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장애우 이야기] 서울 거리 턱을 없애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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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석 님이 세상을 등진지 14년이 지난 올해 4월 11일부터 장애우 구역에 일반차량을 주차했을 때 20만원의 과태료부과와 공공시설을 신설하거나 증개축 할 때 기준에 따른 장애우 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으면 3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장애인, 노인, 임산부등편의증진보장에관한법률’이 시행됩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 법 시행이 하늘나라에 있는 김순석 님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편집자주)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두 다리를 못 써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했던 어느 30대 장애인이 서울시장에게 보내는 이런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19일 오전 10시 서울 강동구 마천 2동 104-6 지하 셋방 한구석에서 음독자살한 김순석(34)의 품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스스로 부딪쳐보지 못하고 피부로 못 느껴본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편지지 5장을 검은색 볼펜으로 빽빽하게 채운 그의 유서에는 30년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살아온 슬픔이 구절구절 적혀 있었다.
“택시를 잡으려고 온종일을 발버둥치다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휠체어만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고 마는 빈택시들과 마주칠 때 마다 가슴이 저렸습니다.”
셋방 옆 추녀 밑에 꾸민 3평 남짓한 작업장에서 머리핀, 브로치, 반지, 목걸이 등 각종 액세서리를 만들어 남대문시장 상가에 팔아온 김씨는 주문을 받으러 사나흘에 한 번 꼴로 시내 나들이를 할 때마다 자신이 앉은 휠체어를 원망했다고 했다.
행상 리어카나 좌판들이 빽빽이 들어찬 남대문시장 골목길을 휠체어를 몰며 비집고 들어서야 하는 김 씨는 그때마다 뒤통수에 와 닿는 모멸과 신경질을 참아내야만 했다.
“그까짓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리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져보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 놓았습니다. 시장님 을지로의 보도블럭은 턱을 없애고 경사지게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밖에는 시내 어느 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혀 씨름을 해야 합니다. 또 저같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화장실은 어디 한군데라도 마련해 주셨습니까?”
지난해 7월에는 김씨가 공구를 빌리러 성수동을 찾아 나섰다가 교통순시원의 단속에 걸려 이튿날 새벽에야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고도 했다. 단속 이유는 무단횡단, 횡단보도 쪽은 노견턱 때문에 길을 건널 수 없어 인도와 차도가 경사로로 이어진 곳으로 돌아 길을 건너려다 단속원의 눈에 적발되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집에 돌아온 그이는 공구와 공들여 만들어 놓은 금형이며 제품을 마구 때려 부쉈습니다. 마치 미쳐버린 듯 했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김 씨를 8년간 뒷바라지 해온 부인 김동심(34) 씨는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또 다시 어깨를 들먹였다.
부산 태생인 김순석 씨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18세 때인 70년, 5살 때 갖게 된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저는 김씨였지만 남다른 손재주로 서울 강동구 거여동의 조그만 액세서리 공장에서 9년간 일해 오면서 공장장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김 씨에게 액운이 닥친 것은4년 전인 80년 10월, 교통사고로 두 다리에 모두 철심을 박아야 했고 3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남겨진 것은 휠체어 한 대 뿐이었다.
작년 4월 퇴원한 김 씨는 그러나 부인 김 씨의 격려로 다시 작업대에 매달릴 수 있었다.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끼리 모여 일하는 어엿한 공장을 차려 보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액세서리 상점마다 찾아다니며 새로 개발한 금형의 모형을 내보였지만, 휠체어에 탄 김 씨에게 선뜻 일을 맡기는 이는 많지 않았다. 겨우 주문을 받아내도 웬일인지 상인들은 남 보다 아주싼 값으로 계약하려 들었다.또 겨우 확보한 거래처도 막상 대금을 지불할 때면 다음 번 계약을 끊어버리겠다며 은근히 가격을 낮추도록 강요하기 일쑤여서 이를 두고 늘 고민해 왔다는 게 부인의 얘기였다. 지난 달 말에는 가격문제로 거래상인과 대판 다툰 끝에 거래가 끊겨버려 보름여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지난 15일 집을 나섰다. 새로운 거래처를 뚫어 보겠다며 결혼예물인 금목걸이를 전당포에 맡겨 10만원을 들고 나간 김 씨는 사흘만인 지난 17일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사흘간의 행적에 대해 입을 열지 않던 김 씨는 19일 오전“장애인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합니다.대우를 받아도 끝내는 이용당합니다. 조그마한 꿈이라도 이뤄보려고 애써봤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사회는 저를 약해지게만 만듭니다”는 마지막 외침을 남긴 채 자살한 것이다.
부인 김 씨는 20일 오후 장의차가 화장장으로 향하기 직전 남편의 유서를 구겨들고 “누가 장애인들에게 사람대접을 해주었습니까”라고 흐느꼈고, 다섯살박이 외아들 경남군은 영문을 모르는 채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엄마 울지마”라고 칭얼대 주위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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