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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을 박차고 나오다

[기획연재] 장애우의 당당한 독립(1)
쇼생크 탈출, 시설에서 독립하기

본문

갇혀서 살 수만은 없다!  독립, 그 방법을 알려주마

장애인의 독립, 쉽지 않은 얘기다.
사회는 장애인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만 여기고, 장애인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 따윈 이야기하지 않는다.

복지부조차도 시설이 갖춰야할 시설물과 그 구체적인 규격은 물론 시설에서 사는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1인당 식비, 의복비 등을 10원단위까지 계산해서 제시하면서도 독립하는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많은 장애인들은 독립을 꿈꾼다. 그들의 독립을 지원해 줄 정책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장애인들은 시설을 탈출해 나오고, 집에서 말려도 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장애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그 꿈을 현실화할 구체적인 그림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독립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꾸려나가길 원하는 장애인까지 헤아린다면 그 수는 상당하다. 그러나 용기만으로 독립을 하기엔 삶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장애인의 독립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함께걸음>이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4회에 걸친 기획연재를 마련했다. 연재를 통해 실제 독립한 장애인들의 사례를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독립을 위한 준비과정을 보여주고 독립에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할 것이다

1_ 쇼생크 탈출, 시설에서 독립하기
2_ 가출이 아닌 당당한 출가를 꿈꾼다
3_ 정신지체인들의 독립 선언
4_ 정리

시설을 박차고 나오다

배덕민(40, 뇌병변1급)씨는 2006년 10월 시설에서 나온지 1년 8개월 만에 자립생활 체험홈에서 나와 완전한 독립의 꿈을 이뤘다. 그는 그간의 시설 생활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고 했다.

28살, 처음 시설에 갔을 땐 3시 반에 기상해 30분정도 새벽기도를 드리고 나머지 시간은 하루 종일 마늘 까는 일을 했단다. 밥 먹는 걸 제외하면 9시에 잘 때까지 매일 반복되는 고된 생활이었다. 시설의 비리가 외부로 알려져 폐쇄되자 그는 몇 개의 시설을 전전하다 충북 음성에 있는 대규모 시설에 입소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5시반에 기상해 아침을 먹고 나면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봤다. 게다가 젊은 아주머니들이 화장실 가는 일이며 목욕까지 담당했기 때문에 모멸감이 느껴질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점점 시설생활이 불편해지면서 그는 시설에서 싫어할만한 일들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관리자들과 갈등이 생기자 시설측은 그에게 재단 내 정신병원 독방에서 근신을 하든지 아니면 퇴소할 것을 강요했단다. 그는 그 때 퇴소를 결심했다.

“시설을 나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 무렵 이미 시설에 찾아온 한국뇌성마비연합회(이하 한뇌연) 사람들을 통해 자립생활이니 활동보조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거든요. 조금씩 자립생활의 꿈을 키워왔는데 그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거죠.”

시설을 나가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먼저 한뇌연이 생각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2004년 5월 그는 시설측 차량을 이용해 서울 한뇌연에 무작정 방문했다. 그러나 그 때는 그가 있을 수 있는 곳도 없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상담만 하고 하루만에 다시 시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에게 한뇌연의 자립생활 체험홈에서 3주간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3주 동안 독립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이후 지낼 곳을 알아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다른 자립생활센터에도 연락하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쉽게 자리가 나지 않았고 3주는 어느새 훌쩍 지나가 결국 또다시 시설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11월 드디어 비교적 장기간 한뇌연의 자립생활 체험홈에 머무를 수 있게 되면서 그는 10년간의 시설생활을 끝내고 시설을 나왔다.

수급권을 받고 영구임대주택을 얻어 독립

   
 
  ▲ 배덕민씨가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외출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조은영 기자)  
 
배씨가 시설에서 나오자마자 한 일은 시설에서 체험홈으로 주소를 옮기는 일이었다.
주소를 옮겨야 시설에서 퇴거 처리가 되고, 그래야 한 달 후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생계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처음 받은 돈이 55만원, 가족이 주는 용돈을 제외하고는 생애 최초로 받은 돈이었다.

그에게도 스스로 계획해서 삶을 꾸려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 돈으로 그는 체험홈 비용 10만원을 내고 적금을 들었다. 주택부금에 10만원, 일반적금에 10만원, 총 20만원. 다달이 내기엔 부담이 되는 액수지만 독립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게 돈을 모으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비용은 모두 최소한으로 줄였다.

체험홈은 기본적으로 6개월을 머무를 수 있고, 재계약을 하면서 연장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독립을 할 때까지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생각했기에 독립을 서둘렀다. 그러나 준비가 쉽지는 않았다. 학교를 다닌 적도, 사회생활을 해 본 적도 없었기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고. 게다가 집과 시설에만 갇혀 살았기 때문에 친형을 제외하고는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독립을 위한 정보는 주로 인터넷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차근차근 모아갔다. 그러다 시설에서 나온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 동사무소 사회복지과 직원을 통해서 영구임대아파트를 신청할 수 있다는 얘길 듣게 됐다.

수급권자라도 영구임대아파트 얻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일단 신청은 해두자는 생각에 2006년 2월 체험홈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과 신청했다. 서울시의 영구임대아파트는 주민등록상 동거인이 2명이상이어야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

그런데 운 좋게 6월에 당첨이 됐고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독립하게 된 것이다. 보증금 150만원은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둔 적금으로 냈다. 사실 아파트로 들어오면서부터 지출이 늘어 생활이 빠듯해졌지만 그래도 배씨는 현재 생활에 대해 “힘든 만큼 행복하다”고 평가했다.

현재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노들야학에 가는 일이다. 오후 6시에 시작해 하루 4시간 수업을 듣는데 그곳에서 현재 고입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업이 없는 목요일은 사람들과 모여 영화도 본다. “시설에서 살 때는 ‘이러다 죽겠지’하며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이렇게 사회로 나와서 살아보니 40년간 집과 시설에만 갇혀 산 게 분하고 억울해요. 그나마도 50살이 되서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죠.”

사회에 나와 살면서 사람들과 갈등도 겪고 어려운 일도 생기지만 그마저도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단다.

   
 
   
 

자립생활 체험홈 생활시설과 사회의 중간다리 역할

배덕민씨 사례는 특이한 경우가 아니다. 자립생활센터를 통해 시설에서 나와서 지역사회에 둥지를 튼 장애인들은 대개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현재 시설에서 생활하던 장애인들을 가장 많이 독립시킨 광주 ‘우리이웃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경우엔 비슷한 과정을 거쳐 벌써 11명을 독립시켰고, 현재도 2명이 체험홈에서 독립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자립생활센터를 통해 자립한 장애인들의 공통점은 바로 시설생활과 지역사회 독립 사이에 ‘자립생활 체험홈’이라는 형태의 중간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이들은 체험홈에서 생활하는 기간동안 독립을 준비하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이는 독립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특히 자신의 자립생활 실천사례를 발표했던 우모(35, 뇌병변1급)씨는 체험홈을 방문했던 것이 독립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고 했다.

“제가 생활하던 시설에서 중증장애인 한 명이 자립을 선언하면서 자립생활 열풍이 일 때도 전 사실 자립생활에 관심이 없었어요. 자립생활 교육에 여러번 참여하고도 제 장애가 심했기 때문에 솔직히 시설을 떠나면 절대로 생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체험홈을 방문했는데 그 시설을 보고는 제 생각이 바뀐 거죠.”

그는 그때의 놀라움은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실내에서는 물론 화장실에서도 전동휠체어를 탈 수 있고, 리모컨으로 전등과 선풍기를 작동하는 모습은 충격이었다고. 그 정도라면 자립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샘솟았고 그때부터 스스로 삶을 결정하고 책임지고 싶은 간절함이 생겨났단다. 막상 시설을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두려움과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온 삶을 이제는 바꿔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19년간의 시설생활을 마감하고 사회로 나왔다.

“아직도 사람들 중에는 제게 ‘시설에서 살지 뭐하러 시설을 나와 어렵게 사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시설에선 사실 알아서 다 해주니까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되고 계획 같은 건 세울 필요도 없는 게 사실이에요. 그게 편한 것 같겠지만 사실 그런 생활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삶에 대해 자포자기하게 해요. 난 장애인들이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자신을 되찾게 하고 싶어요.”

더 이상 장애인들은 시설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좋은 시설이라 할지라도 시설에서의 삶에는 희망도 꿈도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장애관련 복지예산 중 생활시설 관련 예산이 2위를 차지할 만큼 여전히 시설 위주의 정책을 펴고 있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 생활시설 나와 독립하고 싶은 장애인들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고,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조차 정부는 조사한 바가 없다. 앞서 소개한 자립생활센터들은 순전히 민간 영역에서 시설을 벗어나고 싶은 장애인들의 욕구에 대응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벌써 자립생활센터가 생겨나고 체험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지 5년이 지났지만 정부는 아직도 제대로 된 지원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늦어도 한참을 늦다. 이제라도 정부가 정책의 방향을 바꿔 시설을 나오는 장애인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작성자조은영 기자  blank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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