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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일방적 이해를 강요하는 "친환경적"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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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대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관악산 자락에 위치해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악산의 중심에서 관악산을 갉아먹으며 위치해있다. 산업단지 같은 건물들이 난개발의 표상처럼 관악산을 뒤집어 놓고 있어, 그 학교 학생인 나는 좀 더 환경친화적이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체계적으로 설계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최근 서울대는 ‘에코 켐퍼스 사업‘을 확정하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걷고 싶은 길‘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사실 휠체어를 타고 이 학교를 다니는 입장에서는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괜히 환경친화적으로 바꾸겠다고 바닥에 자갈이나 깔지는 않을지, 계단 하나라도 더 설치하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활동하는 ‘장애인권연대사업팀‘에서는 공사가 시작되자마자 학교본부를 찾아가 우려되는 부분을 지적했다. 그러자 다행이도 본부 측에서는 “오히려 장애인들이 다니기 더 좋아질 것이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방학이 끝나갈 즈음 학교를 둘러보니 학교는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었고, “우회로로 가시오”라는 표시만 놓인 채 몇 안되는 (휠체어가 통행 가능한) 길들은 막혀있었다. 그래도 공사가 끝날 때 즈음이면 나아지려니 하며 어찌어찌 다니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통행량이 매우 많던 장소에 그야말로 ‘환경친화적‘인 나무소재의 계단을 설치하고 있었다. 물론 그 길은 어차피 경사각도가 심해 혼자서 이동하기는 어려운 길이었지만, 그래도 통행량이 아주 많은 주요길목이었고, 무엇보다 학교본부가 처음 했던 말과 달라 황당했다.
나는 당장 학교 본부로 찾아갔다. 그랬더니 “비록 논의과정에서 빠진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나, ‘우회로‘가 가까운 곳에 있고, 어차피 경사가 급해 장애학생의 이동권을 침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이미 절반이상 계단은 만들어졌고, 실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회로도 있었다. 그런 판에 처음 했던 말과 다르다고 그걸 철거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논리를 짚어보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접근할 수 없는 강의실을 접근이 가능한 강의실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하면, ‘비장애학생의 동선이 흐트러지는 선의의 피해‘ 때문에 안 된다고 하여 수업듣기를 포기하거나 맨 구석 자리에 찌그러져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수업을 받아왔다.
중요한 위치의 계단 때문에 경사로 설치를 요구하면 ‘계단이 좁아 비장애학생이 경사로로 우회할 수밖에 없는 선의의 피해‘ 때문에 안 된다고 하여 그 ‘뻘쭘한‘ 리프트을 타거나, 남들보다 네 다섯 배쯤 돌아서 다니곤 했다.
그런데 장애학생은 이해하고 ‘우회로‘로 다니면 된다는 말은 어찌 너무 자연스럽다. 이것 좀 모순 같다. 하지만 내가 다니는 학교가 예뻐지고 친환경적이 된다는 데야 반대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언제고 되풀이 되는 이 공사 현장의 인식은 언제쯤 ‘친장애‘적이 될지 의문이다. 환경에는 산도 나무도 있고, 인간도 있다. 인간에는 여 / 남도 있고 장애 / 비장애도 있다.
언제나 장애인은 부수적인 것으로 배제되고, 찾아가서 항의하면 “이해해라”라는 식이다. 친환경적이고, 친학생적이고, 친여론적인 모든 사업과 제도들은, 언제나 장애인들을 ‘이해‘시키며 출발한다.
물론 이는 비단 서울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얼마 전의 청계천 공사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리들이 펼쳐졌다. 그렇게 ‘일단 만들고‘나면 선의의 피해를 들어 더 이상의 공사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그 ‘선의의 피해‘의 논리를 여론이라며 도출한다.
사실 사업의 주체들이 조금만 협의하고 함께 고민하면 진짜 친환경적인 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단을 철거하라고 말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조금 돌아가겠다. 겨울철 비장애인들에게도 미끄럽지 않고 안전하며, 더 아름다운 길을 만들기 위해 계단이 불가피하다면야, 그 정도 우회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의 생존과 권리를 위해 비장애학생의 ‘우회‘가 불가피 할 때에도, 좀 같은 무게로 ‘이해‘시키고 ‘이해‘하려는 서울대, 또한 그러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의의 피해를 ‘선의의 이해‘가 되도록 하는 연대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된다면야 걷고 싶은 길 공사로 몇 십미터 쯤 휠체어 밀고 돌아가는 것은 그리 불편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친환경적이고, 친대중적이고, 친여론적인 것을 위해 장애인들은 언제나 ‘이해당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문제의 핵심은 바로 비장애인 중심의 모순적인 논리와, 반복되는 無개념에 있는 것이다. 

글 김원형(서울대 사회학과)

  *글쓴이의 요청에 따라 ‘장애인‘을 그대로 적습니다.

작성자김원형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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