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환우 2세 고 김형률 씨 1주기를 맞이하며
본문
"016.9558.0000, 김형률"
전화가 왔다. 죽은 고인의 전화번호다. 순간 멈칫 했지만 궁금함에 전화를 받아들었다. 그의 아버지셨다. 살아생전 그의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시며 그 두터운 자료들을 큰 배낭에 넣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던 분이시다. 이미 70대를 넘긴 노인이시지만, "아프다고 말하고 싶다. 전쟁의 피해로 내가 이렇게 아픈데, 그래서 공부도 힘들었고 장애도 생겼고, 취업도 못하는데, 언제까지 부모님의 걱정거리로 남아야 하는가!"라고 울부짖는 아들 앞에서는 그저 죄책감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네 부모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아버지셨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적 책임과 일본의 사과, 배상을 주장하는 그를 따라다니며 많은 사실을 알게 되셨다. 이제 아들에 대한 죄책감에서가 아니라 당연한 주장이자 권리라고 믿고 계신다. 아들 김형률이 바꿔 놓은 세상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형률이가 떠난 지 1년이 되었어요. 5월 28일에 부산 민주공원에서 추모제가 있는데, 시간 나면 꼭 참석해 주세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전화를 받고 나니 이맘때쯤이란 기억이 난다.
2005년 5월 29일. 그 날도 난 습관처럼 컴퓨터에 앉아 이런저런 세상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오른손은 저절로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고 눈은 그저 멍하니 화면을 응시할 뿐이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텍스트와 사진들이 무자비하게 투영되고 있었다. 그러다 내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그러면서도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컸던 충격 탓이었다. 그 후, 서러움 같은 것이 복받쳐 올랐다.
그가 그렇게 일찍 떠날 줄 정말 몰랐다. 물론 그이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예상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원폭피해자 이야기만 나오면 쉴 새 없이 서울과 부산, 합천, 평택, 그리고 일본까지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서울에 오는 날엔 찾아오지 못하더라도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했고, 어떻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그는 숨이 차오르고 헉헉대면서도 잠시 멈춰 숨고르기를 할 뿐 멈추지 않았다.
그이의 힘겨움 싸움을 알고 있지만 몸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은 계속 쌓여만 갔다. 메일이나 전화가 오면 습관적으로 "아!~"하는 깊은 한숨만 내쉬게 되었다. 너무나 먼 길이지만 그 혼자 외롭게 싸우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원폭피해 2세 환우들의 증언을 기록해 달라"는 그의 청을 다하지 못하는 자괴감 때문에, 그만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한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그 앞에서는 절대 티를 내지 못했다. 그럴수록 그에게 힘과 용기,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주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 것 같다. 아니 아픈 몸을 이끌고 그렇게 전국을 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연대를 요청하는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애씀이 아니라 자연스런 행동임을 알 것이다. 그가 손을 내민 원폭피해환우 2세들이 스스로 겪는 아픔과 고통이 있어도 "자꾸 앞에 나서지 말아라! 내가 원폭피해 2세인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라!"고 매몰차게 말했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28일 추모제에서 원폭2세 환우회를 이어받은 정숙희 회장은 "형률씨가 같이 일을 하자고 했지만, 그런 소리하려면 다시는 우리 집에 전화하지 말라고 했었다"며 예전 일을 상기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에서라도 내려다본다면 꼭 용서해주길 바란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사람을 변화시켜 나갔고 "인권" 개념을 확장시켰다. 또「원폭피해자지원에관한특별법」을 국회에 상정하는 구체적 성과도 이루어냈다.
원폭피해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결코 쉽지 않았을 그의 횡보 때문에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으니, 지금쯤 우리들 곁 어딘가에서 옅은 미소 짓고 있지 않을까.
글 여준민 객원기자
사진 김형률 추모사업회
**박스기사
김형률 씨는 자신의 원폭 피해자임을 당당히 밝히고, 생존권 보장을 요구해왔다. 그를 기억하고자, 생전에 함께걸음에 보내줬던 원고(2004.08)를 다시 한 번 요약해 싣는다.
"아프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 원폭 환우 2세의 문제는 인권의 문제 -
2003년 7월 부산에서는 한 · 일 원폭2세회 심포지움이 있었다. (중략)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원폭과 유전 문제는 한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올바른 진상규명을 위해서 국가와 시민사회가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노력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쟁점이 되고 있는 원폭2세환우에 대한 유전 문제는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인권의 문제로 인식하고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9년 동안 일본정부와 미국정부는 원폭에 의한 유전문제를 왜곡하거나 은폐해왔다. 그런데 원폭에 의한 유전문제가 국가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되어 온 문제를 한 개인이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행위를 넘어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선천성면역글로블린결핍증"이라는 원폭후유증으로 인해 20여 차례의 폐렴 재발로 이미 폐기능이 70%이상 상실되어 있고, 30%만 가지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원폭과 유전에 대한 인과관계를 규명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부당함을 넘어선 명백한 인권유린 행위다.
(중략) 나는 원폭후유증으로 고통받는 현실의 목소리를 체계화하면서 국가와 사회로부터 생존권 보장을 위한 법적인 보호를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체 원폭2세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차별 문제는 국가권력에 의해 구조화, 확대, 재생산되었다. 차별 해소는 사회가 해결할 문제지 결코 개인에게 떠넘겨질 문제가 아니다. 전체 원폭2세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차별은 사회적 · 역사적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원폭2세 환우 실태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건강한 원폭2세들이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는 원폭2세 환우들의 문제를 자기 문제화하고 이해해, 함께 해결해가려는 의지를 보여줬음 좋겠다.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원폭후유증으로 아픈 것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글 김형률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