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다시는 널 버리지 않도록 엄마가 꼭 네 곁에 있을게”
본문
한국 사람들의 핏줄에 대한 집착은 뿌리 깊다. ‘우리 가족, 내 아이’의 틀에 갇힌 사랑은 국내 입양 시 대부분 혈족계승을 위한 비밀입양을 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입양아를, 그것도 장애아를 입양해 키운다는 일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입양과 장애우에 대한 편견, 정부의 부족한 지원 속에서도 가정이 필요한 장애아동을 입양해 소중한 자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키우는 가정들이 있어 직접 찾아가 보았다. 이들은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을 조금은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이며 조심스럽지만 장애아동 입양의 미래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점칠 수 있게 한다.
작년 국내 입양 1686명 장애아 입양은 18명뿐
우리나라의 장애아 입양 현실은 너무나 부끄럽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00년 장애아 국내 입양은 전체 국내 입양 1,686명중 1.07%인 18명이었다. 같은 해 장애아 해외입양은 2,360명 중 26.8%인 634명으로 국내 입양 장애아보다 35배 이상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국내 가정의 장애아 입양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점이다. 98년 국내 입양아 1,426명 중 장애아는 6명(0.4%)이었지만, 99년 국내 입양아 1,726명 중 장애아 14명(0.8%), 2000년에는 1.06%로 장애아의 국내 입양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성가정입양원이나 홀트아동복지회 관계자들은 “장애의 개념이 협의에서 포괄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나마 확률 수치가 조금 높아졌을 뿐이지, 사실상 우리나라의 입양은 혈족 계승 개념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입양기관을 통해서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 장애아를 입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나마 장애아동들이 가정을 찾아가는 경우는 시설에서 머물다가 그곳에서 자원활동을 하거나 위탁해서 기르던 가정에 입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현행법상 장애아를 입양한 가정에 대해서는 월 20만원의 생활비와 연 40만원까지 의료비가 지원된다. 하지만 장애아 입양 가정이 월 평균 50여만 원에서 200만원까지 의료비 등의 추가 생활비를 지출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부 지원액은 턱 없이 적은 액수다. 결국 양부모들이 입양한 자녀의 치료비 등을 포함한 수백만 원의 과중한 양육비 부담을 지게 되는 현실도 국내 입양 활성화의 걸림돌 중 하나다.
국내에서 장애아 입양이 활성화되는데 더 큰 장애는 사회적인 분위기이다. 홀트아동복지회 사회사업부 김돈영 부장은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장애우가 살아가기에 버거운 사회 환경이 우선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태에서 태어난 우리 딸들
대전에 살고 있는 신주련, 전창걸 부부는 하영이와 아영이를 입양하여 기르고 있다. 이 중에 둘째 딸 아영이는 뇌기형 장애가 있어 이들 부부는 아영이의 치료에 정성을 쏟고 있다.
장애우들에게는 너무나 척박한 우리 사회에서 장애아를 입양하여 키우는 신씨 부부는 어떤 사람일까. 그들은 어릴 때부터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다. 신씨는 고향인 부산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81년 은행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원활동에 눈을 떴다. 직장 동료들과 자원활동을 하며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여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재활원·고아원 등을 다니며 그들에게 밥도 먹여주고 몸도 닦아주고 함께 어울려 놀았다. 그것이 즐거웠고 작은 행복이었다. 그러던 중 여동생 남자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 당시 경성대 3학년이었던 남편도 청년시절부터 교회 자원활동을 많이 해왔다. 그들은 87년 9월 결혼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대전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남편 전씨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끼니도 잇지 못했던 어린 시절 기억 때문에 더 이상 자녀를 갖기를 원치 않았다. 그 대신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운영하자고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IMF 경제위기 때 많은 아이들이 버려지는 것을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알고 괴로웠다고 했다. ‘입으로만 입양을 얘기했지 행동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거죠. 그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고아원이라는 시설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정이 필요한 아이를 한 명이라도 데려와 기르자고 말했죠.“
그들의 아름다운 꿈은 98년 5월 하영이의 입양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아영이는 그들의 두 번째 꿈이다. 피를 나눈 자식은 아니지만 이 부부는 두 아이를 “다른 사람의 태에서 태어난 우리 딸들”이라고 말하면서 주변사람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굳이 입양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공개 입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가 발견되었다고 해도 소중한 내 자식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어
이들 부부가 처음 입양할 때부터 아영이의 장애를 알았던 것은 아니다.
아영이가 신씨 가정에 입양된 것은 2000년 3월. 아영이는 미혼모의 아이였다. 34주만에 태어난 미숙아로 몸무게가 2.4kg이었던 아영이는 처음부터 힘들었다. 너무 많이 울어 아파트 이웃 주민들로부터 많은 불평을 들어야 했다. 눈도 사시고, 숨도 몰아쉬고, 몸도 뻣뻣하고, 잠도 안 자고··· 아영이 때문에 편안하게 잠드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입양 뒤 잔병치레 한번 없이 튼튼하게 자란 하영이와는 달리 아영이는 유난히 발달이 늦고 7개월이 다 되도록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느낀 아영이 엄마는 뇌성마비가 아닐까 염려해 백방으로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결국 지난해 10월 홀트에서 알선한 병원에서 ‘선천성 뇌기형’ 진단을 받았다.
“태중에서 3개월 안에 뇌가 만들어지는데 아마 그 시기에 산모가 약물을 복용한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병원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앞이 캄캄했습니다.”
간질, 행동장애, 정신장애, 언어장애···. 아영이의 장애는 심각했다. 게다가 병원에서 아이가 이 상태라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말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엄마는 안타까움에 대성통곡을 했지만 ‘끝까지 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아영이 아빠도 같은 마음이었다.
“아이가 몸이 아파 당장 내일 하늘로 간다고 해도, 곁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닙니까? 더군다나 아이들은 36개월이면 뇌의 형성이 끝나기 때문에 그 전에 집중적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까 맘이 더 급해져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더라구요.”
아영이의 장애를 알게 된 이후 한 달간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주변 이웃은 물론 친지까지 물론 이웃까지 감당 못 할 짐을 지지 말고 파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신씨를 설득했다. 친정어머니의 식음을 전폐한 ‘간절한 설득’이 특히 가슴을 아리게 했다.
장애우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은 아직도 심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적지 않은 장애아들이 버려지는 황량한 세상에 살고 있다. 장애아란 이유로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사람까지 있지 않은가. 흔들리는 신씨의 마음을 되잡아 준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하루는 말없이 저녁밥을 꾸역꾸역 먹던 남편이 ‘아영이를 절대 돌려줄 수 없다’며 울먹였습니다. 그날 우리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주변에서는 파양 이야기를 비치기만 해도 “내 자식을 어떻게 버리느냐”며 벌컥 화를 내는 두 사람의 태도를 보고 아무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음을 수습한 신씨 부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저곳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니며 아영의의 치료에 매달렸다. 신씨 부부는 요즘도 매주 두 번씩 아영이를 안고 서울까지 통원치료를 다니고 있다. 한달에 200만원 남짓한 남편의 월급은 아영이의 치료비에 대부분 쏟아 붓는다.
왼쪽 뇌가 거의 없는 아영이를 키우는 일은 하루하루 사투에 가깝다. 태어난 지 1년이 다 되도록 목을 제대로 가누지도, 몸을 뒤집지도 못하는 아영이. 신씨 부부는 아영이가 아파 보챌 때마다 2교대로 잠을 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물리치료를 받은 지 다섯 달 정도 지난 2월부터 아영이가 고개를 가누기 시작했다. 꼭 틀어쥐고만 있었던 주먹도 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도 한다. 뇌신경이 없는 탓에 분유를 삼키기조차 어려웠지만 요즘은 분유도 잘 받아먹고 가끔 이유식도 한다.
아영이는 너무나 힘겹게 자라고 있지만 신씨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신씨는 재활치료를 받으며 아영이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그래도 힘들 때가 많다. 신씨도 보통사람들의 편한 생활을 동경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편하게 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저도 사람인 걸요. 젊은 시절부터 재활원에서 장애아동을 많이 만나긴 했지만 사실 제가 그 아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입양할 당시에도 건강한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어요. 내가 용기가 없어서 장애아 입양을 망설인 걸아시고 하나님이 저를 크게 쓰시기 위해 아영이를 맡겨주신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아영이 키우면서 아이를 통해서 제가 그 동안 모르고 있던 세상을 많이 알게 됐어요. 예를 들면 얼마 전에 홀트에서 특수휠체어를 대여해서 외출을 했는데 보도블럭의 턱과 수많은 계단들 때문에 휠체어를 들어서 옮기면서 ‘아, 우리나라는 장애우들이 나올 수 없도록 사회가 만들어 놓았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재활병동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퇴원 후에도 또 다른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 거로구나’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나라의 장애현실에 눈떠가고 있죠.”
현재 호텔에서 경리업무를 담당하는 전창걸 씨는 작년 11월 아영이의 치료를 위해서 사표를 냈다가 올해 2월 다시 복직을 하기도 했다. 직장이야 다시 구하면 되지만 아이의 치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신주련 씨 가족은 아영이의 치료 때문에 뿔뿔히 흩어져 지내고 있다. 아빠와 큰아들 현찬이는 대전에서, 둘째 하영이는 부산의 외가댁, 그리고 엄마와 아영이는 치료를 위해 경기도 일산에서 지내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남편의 직장을 아영이의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옮기려고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내놓고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가족들 모두가 고생스럽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신주련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입양은 다른 사람의 태를 빌려 내 아이를 얻는 출산입니다. 입양 후 몸의 이상이 발견되더라도 소중한 내 자식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부모로서 아이를 위해서 당연히 이 정도야 감수해야죠.”
3년 돌봐온 손현숙 씨 가정서 입양한 뇌성마비 장애아 지인이
인천시 부평구 산곡1동 손현숙씨네 집에 지난 4월 17일 네 살 박이 장애아 지인이가 새 식구가 됐다.
손현숙 씨가 지인이를 처음 만난 건 지난 98년 가을이었다. 경기도의 한 중증장애우시설에 봉사활동을 갔던 손현숙(여·46)씨는 그곳에서 생후 10개월 된 지인이를 만났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뇌성마비 2급 장애아 지인이는 몸의 왼쪽에 마비 증세가 있었다.
생후 3개월에 부모로부터 버려져 장애우생활시설에서 보호받던 지인이는 손씨네 집으로 오기 전에는 왼팔과 다리를 펴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래아이들처럼 걷고 성격도 매우 활달해졌다. 손씨의 눈물나는 치료 덕이다.
“처음 봤을 때 지인이는 옆으로 기어 다녀서 온 몸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어요. 생후 열달이면 기고 일어설 때지만, 지인이에겐 모든 것이 불가능했죠. 그런데 참 이상하죠.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 아이가 옆에 있는 아이에게 우유병을 물려주더라구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첫눈에 지인이는 내 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랑은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빛깔로 찾아오는 것 같아요.”
며칠 후 손씨는 지인이가 있는 장애우시설을 다시 찾았다. 지인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아들(당시 16세)과 딸(당시 15세)이 어머니와 동행했다. 그곳에서 이들은 지인이에게 밥을 먹여주고 업어주고 또 이야기를 해 주며 시간을 보냈다. 손씨네 가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인이를 찾았다.
“처음부터 내 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자주 만날수록 조금씩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지인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 키워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인이가 지내던 시설에 말씀을 드렸더니 원장선생님이 그럼 위탁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 하시더군요.”
1999년 5월, 결국 아쉬운 대로 한 달에 1주일씩 지인이를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처음에는 일주일, 열흘이던 것이 차츰 정이 들면서 지인이는 거의 대부분 손씨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정이 드는 이유도 있었지만 점점 굳어지는 지인이의 근육을 보면 치료 때문이라도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게 정성으로 아이를 돌보다가 지인이가 시설로 다시 돌아가고 나면 손씨는 아이가 눈에 밟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비단 손씨 뿐 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 지인이가 시설로 돌아가고 나면 일주일씩 말을 잃을 정도로 지인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결국 현숙씨의 집에서는 ‘지인이 문제’를 놓고 가족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여의치 않았다. 경기도 반월 공단 내 동부정밀화학의 생산과 주임으로 근무하는 남편의 빠듯한 월급, 19평의 조그마한 집, 당시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는 아들과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딸···
손씨가 지인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한 건 가족들의 힘이 크다. 손씨는 ‘등대’라는 봉사단체에서 독거노인들과 고아원, 장애우시설 등의 자원봉사 경력 15년째이고, 아이들 역시 7년간 손씨와 함께 봉사를 했으니 지인이를 식구로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 결정은 아닐 법도 하다.
그러면서 손씨는 ‘지인이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근육이 점점 마비되어 가는 지인이를 위해 손씨는 물리치료사를 집으로 불렀고,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지인이에게 1시간 이상씩 특수신발을 신겨 모래밭에서 걷게 했다. ‘언어장애가 있는 아이에게는 말을 많이 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종일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런 손씨의 지극정성인 사랑이 지인이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갈지자로 걷던 지인이는 2년 6개월 동안 꾸준히 치료를 받고 열심히 연습한 결과 이제 어색하지 않게 걷고 뛰어다닌다.
아직 말을 잘하지 못하지만, 한마디를 가르치기 위해서 백번도 더 반복하는 엄마의 노력을 알기라도 하듯이 어느 정도의 의사 표현은 가능하다. 무엇보다 이젠 지인이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지인이 덕분에 행복한 아빠. 엄마 되었어요
장애 아이를 키우다보니 치료비도 많이 들고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주변에선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이면 장애 아이를 데려다가 키우려고 하느냐고 하기도 했어요. 친정 언니도 여태까지 시아버님 모시느라 고생하다가 이제 겨우 여유있게 살게 됐는데 왜 굳이 힘든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말렸지요. 한때는 저도 ‘지인이가 복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장애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나 자신이 교만해진 거죠. 하지만 요즘은 ‘복 많은 사람은 나’하고 확신해요. 지인이가 없었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 화목해지진 않았을 거예요. 하루에 열 마디도 안 하던 남편이 얼마나 아이 앞에서는 말이 많아지는지··· 남편은 지인이를 키우면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고 해요. 또 가족들이 지인이로 인해 모이는 자리가 많아졌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현실상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한달에 지인이에게 들어가는 물리치료비만도 50만원이 넘고 집에서 꽤 떨어진 계산동에 있는 복지관까지 택시를 타고 거의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가끔은 골목 안에 있는 아파트 단지까지 가자고 하면 투덜거리는 기사 때문에 맘이 상하는 일도 있다. 어떤 날은 몸이 안 좋은데 아이가 떼쓰고 조르면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주변에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과 맞닥드릴 때면 입양할 때 기쁜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막막해지기도 한다. 오히려 이런 순간마다 아이들이 “지인이가 맘대로 부릴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면서 손씨를 위로한다.
현숙 씨의 큰 아들은 지금 나사렛대학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다. 아들 또한 자신이 크면 오빠로서 지인이를 평생 돌보며 키우겠다고도 말해 손씨를 흐뭇하게 했다. 손씨의 딸 역시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지인이를 부르면서 수다를 떤다. 하지만 정작 걱정되는 건 지인이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얼마 전에는 유치원이나 놀이방에 보내보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닌 적이 있어요. 그런데 찾아가는 곳마다 ‘연락 드릴게요’라고 말만 할뿐 어느 곳에서도 지인이를 맡아 교육하겠다는 곳을 찾을 수 없더라구요. 어렵게 아는 분을 통해서 놀이방에 4개월 동안 보냈는데 선생님이 지인이는 자기의지가 강한 아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물리치료 받을 때도 스스로 하려는 의지를 보여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오리고 붙이는 걸 좋아하는 걸 보면 미술 쪽에 소질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우리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되지 않을까 걱정돼죠. 혹시라도 언어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수화를 가르쳐서라도 사회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아이로 키울 거예요. 비록 3개월 만에 세상 밖으로 버려졌지만, 세상이 다시는 지인이를 버리지 않도록 제가 끝까지 지인이 곁에 있을 거예요.“
엄마, 아빠, 언니를 부르며 조르기도 하고 재롱을 떠는 지인이가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밝고 맑게 커주는 게 손씨의 가장 큰 소망이다.
해외 입양 장애아 ‘애덤 킹’이 아닌 국내 입양 장애아 ‘오인호’로 마운드에 설 수는 없었을까?
지난 4월 서울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 경기장의 스타는 시구를 한 아홉 살의 애덤 킹(한국명 오인호).
95년 미국으로 입양될 때 4세였던 킹군은 선천적으로 다리가 썩어가는 희귀 질병과 양손 손가락이 붙은 중증장애를 가졌지만 이날 야구장의 그는 금속제 의족으로 걸어서 씩씩하게 공을 던졌다.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와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맑고 밝은 웃음과 구김살 없는 표정으로 3만여 명의 관중 앞에 섰다.
그런데 해외 입양 장애아 킹군이 아니라 국내 입양 장애아 오인호군으로 마운드에 설 수는 없었을까? 낳은 자녀 3명과 함께 8명의 입양 자녀(6명은 장애우)를 키우는 양부모 킹씨의 모습은 장애아를 낳으면 내다 버리거나 해외로 입양시키기에 바쁜 우리나라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애아 양육을 위한 사회적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미국과 우리나라의 장애아 부모들을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장애우가 비장애우들과 차별받지 않으며 당당하게 사회의 주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법으로 보장하고 있고, 장애아동을 양육한다고 해서 비장애아동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할 필요도 없는 나라. 또 장애를 가진 아동을 자식으로 두었다는 것 때문에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필요도 없는 나라. 그런 나라의 장애아 부모들과 우리나라의 부모들을 어떻게 단순히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오인호’가 아닌 ‘애덤 킹’으로 시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까지도 위협하는 주위의 벽들이 너무나 높고 험하기 때문이다.
핏줄에 대한 집착, 입양에 대한 편견, 그리고 정부의 부족한 복지정책 등은 장애 아동입양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장애우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다. 킹군이나 ‘오체불만족’의 저자인 일본 장애우 오토타케 히로타다에게는 환호와 갈채를 보내지만 동네에 장애우시설이 들어선다면 집단적으로 반대하는 그릇된 의식이 장애고아 수출대국이라는 오명을 만들지 않았는가. 54년부터 99년 6월까지 입양된 장애아 32,814명 중 국내 입양은 0.5%인 168명에 불과하다는 통계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버려진 국내 장애아동들이 가정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도 이제는 가정이 필요한 아이에게 가정을 제공해 우리의 자식으로 키우는 성숙한 사회가 돼야 한다.
글·사진/ 이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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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진 손 (2001.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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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적극적인 장애아동 양육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장애아동들은 1년에 몇 명이나 국내로 입양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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