얘기를 했는데 다음날 커다랗고 까만 피아노가 집으로 배달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난 뭔가를 원할 때면 직접 조르지 않고 ‘...이 있었으면..’ 이란 말 한마디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철없이 그 방법을 많이 이용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꼭 필요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질 못했다. 지금은 장애아를 위한 조기교육시설이나 정보가 많아지고 있는 편이지만 그 시절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의 부모님도 장애에 대한 정보나 교육에 관한 의지가 없으셨다. 아버지는 장애를 가진 딸이 부끄러워 남들 앞에서 숨기거나 하진 않았지만 날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 어떤 환경이 내게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셨고 그저 다시 아프지 않고 하루하루 사는,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것 같다.
자라면서 난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시간들이 죽고 싶을만큼 지겨웠다. 난 변화를 바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어떤 것을 찾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그런 욕구를 모르고 계셨고 나 역시 아버지에게 터놓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서야 교육을 받고 대인관계를 넓혀가면서 난 하나씩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고 그런 모든 것은 아버지와 부딪히는 일이 됐다.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고, 차를 운전해서 돌아다니고 싶은 날, 이해 못하시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설명하고 때론 언성높여 싸우고 단식투쟁으로 대항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마지막에는 지셨다. 그렇게 얻는 것으로 난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고 내 인생을 결정하는 어떤 일에도 아버지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는 그런 고약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사회가 얼마나 험하고 냉정한 곳인데..’ 라는 아버지의 걱정스런 말에 난 자존심 상해하고 내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넘어져 다쳐도 아버지 앞에선 아프다고 말도 못했다.
어쩌면 나는 혹시라도 아버지가 날 부끄럽게 여기실까봐 그것이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속 깊은 대화나 다정한 부녀사이는 기대하지 않고 나 역시 그것을 바꿔보려는 노력같은 건 하지 않으면서 지내온 저 서른살이 넘은 지금에야 내가 모르던 그분의 깊은 마음을 보고 난 놀라고 당황했다.
언젠가 집에 찾아왔던 아버지의 부하직원이 나에 대해 너무 상세하게 아는 것에 놀랐었는데, 그분 말이 아버지가 직장의 주변 동료들에게 내 얘기를 많이 하고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난 아버지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남들에게 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다니시는지를 전혀 몰랐었다. 아니 관심조차 없었다고 말해야 옳은 것이다.
작년 말에 당신이 반평생 넘게 일하신 곳에서 퇴직하신 후 머리가 더욱 희어지고 지쳐 보이시는 아버지. 얼마 전에 집에서 독립한 나에게 ‘너 아빠랑 같이 살기 싫어서 나가는 거지? 하지만 어떤 남자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도 이 아빠만큼 널 사랑할 수는 없을거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그 말씀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곁에서 떨어져 살면서야 비로서 그분의 고뇌와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나의 아버지를 위해서 난 나의 요술방망이를 사용하고 싶다. 그분에게 실망스럽지 않은 내가 되고 그분이 건강하고 즐겁게 생활하실 수 있도록..
글/ 김영애 (한국통신 재택전화교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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