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 장애운동, 그 진보의 역사를 말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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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이념은 장애우를 바라보는 시각과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메시지〉
그렇다면 중증장애우들이 이렇게 IL이념에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함께걸음」에서는 지난 5월호에 이러한 장애계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장애우 당사자주의를 말한다’를 특집으로 낸 적이 있다. 5월호‘IL운동과 당사자주의’에서 성숙진 교수는 IL운동의 주된 동력은 시민권(Civil Right) 개념이라며 “IL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교육, 취업, 대중교통, 공공시설 등 사회 모든 영역에 접근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단지 장애우란 이유로 역시 사회 모든 영역에서 배제 당한다면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당연히 부여받아야 할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개념화였다”고 밝혔다.
이처럼 IL은 중증의 장애가 있다해도 비장애우가 가지는 인간적인 생활방식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당사자의 선택과 결정을 최우선으로 존중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 개념이다.
그리고 IL패러다임은 기존 재활 패러다임에 있던 여러 한계들- 특히 장애우는 전문가에게 보호받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수직적이고 시혜적인 한계-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IL패러다임은 재활패러다임이 제시했던 정신적, 신체적 기능향상에서 나아가 장애 당사자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차별 받았던 이들이 “IL이념은 장애우를 바라보는 시각과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메시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증장애우, 배수(背水)의 진을 치다〉
한국 사회에서 IL이념을 확산시킨 결정적 계기를 만든 것은 바로 이동권확보 운동이다.
기자는 취재를 하면서 ‘이동권연대 투쟁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운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중증장애우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2001년 오이도역 장애우 리프트 추락으로 장애우가 사망하자, 중증장애우들이 이동권을 ‘생존 문제’로 주장하면서 사회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누구도 그렇게 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몸을 던져 ‘투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동권연대 중증장애우들의 투쟁은 ‘절실함’으로 대중에게 다가섰고 사회적 공감을 만들어냈다. 때문에 정부도 더 이상 이들에게‘예산 때문에 안된다’는 핑계만 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운동방식에 대해서는 ‘과격하다’며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가 아는 중증장애우는 시설이나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본 모습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장애우들이 쇠사슬 묶고 투쟁을 하니,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이에 대해 이동권연대 박경석 대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가 쇠사슬로 묶자고 했을때 너무 과격하다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쇠사슬 하나 묶는 것에도 이렇게 고민하다가 얇은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경찰들이 하도 빨리 끊어버리니까 점점 더 두꺼워지게 되었다. 이런 싸움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동권연대를 처음 만들때 이동권 ‘쟁취’냐, ‘확보’를 위한 것이냐를 고민했다. ‘확보’가 비장애우에게 거부감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리들은 ‘쟁취’를 선택했다. 이것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문제이며 사회의 깊숙한 고리에 대한 것이다. 거부감 없이 다가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중증장애우들은 차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동권연대는 이렇게 중증장애우들의 역량을 강화시켜 활동가로 키워내고 있다. 이동권연대가 주장하고 있는 역량강화의 내용은 이렇다. 그동안 차별조차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와 격리됐던 중증장애우들로 하여금 차별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개인의 고민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훈련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전략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동권연대의 올해 큰 성과는‘장애인노인임산부등교통수단및이동보장에관한법률’을 입법 청원했다는 것이다. 법안 통과 가능성과 기존의 편의증진법과 어떻게 양립할 것이냐 등의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이는 사회 약자들의 이동권 확보를 위한 또하나의 운동성과다.
박 대표는 “중증장애우는 가장 차별 받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동권을 쟁취하지 못하면 집에서 처박혀 있어야 한다. 자기문제로 안싸우면 누가 대신해주겠는가.”라고 덧붙였다.
〈IL은 당사자 중심으로〉
그렇다면 한국에서 IL운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지금 IL운동은 연금법 제정운동, 이동권 투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진행되고 있다.
IL운동의 가장 큰 현안은 IL에 대한 정부지원을 확보해서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제도화하는 것과 IL센터를 세우는 것이다.
활동보조인 서비스는 IL운동에 있어 꼭 있어야할 조건이다. 왜냐하면 IL운동은 장애당사자 역량강화가 기본인데, 이를 위해서는 활동보조인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애 문제는, 전문가들이 획일적인 처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가장 잘 아는 당사자들의 독특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중증장애우들이 주인되어 서로 힘을 모으는 공간으로 IL센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보건복지부가 2003년 발표한 「장애인복지정책의 기본방향」을 보면 ‘장애인 역량강화를 통한 자주적 독립생활 촉진’이라는 내용이 있다. 정부도 IL에 대한 중요성을 눈치는 채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 들여다보면 기존 재활패러다임에서 나온 그룹홈-사회복지사나 생활교사가 3∼5명정도 장애우의 생활을 관리해줌-에 프로그램을 덧붙이거나 당사자 단체가 아닌 협의체등에 지원하는 것이 골자다. 따라서 보건복지부가 IL에 대한 개념부터 헷갈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보건복지부가 자립생활 지원을 위한 비용으로 5년 동안 잡은 예산은 겨우 24억이다.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의 김재익팀장은 “정부운영자금을 받는 사회복지법인이 IL이념을 들여오면서 프로그램으로 변질될 우려가 커졌다. 중증장애우는 활동보조인이 있어야 활동할 수 있고, 저상버스나 전동휠체어가 있어야 이동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 전반의 인프라 구축이 먼저다. 이것은 예산이 필요한 부분이어서 이념을 보급하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중증장애우 당사자의 역량강화를 통해 자조단체를 키우고, 이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IL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인 기반을 먼저 제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립회관의 김동호 연구개발팀장은 “운동과 서비스는 같이 해야 한다. 운동이 먼저냐 서비스가 먼저냐라고 가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복지 시스템이 미흡해서 서비스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그 수준에 맞는 서비스가 있기 때문이다. 제도화시키기 위해서 서비스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실제로 해보고 그 성과로 정부를 압박해야 하는 것이다.”라며 미묘한 입장차를 보였다.
중증장애우 자조단체들은 올해 10월 ‘한국장애인IL단체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이는 중증장애우들이 장애운동의 또 다른 중심세력으로써 나타났음을 알리는 것이며 IL이념을 운동적 차원에서 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장애연금법, 빈민구제정책이어서는 안된다〉
IL운동에서 중증장애우의 생존과 직결되는 또하나의 화두는 연금법 제정 운동이다. 그러나 정부가 예산 문제를 이유로-사실 정부가 장애문제를 바라보는 대표적인 관점이다- 난색을 표하고 있어 쉽지 않은 긴 싸움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장애연금은 노부현 정부와 한나라당의 대선 공약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공약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200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장애인연금법제정공동대책위원회(이하 연금법공대위)는 그동안 한나라당 이원형 의원을 통해서 무기여 연금을 추진했다. 그러나 최근 이 의원이 장애계의 목소리를 무시한채 일방적으로 장애인복지법을 개정해서 장애수당을 확대하는 것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후 공대위의 항의가 거세지자, 이의원의 보좌관이 찾아와서 “선거공약은 개인이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공약이라는 것이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그만인 것 아니냐. 공약은 당과 상관없다. 그리고 장애복지법을 개정한 것은 한나라 당의 입장이 아니다. 이원형 의원 개인차원에서 발의한 것이다. 때문에 당차원에서 사과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이에 연금법 공대위는 한나라당은 물론 각 당에 공식적인 입장을 요구하는 질의서를 보낸 상태다.
현재 한국의 국민연금제도는 기여를 못하는 국민은 연금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또한 기여가 불가능한 국민을 기존의 연금법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것이 국민연금관리공단 입장이다. 장애 때문에 사각지대로 밀려난 장애우들은 사회 안전망에서도 밀려나고 있다.
무기여 장애연금법을 주장하고 있는 연금법공대위 최명신은 “무기여라는 단어는 사회적인 의미에서 퇴보적인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붙인 이유는 장애우들이 일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에서 기여 자체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지금 장애인복지법 안에 있는 장애수당은 빈민계층만 받을 수 있도록 조건부로 넣어놨다. 그래서 장애수당이 일부 장애우를 구제하는 빈민정책으로 변질됐다. 장애우 연금제도는 빈민차원에서 구제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이상 국가가 혹은 사회가 사회부조형식으로 보조해줘야 하는 정책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가〉
현재 IL운동은 한국적 모델이 없는 IL이념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를 놓고 과도기에 있다. 앞에서도 말했던 장애 당사자들을 중심으로 운동적 차원에서 풀어갈 것이냐, 아니면 전문가 중심으로 서비스를 먼저 할 것이냐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첫째, 예산이 어느 쪽으로 지원될 것인가 하는 것과 둘째, 과연 예산확보만을 목표로 싸울 것이냐라는 문제의식이 포함돼 있다.
지금 IL이념을 운동으로 제도화시키고 싶은 중증장애우 자조단체 대부분은 가난하다. 제도적 지원이 없어서 프로젝트 기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얼마 안되는 정부의 자립생활 관련 예산이 복지관이나 큰 사회복지법인에만 지원된다면 겨우 싹트고 있는 장애 당사자들의 운동은 다시 위축될 형편이다.
한국장애인IL단체협의회 최용기 대표는“장애가 심해지면서 나는 복지관의 수혜자, 관리 대상자가 됐다. 나의 뜻과 상관없이. 그들이 필요한 것을 지원하려 노력했지만 나는 여전히 대상자였다. 그들은 장애우의 역량강화보다는 프로그램 진행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사업이 끝나면 관계도 일방적으로 끝냈다.”며 기존의 전문가 집단에 예산이 지원되면 서비스로 변질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기존의 복지 프로그램처럼 한정된 몇몇 장애우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IL운동 내부에서는 ‘그렇다면 예산확보에만 만족할 것이냐’라는 비판도 있다.
IL이념은 고도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자기 결정권을 중시하는 소비자 이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들이 모아지고 있다. 현실 속에서 이념에 돈과 권력들이 밀착되면서 서비스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IL이념이 대상만 바뀌어, 기존의 장애인종합복지관처럼, 또다른 서비스 하기 바쁜 상황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동권연대 박현 사무국장은“실제로 예산확보만을 위한 운동이 된다면 장애운동은 퇴화할 것이다. 경제 상황이 안좋다는 이유로 언제든지 장애우에 대한 예산은 떨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돈만 갖고 실랑이하는 것이라면 장애인권은 확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장애우가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인식과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를 압박해서 이것들을 보장할 수 있는 기초적인 법안과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예산에만 한정된 싸움은 결국은 돈에 매여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기본적으로 장애우가 사회 구조 안에서 얼만큼 떨어져 나가 있는가, 이들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에 강제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을 어떻게 투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과 철학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번 특집을 준비하면서 기자는 한계에 부딪혔다. 그것은 한국 장애운동사가 장애의 정도차를 떠나서 지체장애우를 중심으로 이루졌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장애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하고, 같은 장애가 있다해도 사람마다 더욱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장애운동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차별을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조직적으로 저항했느냐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진보한다. 더디기도 하고 어이없게 뒷걸음 칠 때도 있지만 분명 앞으로 나간다. 그 속에서 역사는 차별, 인권의 문제를 인식하는 이에게 주도권을 부여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장애운동은 또한번의 새로운 변화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중증장애우의 인권운동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당분간 장애운동의 중요한 흐름이 될 것이다. 여기에 그동안 사회에서 존재조차 인정받을 수 없었던 중증장애우들이 인간적인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분명 현재 장애운동은 좀더 ‘진보’된 운동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당사자주의를 외치며 떨치고 일어난 중증장애우들이 장애운동에 깃발을 꼿고 전환점을 제시할 수 있을지 장애계는 이들을 주목하고 있다.
글 최희정 기자/ 사진제공 한국뇌성마비연합회, 이동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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