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 청각장애여성에게는 여성 수화통역사가 배치돼야 > 기획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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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피해 청각장애여성에게는 여성 수화통역사가 배치돼야

[기고] 장애 특성을 고려한 성폭력 피해 상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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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저는 또 약을 먹을 수밖에 없어요. 남편과 아이들 앞에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 수 있겠어요...”

  성폭행 사건의 피해 당사자로 가해자 측과 진술이 엇갈리는 가운데 검찰의 기소여부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청각장애 여성 정희선(가명 ․ 29) 씨. 그녀는 요즘 분노와 허탈감 속에서 피말리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피해자와 가족들의 진술, 그리고 경찰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정희선 씨 성폭력 피해 사건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에서 청각장애우인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기르며 단란한 가정을 꾸려오던 정희선씨는 두 차례에 걸쳐 바로 이웃에 살고 있던 강희철(가명 ․ 35)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평소부터 정희선 씨에게 추근거리던 강 씨는 지난 7월 17일 피해자의 남편이 출근한 사이 집으로 들어와 잠자고 있던 피해자를 성폭행했다. 그 후로도 가해자 강 씨는 정 씨의 주변을 배회하며 수시로 나타나는 등 피해자에게 성폭력의 고통을 넘어 가정이 붕괴될 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을 갖게 됐다. 더구나 괴로움에 못 이겨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호소할 생각으로 찾아간 정 씨를 강 씨는 자신의 집에서 또 다시 성폭행했다.

  가해자 강씨는 경찰조사에서 피해자인 정희선 씨가 제 발로 찾아와 할 수 없이 성관계를 갖게됐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스런 진술로 일관하고 있다.

  이번 청각장애우 정희선씨 성폭력 피해 사건 조사를 받을 때 수화통역에 대한 당연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했다.

  실제로 피해자 정희선 씨가 성폭력의 악몽에 시달리다 남편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고 이에 대한 분노한 남편이 사건발생 한 달 후인 8월 20일 관할 경찰서에 신고를 하게 됐는데, 문제는 신고한 후였다. 경찰의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한 정희선 씨는 수화통역사도 없이 진술을 해야 했다.

  며칠 후 청각장애우인 남편이 겨우 수소문해서 구한 수화통역사는 남자인데다 수화도 서툴러 도무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성폭력의 피해에 떨고 있던 정희선씨는 난생 처음 와 보는 경찰서에서 불안과 긴장등으로 정신이 아찔한데다 가정주부로서 입에 담기조차 낯 뜨거운 부분까지 진술을 해야하는 성폭행 과정을 의사소통이 안 되는 남자 수화통역사를 통해서는 도저히 진술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시간개념이 흐린 청각장애우의 특성을 그대로 지닌 정희선 씨였다. 그러다 보니 진술과정에서 성폭행 피해 날짜가 몇 번이나 번복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피해자의 진술 번복과 증거 불충분 등으로 가해자는 불기소 처리돼 풀려났다. 이를 힘없이 지켜봐야 했던 정희선 씨는 죽을 결심으로 약을 먹었다가 다행이 일찍 발견돼 목숨은 구했지만 정신적 충격은 물론 심한 위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뒤늦게 수사상의 허점을 인정한 검찰 측이 다행히 경찰에 재조사를 하도록 지시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과 장애우권인문제연구소 여성국 등에서 정희선 씨 성폭력 피해 사건의 철저한 수사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사건의 성격상 여성 수화통역사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처음부터 여성인 수화통역사가 동행했더라면 언니는 훨씬 편안한 가운데서 몇 차례나 진술을 번복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날짜도 미룬 채 사건 후부터 줄곧 정의선 씨의 입이 되어주고 뒷바라지를 하느라 입술이 부르튼 여동생의 정애선(가명)씨의 하소연이다.

  수화를 주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우가 조사를 받게 될 때 충분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화통역사가 동반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묵비권을 행사하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물론 청각장애우가 경찰과 검찰에 출두하게 될 때 수화통역사를 적극적으로 알선하는 관청도 있는 것으로 알지만 문제는 한두 군데만의 노력으로는 절대 안된다는 사실이다.

  청각장애우가 서울에 살든, 이름없는 상골 오지에 살든 간에, 즉 우리 사회 어느 곳에 있든지 필요한 수화통력 서비스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의 성폭력 피해와 같은 민감한 경우에는 반드시 여성 수화통역사가 동행해야 한다는 내용도 당연히 포함돼야 할 것이다.

  작년 97년부터 농가인협회 주최로 수화통역사 자격시험이 실시되고 수화통역센터의 전국 설치가 추진되는 등 수화통역에 대한 인식이 우리 사회 저변에 확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화통역에 대한 법적 내지는 제도적 장치가 없어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희선 씨 사건처럼 피해자 측이 수화통역사를 찾아 헤매고, 더구나 민감한 성폭력 부분의 진술을 여성 수화통역사 없이 진술하는 불합리한 현실이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되풀이 돼서는 안될 것이다. 더불어 정희선 씨처럼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함으로 해서 많은 사회적 위험에 노출돼 있는 청각장애우에게 그에 상응한 법적인 보호장치도 마련돼야 할 것이다.

  정희선씨는 가해자 강씨가 누르는 벨소리를 듣지 못했고 더군다나 잠을 자고 있었던 터라 옆에 다가오는 가해자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한 성폭행을 당한 상황에서도 제대로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나의 법 조항에는 저항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청각장애우를 포함한 장애우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법률적 장치(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정신지체인의 경우는 예외)가 없다. 이에 대한 법적인 보장도 시급한 실정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하고 살았는데... 농아라고 무시할까봐 더 열심히 살았는데...”

  눈물로 토해내는 청각장애우 정희선 씨의 가슴 아픈 절규는 듣는 이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글/ 조옥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

작성자조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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