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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말이 없다

[특집]정신지체장애인, 품을 희망이 없다(3) - 9년 만에 밝혀진 정신지체장애우 남매 암매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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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책임지지 않고,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성인 정신지체장애인들의 삶이 얼마나 비극적일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정신지체장애인 남매의 죽음이 9년 만에 밝혀졌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조용하기만 하다. 더욱 어이없는 건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신지체장애인의 열악한 삶의 질과 권리는 바뀐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차디찬 땅속에서 통곡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정신지체장애인 남매의 영을 위로하면서 한 편의 논픽션 소설과도 같은 이 사건을 <함께걸음>이 재구성해봤다.


            죽어서도 냉대 받은 정신지체장애인 남매의 삶

정신지체장애인 남매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고, 암매장 된 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가해자의 경찰자수에서 시작됐다.

사건의 시작은 16년 전인 1990년으로 거슬러간다.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 1리에서 5남2녀를 키우며 농사짓고 살던 정씨부부에게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막내 정영록(정신지체 1급, 사망당시 32세)씨와 바로 윗누이인 정갑숙(정신지체 1급, 사망당시 34세)씨의 존재는 여러모로 고민 덩어리였을 게다. 여기에 어머니인 양 모 씨(70)마저 장애가 심해지자(시각장애 1급) 이들 남매의 존재는 불안감 그 자체였지 않을까. 혹시나 나머지 자녀들에 짐이 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과 함께.

때마침 갑산 2리로 이사 온 윤 모 목사(당시 전도사, 47)와 김 모 씨(48) 부부와의 만남은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도를 위해 이리저리 다니던 목사부부와 사는 얘기를 나누던 어머니는 남매로 인한 고민들을 털어놨을 테고, 절호의 기회다 싶었던 이들은 남매부모에게 ꡐ남매를 살기 좋고 낙원과 같은 시설(?)로 옮겨 줄 테니 기독교로 개종할 것ꡑ을 제안했다.

남매가 좋은 곳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말을 믿은 어머니는 가족들을 설득해 시설에 보내기로 했고, 남매는 영문도 모른 채 정든 고향땅을 떠나 1992년부터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에 위치한 ‘은혜의 집’이라는 미인가 시설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은혜의 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정씨 남매에게 생존의 위기가 닥친 것은 지난 1997년 경. 영록 씨가 시설근처에서 추락해 심한 상처를 입게 되자 치료비 문제로 더 이상 은혜의 집에서 생활하기 어렵게 됐다.

목사부부는 남매를 가족들에게 돌려보내는 대신, 경북 고령군에 있는 한 저수지 근처에 움막을 지어 이들을 생활하게 했고, 이로 인해 영록 씨가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무더운 여름철, 먹을 것은 없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물이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록 씨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움막 밑 작은 웅덩이를 찾아가 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숙였을 테고, 그렇게 두 번 다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상태로 죽은 것이다. 영록 씨가 죽자 갑숙 씨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대신 시신 옆에서 우는 것을 선택했고, 이 소리를 들은 낚시꾼에 의해 발견됐다.

합천 경찰서 강력범죄 수사팀의 옥확선 형사에 따르면 영록 씨의 사인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서 익사한 것이라고.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서 무연고 처리를 한 후 사건을 진행하는 통에 영록 씨의 무덤은 찾을 수가 없단다. 갑숙 씨는 발견된 직후 쉼터로 넘겨졌다가, 지문조회를 통해서 가족들에게 인계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면 응당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야 했어야 할 갑숙 씨 역시 집으로 가지 못했다. 오히려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이들의 손에 이끌려 은혜의 집을 거쳐 교회 뒤편에 있는 한 폐가에서 생활하게 됐다. 고향땅을 떠난 지 5년 만에 집 근처까지로 오게 됐지만, 정씨 가족들 눈에 띄면 안 된다는 이유로 아무도 모르게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에 돌아온 지 열흘 만에 동생 뒤를 따라 간 것이다. 이게 지난 1997년 10월에 벌어진 일. 먹을 것을 갖다 줘도 자기네들 모르게 숨기고, 버리고 해서 안 먹더니만, 열흘 만에 굶어서 죽었다는 게 목사부부의 주장이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서도 냉대 받는 게 정신지체장애인의 현실인가. 그녀는 죽어서도 부모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목사부부에 의해 교회 뒤 텃밭에 암매장 됐다.

그로부터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거친 생을 마감하고는 구천을 떠돌았을 정씨 남매의 한이 통했을까. 이들 남매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결정적 역할을 한 목사부부에 의해 진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3년 전인 2003년, 아들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목사의 부탁에 의해 숨겨왔던 어머니는 이 사실을 자식들에게 털어놨고, 그때부터 딸의 행방에 대해 집요한 물음이 시작됐다. 이렇게 감추고, 묻는 과정이 오가며 심적 부담이 커진 목사부부는 부부싸움 끝에 사실을 털어놓기에 이른 것이다.

옥 형사는 목사부인이 자수하게 된 동기에 대해 “당시 부부 사이가 극도로 나빴다. 이혼이야기가 나오면서 목사가 마을에서 떠난다고 하자, 목사부인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수한 것 같은데, 정말 웃긴 건 그 이후 이들 부부금실이 다시 좋아졌다는 거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수했다면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죗값을 받았으면 하는데 둘이 똘똘 뭉쳐서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참 씁쓸하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고,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바라다보는 양측 시선은 너무도 달랐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기에 누구 말이 옳은지조차 알기 힘든 상황.

정씨남매의 죽음 뒤에 감춰진 진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들의 증언과 정황증거를 바탕으로 의혹의 퍼즐을 짜맞춰봤다.

- 남매가 시설에 간 까닭은?
목사부부, “데리고 있기 힘들다고 보낼 곳 부탁했다”
남매 아버지, “목사가 좋은 곳 보내준다고 꼬셨다”


윤 목사는 정씨 남매를 시설로 보내는 것을 도와준 이유에 대해 “정씨부모가 원한 일이었고, 이를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려다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윤 목사에 따르면 “갑숙이는 덜 했지만, 영록이는 장애가 심했다. 이들 때문에 친척들조차 찾지 않을 만큼 집안의 골칫덩어리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던 중 정씨 어머니가 아이들이 있을만한 곳을 부탁했고, 교회 신문의 광고에서 본 기억이 있는 ‘은혜의 집’을 소개시켜 줬다고.

그러나 정씨와 그의 큰 아들 이야기는 다르다. 자신들이 보낼 곳을 찾은 게 아니라, “아이들한테 좋은 곳이 있으니 그쪽으로 보내라”고 꼬였다는 것. 정씨는 “애 엄마는 눈이 안보여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들지, 나도 늙어가고 하니 아이들을 위해 그 쪽으로 보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 250만원과 쌀 한가마니씩을 내고 보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찌됐건 간에 양쪽의 합의에 의해 정씨 남매는 시설에 보내진 것이다.

여기서 이해 안 되는 건 목사부부의 행동이다. 그의 말처럼 봉사하는 마음때문에 정씨 남매를 시설에 갈 수 있도록 알선해주는 등 친절을 베풀었을까.

그렇지 않다. 목사부부가 정씨 남매를 맡게 된 배후에는 ‘돈’이 걸려있었다.

        ▲ 교회안에 마련된 목사 집무실. 두 명의 장애우를 죽음에 이르게 한 목사는 성경을 보며, 설교준비를 하고, 기도를 할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실은 돈 때문에!

자수 초기만 하더라도 목사부부는 정씨부부에게 받은 돈은 500만원 밖에 없고, 이 돈 전부를 시설 입소비 등 남매를 위해 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은혜의 집 오현숙 원장에 따르면 ꡒ우리 시설은 무연고자 장애인만 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윤 목사 부부가 찾아와 “예네들은 가족이 없으니 잘 좀 부탁한다면서 맡겼다. 이 과정에서 입소비는커녕, 간식비조차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정씨의 큰 아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기위해 마을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진실에 대해 추궁했고, 목사부부는 “그동안 현금 3750만원과 쌀 14가마를 남매가 죽은 후까지 계속 받았다”고 털어놨다. 물론 이 한 가지만으로도 목사부부의 죄는 용서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계속 의문으로 남는 건 많다면 많을 수도 있지만 14년간 4천여만 원의 돈을 용돈 받듯 타 쓰기 위해 정씨 남매를 맡았던 걸까.

돈에 대한 의혹에 대해 집요하게 묻자 목사부인은 "우리에게 아이들 맡아주는 곳에 5천만 원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돈 중 500만 원 정도는 십일조 형식으로 우리가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고 횡설수설했다. 바로 이것이 숨겨진 진실이었다.

정씨는 자식들을 불러 모은 자리서 “자신이 농사짓고 있는 땅 다섯 마지기(시가 5천만 원)는 정씨 남매에게 줄 테니 잘 보살펴 달라”는 이야기를 했고, 정씨 어머니는 이 사실을 목사부부에게 말하며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목사부부는 남매가 돈이 된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500만원이 아닌, 5천만 원 전부를 가로채려 했던 것이다.

결국 돈에 눈먼 종교인의 부도덕한 욕심 때문에 애꿎은 정씨 남매만 죽음에 이른 것이다.

- 십여 년 동안 찾는 이가 없었던 이유는?
목사부부, “정씨 가족이 남매 버렸기 때문이다”
남매 아버지, “목사부부가 못 보게 막았다”

정씨 가족들은 남매를 위해 4천여만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시설에서 생활하게 했다. 남매의 편안한 삶을위해 이렇게 많은 액수를 낼 정도로 이들을 생각했으면서 어떻게 한 번도 만나볼 생각을 안했을까.

목사부부는 이에 대해 “영록이에게 처음 문제가 생겼을 때 가족에게 보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정씨 어머니가 ‘애 아빠가 싫어한다’는 이유를 들며 남매가 집에 있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런 이들이 왜 찾아가겠는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씨는 “아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목사한테 이야기 하면 ‘미국 갔다’, ‘강원도에 있는 시설로 옮겼다’등의 핑계를 대며 데리고 가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의 큰 아들 역시 “주소라도 알기 위해 목사를 찾아가면 어머니께 큰 소리를 들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어머니에게 있어 목사는 ‘신’이었기 때문에 목사가 하지 말라는 말조차 꺼낼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족 전체가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정씨의 큰 아들은 “동생들이 시설에서 생활하라고 돈을 냈다는 것 자체가 떳떳하지 못한 일이기에 목사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 대해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여기에 종교까지 다르다 보니, 목사부부와 부딪치는 것 자체를 꺼려했던 것.

결론 내리자면 가족들은 정씨 남매를 맡긴 것 자체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에 잘 있다는 말만 믿고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던 거고, 목사부부는 이를 적절히 이용해 죽음을 숨겨온 것이다.

- 정씨 남매가 시설서 쫓겨난 이유는?
목사부부, “아무 문제없었는데 쫓겨났다”
남매 아버지, “영록이가 다쳤다고 해 치료비 줬고, 시설서 생활하는 줄 알았다”
은혜의 집 원장, “목사부부가 병원비를 안줘 어쩔 수 없이 퇴소조치 했다”


영록 씨의 죽음은 이미 지난 1997년에 경찰 조사가 끝난 상황이다. 옥 형사에 따르면 “사인은 심한 영양실조 상태에서 익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타살된 게 아니라 자기 과실에 의해 죽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경찰 조사처럼 죽음에 이른 직접적인 원인은 본인과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결정적인 계기는 시설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오 원장은 “영록 씨는 장애도 심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고 해서 시설에서 생활하며 마찰이 많았다. 사고도 그러다가 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언덕 위에 만들어 놓은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했는데, 아무도 없는 사이 밖으로 나오다가 언덕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고. 오 원장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읍사무소에 가서 상의했지만, “부모가 살아있고, 땅까지 있기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결국 목사부부에게 연락해 병원비와 간병인을 요구했다. 오 원장은 “정씨남매의 어머니와 함께 찾아온 목사부부는 ‘돈이 없으니 이 돈을 보태서 치료해 달라’고 2~30만원을 줬지만, 이 돈으로 계속 치료받게 할 수 없어서 영록 씨를 데려가라고 말했다”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정 씨의 큰 아들은 "어머니가 영록이를 간병하러 갔었고, 목사부부에게 병원비로 750만원을 준 것으로 기억한다ꡓ고 주장한 반면, 목사부부는 “얼마 받았는지 기억 안난다. 하지만 받은 돈은 전부 병원비로 썼다. 우리가 가로챈 돈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누구 말이 진실인지 지금 와서 확인해 볼 방법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사이 영록 씨는 죽음의 문턱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됐다.

병든 몸으로 움막서의 생활, 영록 씨 죽음의 가장 큰 원인

그렇게 쫓겨난 정씨 남매가 간 곳은 편안한 숙소가 아니라 산속 움막이었다.

목사는 그 때 상황에 대해 “시설서 쫓겨난 후 남매를 데려 가든지, 150만 원 정도를 주면 방이라도 하나 구해서 같이 생활하겠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잖은가. 그래서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는 저수지 근처에 움막을 설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갑숙 씨의 경우 요리도 할 수 있고, 빨래도 할 수 있으니 자신들이 먹을 것만 갖다 주면 알아서 챙겨 먹으리라고 기대한 것. 또 당시 계절이 7월 달이기에 교회 옆에 짓고 있던 사택이 완공될 때까지 남매들이 움막에서 생활해도 문제없으리라고 생각했다는 게 목사의 주장이다.

그러나 목사부부의 기대와 달리 큰 문제가 발생했다. 윤 목사는 “7월 말 경이면 여름성경학교로 엄청 바쁘다.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하고 보름 정도 찾지 않았는데, 나중에 가보니 남매가 사라졌다. 한참을 찾다가 ‘곧 오겠거니’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 기다렸는데, 20일쯤 지난 후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죽은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영록 씨는 고작 물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애쓰다가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누구에게 죽임을 당한 게 아님은 사실인 듯 보이지만, 자신의 몸을 가누기 힘들만큼 중증 장애가 있고, 3개월 넘도록 입원했어도 회복이 안될 만큼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를 산속 움막에, 그것도 아무런 보호 없이 방치한 건 명백한 간접살인이라 볼 수 있다.

만약 영록 씨가 병원에 계속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완치될 동안만이라도 가족들 곁에 있었어도 시쳇말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을까.

- 석연치 않은 갑숙 씨의 죽음, 그 진실은?
목사부부, “영록 씨 그리며 밥 안 먹어서 죽었다”
남매 아버지, "데려오라고 졸라도, 잘 살고 있으니 놔두라고 했다”
 
▲ 갑숙 씨가 생활하다가 죽음에 이른 장소. 교회 바로 뒷편에 있는 이 집은 홍수에 무너져버려 을씬년스럽기 그지없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적당할 듯싶다. 남매의 어머니는 목사부부의 방치로 인해 막내아들이 죽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처벌을 요청하는 대신 갑숙 씨의 신변마저 맡겼다. 결국 쉼터를 나와 은혜의 집에 갔던 갑숙 씨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윤 목사의 교회 뒤에 있는 한 폐가에서 생활하게 됐다. 오 원장은 “갑숙 씨를 다시 데려온 지 얼마 안 돼 ‘영록이 수발을 위해 갑숙이를 데려 가겠다’고 해 참 싱거운 사람들이다고 생각하며 보냈다”고 주장했지만, 목사부부는 특별한 이유없이 쫓겨났다고 주장했다.

고향집에서 불과 5분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은신생활을 하던 갑숙 씨가 열흘 만에 동생 뒤를 따랐다. 이 의문투성이 죽음에 대해 목사는 “우리 아이들과도 곧잘 놀다가, 영록이 생각만 하면 눈물을 흘렸다. 처음에는 밥을 안 먹고 있는 것도 몰랐다. 같이 먹을 때는 입에 물고 있다가 뱉어내고, 방안에 밥상을 가져다주면, 이불 뒤에 버리곤 해서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바로 사망해 손 쓸 길이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아사했다는 말이다.

누나마저 죽게 되니 처벌받을까 두려웠을까. 갑숙 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정씨 남매의 가족에게 알리는 대신 폐가 옆에 있는 텃밭에 파묻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냐는 질문에 목사부인은 ꡒ남편은 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려 했지만, 내가 말렸다. 어차피 죽은 거, 지금 알리나 나중에 알리나 똑같다. 하지만 지금 알리게 되면 갑숙이 아버지가 절대 예수 안 믿는다. 나중에 믿은 후에 사실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빌자ꡓ고 당당하게 말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변명이다.

이에 대해 옥 형사는 갑숙 씨의 죽음이 방치에 의한 것이 아닐 거라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옥 형사는 “물만 마셔도 열흘은 넘게 살 텐데, 다른 뭔가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설사 목사 말이 사실이더라도 그 정도 상태에 이르렀으면 이상한 게 눈에 띄었을 텐데 병원에 데려 가거나 부모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의심을 살만하다. 하지만 진술 이외에 이들의 범죄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어서 무척 고심이다. 사체유기 혐의 역시 공소시효가 만료(공소시효 7년)된 상태라 처벌하기 힘들어 증거확보를 위해 노력 중에 있다”고 말했다.

갑숙 씨의 죽음에 의혹을 던지는 것은 또 하나가 있다. 바로 그녀가 열흘간 생활했다는 폐가의 위치다. 교회 바로 뒤편에 있던 폐가에 가기 위해서는 이웃집과 교회 사이의 길을 통과해야만 갈 수 있을 정도로 인접해 있다. 목사부부가 자주 싸움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할 정도로 이웃집과 붙어 있었는데, 얼굴은커녕 사람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것은 감금 등 갑숙 씨의 행동을 제약한 그 무엇이 분명히 존재했을 거다.

이를 놓고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우선은 영록 씨 죽음의 전말을 알고 있는 갑숙 씨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다닐까봐 자신들이 감시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왔고, 심신이 약해진 상태서 감금한 뒤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됐거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로 인해 살인에 가까운 학대를 받다가 죽을 것은 아닐까.

        ▲ 갑숙 씨의 시신이 묻혀있던 곳. 그녀는 이웃 집에서 창문만 열면 바로 보이는 텃밭 사이의 공터에서 십년이라는 세월을 아무도 모른채 묻혀 있었다.     공적 시스템 부재가 비극 만들어

이번 사건이 벌어진 데는 목사부부의 탐욕이 가장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의 꼬임에 넘어가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할 정도로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지원 서비스가 전무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특히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보나 지원 서비스가 부족한 농촌의 경우 이 같은 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그룹 홈이나 주간보호센터 등 지원 서비스가 늘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지체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동등한 가족의 대우를 해주지 않은 정씨가족들에게도 도의적인 책임은 있지만, 그들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자녀는 부모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커버렸는데 공적 시스템 속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기에 사적 시스템 내에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 했던 거고, 이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난 거라 볼 수 있다. 결국 ꡐ공적책임ꡑ을 외면한 우리나라 사회복지 시스템이 만들어낸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공적 시스템의 부재 외에도 이런 어이없는 죽음을 만들어낸 데는 사회적 인식도 책임이 크다. 만약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이에 의해 비장애인이 학대상황에서 죽음에 이르렀고, 이 사실이 10년이 지난 오늘, 세상에 알려졌다면 지금처럼 조용할까?

정신지체장애인이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 ‘그들이 무슨 생각이 있어서 지금 상황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인식하겠냐’ꡑ는 등 사회 곳곳에 깔려있는 정신지체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이 이 같은 사건이 벌어져도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다.

다만 정신지체장애인 학대사례가 한 방송을 통해 방영되며 조금이나마 문제의식을 갖게 됐기에 한 번 더 주의깊게 사건을 바라봤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정신지체장애인의 삶에 대해 사회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사건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비슷한 방법으로 학대받고 있을 정신지체장애인이 있을 거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할까.
아무쪼록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한 두 영혼에게 이제는 편안하게 쉬시길 빈다.

취재지원 경남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구명회 소장
작성자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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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나영신님의 댓글

나영신 작성일

던만 좋아하는 목사가 아니라 밥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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