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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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삭발에 이어, 지난 3월 28일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는 국가인권위원회 조영황 위원장실 앞을 점거하고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으로는 장애우 차별을 제대로 구제할 수 없다”며 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이하 장차법) 제정을 요구하는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차별금지법안이 예정대로 5월초 국회에 제출되면 장애인차별금지법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
이에 현재 장차법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으며, 장애계에서 말하는 인권위 차별금지법의 문제는 무엇인지 <함께걸음>이 조명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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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법, 인권위 차별금지법에 발목
지난 3월 28일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이하 장추련)가 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조영황 위원장실 앞을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날은 인권위가 막바지 법안 정리 작업을 위해 차별금지법 시안을 공개하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인권위 배움터에서 공청회를 연 날이었다. 이날 장추련은 “그동안 장차법과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이 서로 협력적 관계에서 입법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차례 간담회를 요청했으나 입법발의를 앞두고 종합적인 검토를 위해 공청회를 여는 시점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며 “차별금지법 제정 분위기의 여파로 장차법이 묻혀버릴 가능성이 우려돼 점거농성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인권위의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으로 차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장애계는 이를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인권위에서 공개한 차별금지법 시안에 따르면 이 법이 장애우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제대로 금지해 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인권위의 이러한 움직임이 현재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독립적인 장차법 제정을 방해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9월 전 장애계의 염원을 담아 국회에 입법발의 된 장차법은 우여곡절 끝에 발의 6개월만인 지난 4월 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안건으로 상정되었으나 “인권위의 차별금지법과 비교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유로 구체적 심의는 또다시 보류되고 말았다. 장애계 입장에서 볼 때는 6년이나 준비해 온 장차법이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
인권위, 차별금지법 시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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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가 공개한 차별금지법안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피해를 구제하며, 차별을 예방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으로 모두 4개의 장, 44개 조로 구성돼 있다.
이 법안은 성별, 장애, 나이, 인종, 학력, 종교, 사상, 인종, 피부색, 고용형태, 성적지향, 사회적 신분 등 20개의 이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개인이나 집단을 배제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차별’이라고 정의하고 △고용 △재화, 용역, 교통수단, 상업시설, 토지, 주거시설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법령과 정책 집행에서의 공권력 행사 또는 불행사 등의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또 국가기관 등의 차별시정의무를 두어 차별시정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했으며, 차별예방을 위한 조치로 △참정권 및 행정서비스 이용 보장 의무 △수사·재판상의 동등대우 △사용자, 교육기관장의 편의제공 의무 △의료서비스 제공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인권위의 권리구제 수단도 대폭 강화됐다. 우선 종전과 동일하게 조정 및 시정권고를 할 수 있으며, 특별한 권리구제 조치로서 제한적 범위에서 시정명령권을 발동하거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소송지원이 가능하며, 차별행위에 대한 입증 책임전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 차별행위가 악의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법원에서 통상적인 재산상 손해액 이외에 별도의 배상금(손해액의 2~5배)을 지급하도록 판결할 수 있게 했다.
언뜻 보기에는 장애계가 그동안 요구했던 구제방안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차별금지법으로 통합되더라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이는 천만의 말씀. 도대체 무엇이 다를까. 왜 독립적인 장차법이 제정돼야 한다는 것일까.
사적영역의 차별, 인권위 법안으로는 구제 안 돼
장추련 배융호 상임집행위원은 우선 “인권위에서는 통합적인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장애를 포함한 모든 영역의 차별을 금지하겠다고 하지만, 그 때문에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은 보편성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며 “따라서 이 법으로는 보편성과 함께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 장애차별을 효과적으로 구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즉, 생활 모든 영역에서 전생애에 걸쳐 발생하는 장애차별의 특수성을 성, 나이, 학력 등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이 모두 포괄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사적영역에서 발생되는 차별을 규제할 수 있는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장추련 법제정위원회 김광이 부위원장은 “장애우의 경우는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조차 일상적으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며 “이러한 차별은 은폐돼 있어 좀처럼 차별로 잘 인식되지는 않지만 그 결과가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장애의 경우엔 다른 차별사유와는 다르게 사적영역에서 발생되는 차별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적영역에서 장애차별이 발생하는 예는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분명한 물리적 폭력이 없을지라도 가족이 장애를 이유로 장애가 있는 가족원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집에서만 보호하려고 하는 등 외부와의 소통을 제한하거나, 학교를 보내지 않아 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하거나, 장애를 이유로 결혼 및 모부성권을 부정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외에도 가족으로서 재산권을 행사할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시설 입소를 강요당하는 등의 차별도 드물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차별을 규제하고 있는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사적영역에서의 차별을 규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김 부위원장은 “대부분의 장애우는 국가가 개입하기 어려운 사적 영역에서부터 차별을 받기 때문에,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이 차별 받지 않도록 보장한다는 공적영역으로는 나와 보지도 못한다.”며 “이러한 차별은 당장 장애우의 현실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문제처럼 삶의 전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은폐되어있는 차별을 막지 못한다면 장애우에게는 실질적 의미가 있는 법이 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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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의 강력한 구제수단, 혜택 받을 장애우 적어
인권위 차별금지법의 또다른 문제는 현재 인권위 법안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강력한 구제수단이 법안의 일부에만 적용된다는 데 있다.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안 42조에 따르면 장애계에서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던 시정명령, 징벌적 손해배상, 입증책임의 전환은 고용에서의 차별과 괴롭힘을 당했을 때만 적용된다.
장추련 박옥순 사무국장은 “이는 사실상 차별의 문제를 고용에 한정지은 것과 다름없다.”며 “이러한 제한 규정 때문에 인권위 차별금지법으로는 고용 이외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차별을 실질적으로 구제하거나 장애차별 시정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편의제공 등을 강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고용될 수 있는 한정된 장애우만 이러한 강력한 구제수단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셈이고 대다수의 장애우들에게는 강력한 구제수단의 도입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또, 인권위 법안중 정당한 편의제공과 관련된 조합은 내용이 포괄적으로 규정돼 구체적이지 않다는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정당한 편의제공이란 장애우가 비장애우와 질적으로 동등하게 시설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이에 필요한 조치를 위하는 것을 말한다.
장애우가 실생활에서 겪고 있는 차별은 다른 소수자 집단과 달리 그것이 정당한 편의제품과 같은 적극적 차별이든, 소극적 차별이든 차별행위만 금지해선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다. 적극적인 차별수정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장애우에 대한 차별은 상존하게 된다. 장애우들은 이제까지 차별이 갖가지 핑계로 시정되지 않는 경험을 해왔다. 따라서 실질적이고 강력한 구제조치와 함께 정당한 편의제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으면 실효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게 장애계의 입장이다.
장추련 법제위 김광이 부위원장 역시 이에 대해 “장애우에게 정당한 편의제공 여부는 차별 발생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차별판단의 요소”라고 강조하면서 “정당한 편의제공이 차별예방의 영역이 아닌 차별금지와 동일한 의미에서 법률로서 다뤄져야 하며 구체적 내용과 방법이 법률로서 명시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당한 편의제공의 경우는 편의시설 뿐만 아니라 비용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법률상 명확하지 않다면 차별행위자가 이를 피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장애차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장애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형성되어있지 않아서 사회적으로 그것이 차별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차별시정기구가 일원화 될 경우 이 위원회가 장애차별에 대한 충분한 감수성을 가지고 장애차별을 판단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 이라는 게 장애우들의 판단이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의 김동범 사무처장은 “현재 인권위에 진정되는 사건 중 장애로 인한 차별이 사회적 신분차별 다음으로 가장 높음에도 불구하고 인권위 구성원에는 여성만 4명이 할당되어 있을 뿐 장애우를 대표할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현재의 인권위 체제를 비판하면서 “현행 소위원회가 아닌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장애차별을 시정해갈 수 있을 정도의 독립적인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장애계에서 원하는 것은 ‘장애’와 ‘장애차별’에 중점을 두고 전생애에 걸친 모든 생활영역에서 차별을 근절할 수 있도록 설계된 독립적인 장차법을 제정하는 것과 장애차별의 감수성과 전문성을 갖춘 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별도의 법제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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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단체들은 “아직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에 대해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다”면서도 “이 법안이 제정되면 아직까지 두드러지지 못했던 소수자 운동이 활성화되고 반차별 행동을 촉발시키는 등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올해 하반기에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안이 국회에 상정되면 일단은 인권위의 법안을 지지해서 통과시키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또 일각에서는 “다른 소수자들의 경우에는 개별적으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위해 움직이기 힘든 측면이 있기 때문에 장애계가 장차법을 따로 추진하면 다른 소수자들과 분리될 가능성도 있다.”며 “개별법 성격을 지닌 장차법이 통과되려면 기본법의 성격을 지닌 인권위의 차별금지법 통과가 선행될 수밖에 없으니 올해는 차별금지법으로 가고 다음해 장차법을 추진해 가야 한다.”는 보다 분명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반면 새사회연대의 경우에는 인권위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의견서를 내고 “인권위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신경 쓰는 것보다는 관련법에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재 장추련은 여성단체 등의 소수자 단체에 간담회를 요청해 놓은 상황. 이 간담회에서 이러한 단체들의 입장이 조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장애계가 사회에 만연한 차별적 기제를 근절하겠다는 취지의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계는 다만,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을 기본으로 더 넓은 영역에서 더 심각한 차별에 신음하고 있는 장애우들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독립적인 법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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