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당면한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슬기로운 해결책
본문
최근 전경련의 장애우 의무고용제 폐지 건의는 현재의 IMF 경제위기를 핑계로 사회의 공공선 보다는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기업가들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어떠한 시각으로 오늘날의 경제위기를 바라보고 그 해결에 힘써야 하는지 경제학자 강수돌 교수의 제안을 들어보자.
경제 위기가 아니라 삶의 위기가 문제!
1997년 말부터 온 사회가 IMF 한파로 얼어붙고 있다. 입춘이 지나고 춘분이 올 지라도, 아니 한여름이 오더라도 이 얼어붙은 몸과 마음이 쉽사리 녹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제는 우리의 ‘아버지’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고 ‘아들과 딸’, 그리고 ‘어머니’ 모두가 고개를 숙일 판이다. 어떤 이는 1~2년만 참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고, 또 다른 어떤 이는 10년은 갈 것이라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본격적인 M&A(인수 및 합병) 물결이 시작되면 외국 자본이 한국 기업과 은행을 죄다 ‘초토화’ 시킬 것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매일 만나는 뉴스 거리는 매우 우울하다. 신용카드 빚에 못이겨 자살하는 샐러리맨들이 생기고, 고국의 부모가 생활비를 못부치겠다고 하자 자살하는 유학생이 생겼으며 노동자들의 월급을 챙겨주지 못해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하는 중소기업 사장도 있다. 같이 일하던 부하 직원을 정리해고시킨 부장이 가슴이 아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해고가 두려워 불안에 떨다가 자기도 모르고 온 동네 자동차에 불을 지른 노동자도 생긴다.
경찰이 오기도 전에 불과 몇 분 사이에 은행이나 금고를 털어가는 신종 전문가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일자리를 잃은 부모가 제발 밥이라도 먹여 달라고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고아원에 ‘주체적으로’ 갖다 맡기는 사태도 생긴다. 다섯 살도 안된 아이들 셋이 있는 20대 부부가 지방에서 상경하여 강도짓을 하는 우울한 사태도 생겼다. 1930년대 ‘모던 타임즈’의 채플린처럼 끼니라도 잇기 위해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가려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대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휴학을 하고 무려 몇 달씩 기다려야 할 정도로 줄줄이 군 입대를 신청하고 있다. 실직으로 집 잃고 길바닥으로 내몰린 넥타이 부대가 지하철역 등에서 밤을 새기도 하며, 심지어는 갓난아기를 키울 수 없어 남 몰래 내다버리는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다. 노동력을 파는 노동시장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이제는 콩팥과 같은 신체의 일부 자체를 떼내어 팔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다.
그 와중에 대우조선의 노동자 최대림씨는 2월 13일, 경제 위기 극복의 이름 아래 도입되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법은 “근로자만 죽이는” 것이라며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에 동참”하기를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기 몸을 불사른 뒤 25미터 아래로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미 민주노총 비대위는 그 전날 ‘제 2의 외환 위기를 막으려면 총파업만은 안된다’는 여론의 압력을 이유로 총파업의 깃발을 접어버리고 만 상태였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장롱 속의 달러나 금을 모으고 모두가 허리띠를 좀 더 졸라매며 눈감고 뼈빠지게 생산성을 높이면 이 세계화 시대 ‘제 2의 보릿고개’를 무난히 넘기지 않겠냐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삶의 위기를 삶의 위기로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경제위기로, 즉 수익성의 위기로만 바라보는 예전의 패러다임 속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허리띠를 다시 한번 졸라매고 현재의 위기를 탈피한다손 치더라도 그 다음 시기에 다가올 또 다른 위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본 대안이 없다.
우리가 보기에 현재의 경제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 위기를 외환 위기나 무역 적자 등과 같이 ‘수익성 위기’의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경제’란 결국 ‘먹고 사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위기의 뿌리를 제대로 다스려, 다시금 경제 위기를 극복한다는 이름 아래 오히려 삶의 위기를 심화, 확대시키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구조조정이란?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경제(산업)의 구조조정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IMF가 강제하는 구조조정, 재벌이나 정부가 이야기하는 구조조정, 시민단체나 노동자들이 원하는 구조조정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엄격히 구분해서 써야할 것 같다.
첫째의 의미는 IMF가 요구라는 바, 보호주의적이고 규제 위주의 경제 구조를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구조로 바꾸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경유착의 표본인 재벌을 개혁하여 계열사간 상호지급 보증을 폐지하고 내부거래를 금지하며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라는 것이다. 철저히 시장 논리, 그것도 세계시장의 논리를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원하고 있는 IMF나 세계은행(IBRD)등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적극 주창하고 요구하고 있는 바다. 이 과정에서 수십개의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기존의 자급자족의 경제구조나 생활방식을 급속도로 파괴당하고 이른바 선진국 모델을 추종하도록 강제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가치 판단 기준이 세계시장에서의 상품 경쟁력으로 환원되었다. 즉 경쟁력이 있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둘째의 의미는 노동집약적이고 저부가가치형의 경제구조를 자본집약적이고 고부가가치형의 경제구조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경제개발도상국의 정부가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기존의 경공업 등 값싼 임금을 이용한 경쟁 전략이 일정한 한계에 부딪히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 돌파구로써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동배제적 자동화나 정보화가 가속화되고 따라서 인간 노동력은 가차 없는 합리화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실업자나 임시직의 형태로 길거리로 내몰리고, 오로지 소수의 고급 기능인력만이 상대적으로 좋은 대접을 받게 되었다.
셋째의 의미는 재벌이나 대기업들이 많이 쓰는 의미로, 경쟁력 있고 이윤이 나오는 분야(핵심, 주력업종)는 살리고, 반면에 경쟁력없고 이윤이 낮은 분야(주변, 한계업종)는 과감하게 정리한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같은 그룹 안에서 이윤이 많은 분야는 적자를 보는 분야에 지원을 해주어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세계화 물결과 더불어 이제는 비효율적인 부분은 비록 그것이 자기 몸의 일부라 할지라도 과감히 잘라내게 되었다. 이것은 기업이 만들어내는 재화와 서비스가 사회적인 필요에 맞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단지 보다 많은 이윤을 갖다 주는 분야만을 계속 유지하거나 확장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은 이윤을 좇아 부단히 움직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즉 아무리 기업들이 ‘고객만족 경영’을 외치고 다니다하더라도 그것이 높은 이윤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한, 인간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는데 필요한 것을 만들어 공급한다는 이상적 목표는 ‘빚 좋은 개살구’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경쟁을 통해서 사회적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발상은 결코 현실화되기 어려운 것이다.
넷째는 일부 시민단체의 요구처럼 재벌위주의 구조를 중소기업 위주의 구조로 바꾸자는 의미의 구조조정이 있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지금까지 재벌이 혈통과 친족을 매개로 경제적인 합리성이 아닌 전근대적 비합리성과 정경유착이라는 의혹 속에서 급성장을 해왔기 때문에 냉혹한 세계화의 물결을 헤치고 국제경쟁력을 획득하려면 과감한 재벌해체와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아가 대만이나 독일, 이탈리아 등의 경우에서와 같이, 중소기업체들이 그 고유의 유연성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충실하게 성장한 나라의 국제경쟁력이 강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우리나라도 그렇게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로 전환해야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입장에서 여러 시민단체들은 이런 식의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정 정도 합리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즉 이 입장은 중소기업도 경쟁력을 획득하고 자본을 축적하면 얼마든지 독점대자본으로 클 수 있어 재벌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입장도 세계시장과 국제경쟁력 강화의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부단히 생김과 동시에 부단히 사라지는 수많은 중소기업들 뒤에서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삶의 위기’는 부차적으로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의 의미는 진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구조조정으로,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필요와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경제 분야나 경영 방식은 계속 살려 나가고 적극 장려하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잘라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군수산업이나 공해산업, 사치품산업, 향락퇴폐업, 열악한 노동환경을 강요하는 분야, 중복투자된 분야, 사람들의 민주적 의견에 반하는 투자 등은 과감하게 척결해야 하며,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분야는 적극적으로 촉진해야 한다. 그리고 경제과정이나 노동과정을 일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욕구에 부합하도록 고쳐나갈 수 있는 생산조직은 계속 살리고 그렇지 못한 조직은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구조조정이다.
내가 보기에 현재 진행되는 세계화 물결이나 IMF 체제하 구조조정은 결코 이러한 내용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고 본다. 권력자들이 이야기하는 구조조정, 즉 경쟁력 강화를 위한 변화의 과정에서는 생산성을 높이느라 인간과 자연에 대한 피괴성을 강화시키며, 여성이나 장애우, 노인이나 청소년, (이주)외국인 노동자, 미숙련 단순 노동자 등에 대해서는 차별 대우가 강화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갈수록 기업가의 권력에 더욱 의존적으로, 종속적으로 된다. 따라서 IMF나 기업가들의 선전과 홍보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구조조정 방식은 ‘위기’를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 위기를 더 큰 규모로 심화시키고 그 결과 사회적 위기, ‘삶의 위기’도 범지구적으로 심화시킬 것이다.
정리해고와 대량실업-노동 유연화인가, 삶의 경직화인가?
정리해고의 문제는 1997년 이후 우리 사회의 최대 쟁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IMF는 구제금융을 실시하면서 반드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마침내 1998년 2월6일, 노사정 위원회합의로 인수․ 합병시 정리해고 및 파견근로제가 합법화 되었다. 왜 자본은 정리해고를 비롯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원하는 것일까?
시장지배력을 둘러싼 자본 사이의 경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쩔 수 없는 외적 강제로 보이긴 하지만 사실상은 자본이 자기 몸을 불려 나가고자하는 내적 본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본 사이의 경쟁에 노동이 동참하는 것은 결국 자본의 증식 과정을 도와주는 길이다.
자본의 증식이란 자본이 자기 몸을 불려 나가는 것이므로, 바로 이것은 노동에게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뜻한다. 그것은 많은 경우 물리적 생명 자체의 죽음도 의미하지만(산업재해, 과로사), 더 중요한 측면은 살아 움직이는 주체성의 죽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자본A : 자본B 사이의 경쟁관계는 자본a/노동a : 자본b/노동b 사이의 경쟁력 크기에 따라 좌우된다. 이것은 달리 보면 노사관계A : 노사관계B 사이의 경쟁력이고 그것은 자본A와 B 중에서 어느 것이 자기의 노동을 확실히 관리하고 통제하느냐, 즉 어느 자본이 자기 노동의 주체성을 확실히 장악(지배)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노동 생산성과 국제경쟁력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설령 자본A가 경쟁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자본 자체가 이 지구촌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금세 또 다른 자본C가 생길 수도 있다.
문제는 자본끼리의 경쟁관계가 지속될수록 각 자본들은 각기의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경쟁을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어떤 개별 자본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일반의 노동 일반에 대한 지배력은 계속 유지,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경쟁관계는 지배관계의 외화된 형태일 뿐 이다. 따라서 “남들이 모두 경쟁하는데 우리만 게을리하면 패배하지 않느냐” 하는 논리는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목소리이든지 아니면 문제의 줄기와 뿌리를 잘못 보는 데서 오는 오류이다.
특히 최근에 신자유주의와 IMF의 공세라는 맥락에서 지배적인 담론으로 되고 있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를 통한 경쟁력 향상 구호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유연성이란 자본에게는 자의성을 의미하지만, 노동에게는 ‘경직성’을 의미하고 있다. 즉 자본은 우연성 강화를 통해 노동력을 자신의 뜻대로 소비하고자 하지만(예컨대, 노동시장 유연성을 통한 ‘호출노동자’의 활용과 ‘정리해고’의 자유화), 노동자는 자본의 유연성을 위해 자신의 삶을 그만큼 종속, 순응시켜야 하며, 따라서 자본의 의지 아래 단단히 묶여버리기에 오히려 ‘삶의 경직성’이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세계적 투자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이 보장되면 값싼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고(M&A), 그 과정에서 만일 노동자들이나 노동조합이 반발하게 되면 자본의 투자 위험도는 커질 것이다. 따라서 IMF등의 자본은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도 합법적 정리해고등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삶의 시간과 공간, 내용에 대한 주체적인 결정권, 즉 ‘삶의 주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경제가 활성화되고 설사 경쟁에 승리한다 한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승리한 대가로 물질적인 삶의 양을 증가시킨다고 해서 과연 잃어버린 ‘삶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1997년 12월 초, 김영삼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수혈받기 위한 1차 합의서에 서명한 뒤 ‘IMF 시대’라는 말이 온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무엇보다도 ‘IMF 시대’란 나라 경제 전체가 파산 문턱에 있다는 뜻이기에 이 사실 자체만도 모두의 기를 죽이고 있다. 그 위에 우리를 한 번 더 짓누르는 것은 ‘일자리 위기’다. 일자리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소득원일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발전시키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자리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경우에 우리는 경제적 생명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명마저 위험에 처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러한 ‘경제 위기’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한 새 정권의 과제는 무엇일까?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시점에 역설적이게도 우리 나라는 선거를 통한 여야 정권교체를 맞이하게 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우선 경제, 통일/외교/국방, 사회/문화/복지, 정무/법무/행정 등 각 분야별로 총 ‘100대 과제’를 밝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제 분야는 40개를 차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새 정부 구상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시장과 민주주의의 결합이라는 원칙을 견지하되, 경제의 투명성과 공정 경쟁을 기치로 재벌 개혁과 금융 개혁, 민간 자율 확대, 경제 구조 조정,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통해 현 ‘IMF 시대’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특히 눈앞의 ‘위기’를 조속히 극복키 위해 새 정권은 기업 경쟁력을 드높이고 이를 토대로 수출 진흥을 하고자 한다. 인수위에 따르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무역․투자 촉진 전략회의’를 설치해 무역 확대와 적극적 외국인 투자 유치에 나서려 한다. 물론 새 정권의 경제 과제 속에는 농어촌, 교육, 국방 등의 분야에 대한 모든 투자 사업을 ‘영점 기준’에서 재점검하여 우선 순위를 조정한다는 안도 들어있지만, 기업 경쟁력 강화와 수출 증진이라는 기존의 경제성장 틀을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새 정권이 그 정치경제적 정당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 시각을 바탕으로 나름의 경제 철학을 정립하여 보다 진지한 자세로 ‘페러다임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첫째, ‘경제’란 앞서 말한대로,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이다. 그것도 신분이나 신체적 조건, 학력이나 기술적 능력 등과 관련하여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고서, 그렇다면 ‘경제 위기’란 수익성의 위기 이전에 ‘삶의 위기’로 재규정되어야 한다. 새 경제 과제 속에는 이러한 원칙적 입장이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것을 중심으로 다른 과제들을 묶어 세우는 내적 일관성도 없다.
둘째,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신바람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비전(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즉 비록 오늘은 일이 힘들어도 다음 달이나 내년이면 좀 더 나은 생활이 가능하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새 경제 과제 속에는 비록 노동자들이 고통 분담, 아니면 더 심하게 ‘고통 전담’을 하더라도 결코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밝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전망이 안보인다. 특히 여성이나 장애우, 노인, 이주 노동자들은 삶의 절망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도록 정책 방향이 돌아가고 있다.
셋째, 범지구적 시장 경쟁의 물결을 강요하는 세계화와 경쟁의 ‘한계’에 대한 문제 의식이 부재하다. 앞서 살핀대로 ‘경쟁의 한계’는 결국,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분열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생산성’ 증대 과정이 불행히도 ‘파괴성’의 정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다.
만일 새 정부가 이러한 기본 시각에 바탕을 두고 경제 개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 하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더 이상 ‘경쟁과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대와 협력’을 할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연을 단지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오만과 남용’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 그 품 안에서 고맙게 살다가 조용히 그 속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겸손과 외경’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근본 철학이 다시 정립되고 이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가 넓어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보다 구체적인 개혁을 논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시급한 경제 개혁의 구체적 과제는 다음처럼 정리된다.
첫째, 일자리 위기의 해소는 실업 보험이나 일자리 알선과 같은 사후적 방책이 아니라 새로운 고용 창출이나 노동시간 단축 등 사전적 방책을 통해 이루어진다.
둘째, 노동시간 단축과 더불어 임금 수입 감소가 불가피하다면, 주택/교육/의료/육아 제도 등을 바꾸어 임금 지출 부분을 더 크게 줄여 ‘삶의 위기’를 해결한다. 특히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삶의 여유를 누리며 차별없는 사회에 살 수 있도록 구조와 제도, 의식을 과감하게 뜯어 고쳐야 한다.
셋째, 일자리 자체의 유지나 확대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의 내용’이다. 과연 우리가 하는 일의 내용이 사회적 필요의 충족이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별 의미없는 것인지 지혜롭게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그에 도움되는 것이면 더욱 촉진, 장려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씩 척결해야 한다.
넷째,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경제의 구조조정도 이뤄져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필요의 충족이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분야는 계속 살려나가고, 그렇지 못하면 정리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의 건강과 인격의 발전, 그리고 공동체나 생태계의 건전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경제 분야나 경영 방식은 더욱 장려하되, 그렇지 못하면 단호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개혁을 우리만 추진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의미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구촌의 모든 사회가 이와 같은 원칙과 방향 속에 함께 움직여야 한다. 만일 이 지구촌 사회 모두가 ‘경쟁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더 이상 대외종속과 지배, 분열과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자립자족의 상부상조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경제 체제를 발전시키려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경쟁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구태의연한 주장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각 사회는 서서히 자율자치와 자립자족을 원칙으로 하되 서로 부족한 부분은 끈끈한 유대로 연결된 이웃 사회와 함께 해결하는, ‘네트워크형 자율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오늘날과 같은 ‘삶의 위기’가 분명히 ‘삶의 기회’로 바뀌고, 나아가 이 지구촌 사회에는 갈수록 ‘삶의 희망’이 철철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글/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