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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200호 특별기획 (1)| 기념 좌담

장애계 언론인이 말하는 한국의 장애운동사

본문

  장애우는 사실상 20세기 역사 속에서 소외된 민중이었다.
분명히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갔지만 사회 전면으로 나서지 못한 장애우의 역사는 비주류로 취급되어 생략되기 일쑤였고, 그나마 기록된 역사는 주변부의 역사로 대부분이 남의 손에 의해 기록된 것들이었다.
그런 장애우의 역사에서 장애언론의 탄생은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당대에는 정보를 널리 알리고 감시하는 역할을, 후대에는 역사의 자취를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할 무거운 책무를 지닌 장애언론. 그러한 장애언론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사람들이 <함께걸음> 200호 발간을 맞이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 2004년 3월부터 2004년 4월까지 12차례에 걸쳐 연재한 “함께걸음을 통해 본 장애우 운동사”를 정리하는 자리로 마련된 이 좌담회는 지난 8월 19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김정열 소장의 사회로 2시간 반에 걸쳐 진행됐다.
장애운동사에 기록된 현장 하나하나를 찾아다니며 장애우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알렸던 장애언론인.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한 장애운동사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80년대 초반, 허울뿐인 ‘장애인의 해’
; 잇따른 장애우 대학입학 거부 사건

김정열 : 함께걸음 200호를 맞이해 장애운동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귀한 걸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좌담에서 전체 장애운동사를 다루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어서 함께걸음에서 기사로 다뤄졌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중요한 사건인데 빠진 것이 있다면 그때그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함께걸음이 창간된 88년 이전의 장애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방귀희 : 81년만 해도 ‘장애운동’이라는 표현이 없었어요. 그때는 ‘장애인 행사’였죠. 그런 ‘장애인 행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고, 거기서 나눠주는 도시락을 감사(?)하게 먹었던 기억이 가장 인상에 남네요.
당시 행사라고 하면 재활협회 주관으로 열린 ‘장애인의 날’ 행사였는데 그때 나눠줬던 빵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만큼 당시엔 굉장히 행복해 했어요. 그런 행사 자체도 드물 때였으니까.
백종환 : 그 이전엔 ‘재활의 날’이라고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진행했는데 그게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애인의 날’이 됐죠. 이후 ‘재활의 날’ 행사는 장애우단체들이 ‘재활증진대회’라고 해서 이어갔던 기억이 나네요.
방귀희 : 그땐 지금처럼 문제제기도 없었던 거 같아요. 요즘과 달리 그땐 그냥 그렇게 함께 모이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던 시절이라 운동이라는 걸 찾아보기 어려웠죠.
물론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당시 큰 사건으로 82, 83년에 장애우 대학입학 거부 사건이 있었어요. 82년에 가톨릭 의대에서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해서 제가 “작년이 장애인의 해였다는 걸 몰랐냐”면서 취재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정립회관 황연대 관장이 울면서 인터뷰를 했죠. 동의대 약대에서도 20명이 한꺼번에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고.
또 하나 82년에 큰 충격을 안겨줬던 사건이 장애우 법관임용 탈락사건이었어요. 당시엔 굉장히 큰 사건이었어요. 81년 UN이 정한 ‘세계장애인의 해’라며 축제분위기였는데, 82년으로 접어드는 겨울에 이런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장애우들을 암울하게 했죠.
그리고 84년 김순석씨가 서울시장 앞으로 보낸 유서가 기억이 나는데, 전 그게 장애운동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에 유서 전문이 조선일보에 보도됐어요. “시장님, 왜 저희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이렇게 시작되는 유서였는데, 지금도 가끔 인용할 만큼 감명 깊었어요.
김정열 : 그 외에도 80년대에는 의식 있는 장애우단체들이 생겨난 해이기도 합니다.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이하 전지대연) 등 80년대 중반에 사회과학을 공부했던 장애우 그룹들이 나오면서 소수이긴 했지만 장애우 운동 그룹들이 생겼어요.

88년, 장애운동의 신호탄
; 장애민중을 위해 시작된 장애인올림픽 반대운동

 

백종환 : 전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장애계에 들어온 게 87년이라 그 이후 밖에 모르는데, 87년부터 장애인올림픽 반대운동이 있었어요. 저는 이것이 장애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기점이라고 생각해요.
김동범 : 그 운동은 장애우 스스로에게도 그렇고 대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중요한 사건이었죠.
김정열 : 그 말씀을 하시니까 장애인올림픽에 반대하면서 명동성당 앞에서 단식투쟁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당시엔 돈이 없어서 거기서 먹고 자고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그냥 굶었던 거죠. 10월이라 밤이 되면 또 얼마나 추웠던지… 그때 생각이 나요.
김동범 : 함께걸음 역시 88년 장애인올림픽 반대부터 시작했잖아요. 그런 면에서 당시 함께걸음의 논점도 새겨볼만 하지 않을까 싶어요.
김정열 : 당시엔 장애인올림픽 반대운동 때문에 “니들이 국가 대사를 이런 식으로 폄하하고 이용할 수 있느냐”면서 무척 많은 비난과 욕설을 들었어요. 비판은 커녕 온 국민이 올림픽에 개최에 기뻐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올림픽을 반대했던 것은 ‘장애민중’ 때문이었죠.
당시 장애우관련 예산이 올림픽 때문에 30억이나 늘었는데도 50억이 될까했는데, 장애인올림픽 예산이 2백억이나 됐거든요.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장애우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잠시 들렀다 갈 외국의 배부른 장애우들을 위해서 2백억을 사용할 수 있냐는 게 당시 장애우올림픽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생각이었죠.
함께걸음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장애인올림픽이 긍정적인 측면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아픔을 간과할 수는 없다”는 입장의 글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88년대, ‘장애해방’의 깃발을 올리다
; 장애우 단체 태동기

방귀희 : 당시에 ‘한국장애인총연맹’이 있었어요.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랑 이름이 비슷해서 헛갈리기도 하는데 이 단체 이야기도 해야죠.
김정열 : 87, 88년을 지나오면서 사회운동을 했던 그룹이 진보적인 장애우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어요. 그래서 평화통일연구회(평민련)의 이우정, 문동환 선생님 등 재야 인사들이 많이 참여한 단체가 만들어졌죠. 당시 상임대표가 김성재 교수님이었고, 고 황인철 변호사를 비롯해 채규철씨, 육병일 관장님, 강주해 목사님이 공동대표로 활동했었죠.
백종환 : 플래카드나 깃발에 쓰였던 ‘장애해방’이라는 문구가 한국장애인총연맹이 뜰 때 처음 나왔어요.
김정열 : 그땐 ‘장애해방’으로 완전히 도배를 했었죠. 목발을 짚고 있는 모습을 담은 큰 그림에 ‘장애해방’이라고 써서 걸기도 했고요. 그런 그림을 보기 어려웠던 때라 출범식에 왔던 사람들도 장애우단체 출범에 무슨 걸개그림이냐면서 다들 놀랐죠.
김동범 : 그 후 92년까지 약 2년 정도 장애해방이라는 용어가 대표적인 용어로 사용됐어요.
김정열 : 그 장애해방이라는 용어는 ‘구스노끼 도시오’의 ‘장애해방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나온 말이었죠. 이 책이 출간되면서 일본에서 처음으로 장애해방이 일본 전체의 화두가 됐고 일본 전체의 운동이 완전히 장애해방으로 간 적이 있어요. 함께걸음에 그 책을 번역해서 연재했죠.

함께걸음, 언론 아닌 사상지

▲1990년. 농성 중 백골단에게 끌려가는 장애우의
모습. 당시 함께걸음의 진보적인 색체를 잘 드러
내주는 사진이다.

백종환 : 저는 함께걸음 창간호부터 봤는데, 당시 함께걸음은 굉장히 진보적인 잡지였어요. 사진만 해도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가 등을 군화발로 채여 옷에 선명한 자국이 남은 모습을 포커스로 잡아서 싣고 그랬죠. 양미숙 기자 등 처음에 잡지를 만들어가던 사람들의 생각 자체도 매우 진보적이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젊은 장애우들이 사회에, 장애운동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기초 작업을 함께걸음이 하게 됐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언론을 이끌어낸 측면도 강했죠. 그런 측면에서 함께걸음이 장애계에 굉장히 큰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장애인복지신문도 그러한 역할을 했지만 함께걸음은 잡지로서의 특유한 문체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에 전지대연이나 울림터 등의 모임도 있었지만 그들의 활동소식은 소수의 사람들만 알았고 전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함께걸음이 나오면서 전파되는 속도가 아주 빨라졌죠.
방귀희 : 근데, 당시엔 사람들이 함께걸음을 언론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장애인복지신문이 나오고 나서부터 함께걸음도 언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 거지.
김동범 : 함께걸음은 ‘사상지’였죠. (모두 웃음).
방귀희 : 맞아요. 사상지였지. 예전엔 함께걸음 보고 “빨갱이들 아냐”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함께걸음을 언론이라고 생각하게 된 건 오히려 다른 장애관련 신문사들이 생겨나고 나서부터였죠.
김동범 : 함께걸음은 특정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했기 때문에 여느 언론과는 달랐어요. 옛날 군사정권 같으면 폐간되고 발행인이 끌려갔을걸요. (모두 웃음).
백종환 : 언론사라고 하면 언론이 중심이 돼서 끌어가는데, 함께걸음은 연구소에서 큰 주제를 가지고 사업을 끌어가면서 그 사업의 일환으로 발간된 것이기 때문에 언론보다는 연구소 장애운동의 이미지가 더 강했죠.
김동범 : 당시 함께걸음은 자기 나름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계도하고 사건을 문제화하는데 초점이 있었지 일반적인 사건을 보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방귀희 : 그래서 아무래도 일반 사건 보도는 좀 떨어지는 측면이 있었죠.
전 장애운동사의 가장 큰 발자국은 장애관련 ‘신문사’의 탄생이라고 봐요. 81년부터 장애우 문제를 지속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창구로 KBS ‘내일은 푸른하늘’이 방송되기는 했지만 신문사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구전문학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거든요. 신문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논설도 들어가고 그랬죠. 신문사보다 함께걸음이 먼저 나오기는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보는 신문의 탄생은 월간지와는 또 달랐어요.
하현진 : 장애인복지신문은 89년에 창간했는데, 장애인올림픽 반대운동이 창간의 동기가 됐다고 해요. 그 당시에 장애청년들이 그들의 문제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문이었던 거죠. 때마침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면서 그것을 모델로 장애전문 신문을 창간했다고 들었어요. 신문사가 생기던 초창기에는 미친짓이라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다고 하던데, 당시의 그런 노력들이 최근 장애언론을 이끌어가는 토양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김동범 : 장애언론의 탄생은 장애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이었어요. 함께걸음을 포함해서 장애언론들이 생겨나면서부터 장애계 내부적 감시장치 즉, 인권지킴이 역할을 하는 기구가 생겨난 거죠.
장애언론이 생기기 전에는 장애우를 보호하거나 수용하는 건 다 좋은 일이라는 사회인식이 팽배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모두 있을 수 있는 일로 봤죠. 그런데 장애언론이 생겨나 그런 수용시설의 비리들을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시설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시각과 방향성이 잡혀가게 됐죠.
결국 그러한 장애언론의 본연적 역할이 장애우 인권을 현재 수준에 이르게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게 장애언론의 가장 큰 역할이었다고 생각해요.
백종환 : 언론이 그런 역할을 하게끔 기름을 부어준 것은 공대위 등이 출범해서 뉴스를 생성해 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시설 탐방이나 인물 인터뷰정도 밖에 안됐을 텐데, 공대위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뉴스를 생성해주니까 거기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받아 안아서 기사를 쓸 수 있었던 거죠. 또 그런 기사에서 피드백을 받으면서 새로운 논점과 초점을 만들어 나가기도 했고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죠.
김동범 : 말씀하신대로, 장애운동이나 장애관련 제반분야가 발전하는 데는 장애언론과 장애운동 사이의 시너지 효과가 분명히 있었다고 봐요.
제가 장애인신문에서 일할 때 복지부와 관련된 비판적 기사를 실었더니 대뜸 복지부에서 전화를 해서 “니네가 뭔데 감 놔라 배 놔라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니까 당시 재활과에 언론사가 찾아가 취재한 게 처음이었던 거예요. 그러니 이런 것도 있나 할 정도로 인식이 없었던 시절이었죠. 지금은 정부도 장애언론을 통해 보다 많은 장애우들에게 그들의 사업을 올바르게 알리려고 하고 기왕이면 좋게 비치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장애언론이 감시자적 역할과 홍보의 역할을 동시에 적절하게 잘 수행해온 셈인 거죠.

89년, 3천명의 장애우가 모인 여의도 대투쟁
; 장애인복지법과 고용촉지법 제정을 위해 목숨 걸다

▲1989년 장애우들이 "장애인복지법 전면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을 내걸고 여의도 순복
음교회에서 점거농성하던 모습니다.
백종환 : 좀 전에 말씀드린 공대위가 생긴 게 89년이었어요. 90년으로 넘어가기 전에 공대위를 꾸려서 장애인복지법을 전면 개정하고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제정했는데 그게 범 장애계가 연대를 꾸렸던 최초가 아니었나 싶어요.
89년 11월 11일에 “장애인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을 위한 공동투쟁”이라고 해서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3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투쟁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렇게 많은 장애우들이 모인 것도 그게 아마 처음이었을 거예요.
그 전엔 주로 연구소나 전지대연, 울림터 같은 소수 그룹들이 주로 모였는데 이때는 대규모 투쟁이었어요. 전국에서 32개 단체가 모여서 함께 투쟁을 했으니까.
그날 이거 취재하느라 딸 태어나는 것도 못 봤기 때문에 기억이 아주 생생합니다. (웃음).
김정열 : 이게 본래는 사당에 가서 열흘씩 단식투쟁을 하기로 한 거였어요. 그런데 신민주공화당에서 열흘, 민주당에서 열흘, 평민당에서 열흘 단식을 하고 마지막으로 민정당에 갔는데 거기는 경찰들이 쫙 둘러싸서 못 들어갔죠. 그리고 그 열기를 몰아서 다 머리 깎고 여의도에서 대투쟁을 하게 된 거죠.
백종환 : 그때 참 대단했던 것 같아요. 집회 초입에 울림터에서 흰 소복을 입고 퍼포먼스도 했어요. 생각해보면 그때가 어쩌면 지금 보다 더 나았던 거 같아요.
김정열 : 정립회관 당시 황연대 관장님하고 재활협회 이청자 부장님도 사람들 모여 있는 옆에다 차를 대고 응원할 정도로 열기도 대단했죠.
백종환 : 직원들도 그랬어요. 그때 도로를 점거하고 투쟁했는데, 재활협회 직원들은 반공무원이라고 생각했을 때라 도로를 점거하고 들어와서 같이 앉지 못하고 인도에서 서성이는 형식으로 응원을 했죠.
김정열 : 당시엔 지금의 남부장애인복지관 자리에 재활협회가 있었는데, 그날 거기 몰려가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여기서 회귀할 거냐, 죽을 때까지 갈 거냐를 놓고 밤새 토론이 붙었어요. 그때 우리가 “이건 통과될 때까지 간다”라고 결정을 했고 그래서 12월 16일 양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투쟁을 풀지 않았죠.
당시 이철용 국회의원이 국회 내 소식을 전해주면 우리가 여기 저기 지구당을 찾아다니면서 농성을 했죠. 그리고 김성재 교수, 이성재 변호사가 집회장소, 농성장소, 국회 등에 다니면서 연설을 했는데, 굉장했어요.
돌이켜보면 이 양법안을 통과시키던 때에 최초로 장애우단체간 화합이 이뤄졌었던 것 같아요. 장애우단체 모두가 한 목소리를 냈으니까.
백종환 : 그땐 장애우 단체간 반목이 심할 때가 아니었어요.
김동범 : 왜냐면 그때는 정부에서 예산을 받는 단체가 없었거든. (모두 웃음). 다 어려울 때니까 뜻만 맞으면 함께 했던 거지.
김정열 : 왜요? 그땐 예산 받는 단체들도 함께했어요. 함께 투쟁까지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재활협회, 정립회관, 복지진흥회, 삼육재활원 모두 공대위에 들어왔어요. 그때 공대위에 들어오지 않았던 건 지체장애인협회(이하 지장협) 뿐이었죠.

91년, 거리 장애우들의 분노 폭발
; 앵벌이 장애우 뒤엔 폭력조직??

▲1991년. 장기철 회장의 발언에 분노한 장애우들이
장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지장협 사무실 앞 8차선
도로를 점거한 모습.
방귀희 : 그러게. 장애쪽에서 가장 중요한 얘기 중에 하나는 지장협 고 장기철회장 얘기잖아요. 다른 건 빨리빨리 넘어가요. (모두 웃음). 그래도 지역이기주의 이야기는 하고 넘어가야겠네요.
김동범 : 그 얘기를 하면 천안 인애학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때 아까 그 해체됐던 공대위가 다시 멋있게 떴었죠. 집단이기주의에 반발해서 장애우단체들이 모였던 게 천안 인애 학교가 가장 처음일걸요?
김정열 : 86년인가 강서재활원을 지역주민들이 반대했던 게 있었어요. 그때도 장애우단체들이 대응을 하긴 했었죠. 그러나 그때는 장애당사자의 관점이 아니라 시설의 관점이었고, 장애계의 공동대응은 아니었어요.
근데 천안의 경우에는 공립 특수학교였거든요. 그러니까 장애인단체들이 공동대응에 나섰던 거죠. 게다가 당시에 조사해보니 반대했던 사람들이 엄밀히 따지면 지역주민도 아니었어요. 다 서울지역에 살면서 그곳에 땅을 사뒀던 땅주인들이 땅값 떨어진다고 반대를 했던 거죠. 이때 생긴 공대위가 장대협(한국장애인복지공동대책협의회)으로 이어졌고 그게 다시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으로 이어지고… 아무튼 91년도에 장애우 단체간 연대조직이 다시 활발하게 살아났죠.
말씀하신 지장협 장기철 회장 사건은 장 회장이 9시뉴스에 나와서 “구걸하는 장애우 뒤에 폭력조직이 있다”고 말한 사건이었는데, 그 바람에 장 회장이 영세장애우들의 분노를 샀죠. 그때 PD수첩에서도 이걸 다뤘어요.
방귀희 : 그 사건으로 고 장 회장이 잠시 도중하차 했었죠?
김정열 : 그랬다가 8개월쯤 지나서 다시 복귀를 했죠.
백종환 : 이게 의도적 발언이 아니었어요. 장 회장이 경찰청에 방문했다가 경찰청장을 만나서 “구걸하는 장애우 뒤에 돈을 갈취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했는데, 동아일보 기자가 지나가다 그 얘기를 듣고 사회면에 크게 내보낸 거죠.
그 기사가 돼서 9시뉴스에 나가게 되니까 장 회장이 자가발전이 된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이야기까지 진행을 시켰냐면 “앵벌이를 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장애우를 만든다”는 이야기까지 나가게 된 거죠. 풍문으로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는데, 그런 이야기까지 언론에 나와서 해버린 거죠.
김동범 : 그럼 장 회장이 왜 경찰청에 찾아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왔느냐가 또 중요한 거 아니에요?
당시 장 회장은 장애우연수원이 필요하다면서 구걸하고 있는 장애우들 잡아다가 연수원에서 교육시키면 장애우도 구걸을 안 하고도 벌어먹고 살 수 있다고, 그러면 구걸하는 장애우도 다 없어진다고 주장했어요. 그렇게 연수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다가 “장애우들이 구걸해서 자기들이 먹는 것도 아니다. 정작 돈 버는 건 뒤에서 관리랍시고 돈을 갈취하는 폭력조직이다”라고 얘길 하게 된 거죠. 그걸 백종환 씨 말대로 우연히 동아일보 기자가 듣고 취재를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언론이 붙으니까 조금 더 오버해서 비장애우 데려다가 다리를 잘라 장애우 만든다는 얘기까지 하게 된 건데, 그걸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척 충격적이었죠.
그러니까 경찰들은 조사를 한다고 거리에서 앵벌이 하는 장애우들 전부 잡아가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경찰이 그렇게 붙잡아다 놓고 “너 뒤에 누가 있어?”하고 추궁하니까 길에 나가서 앵벌이를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간 거예요. 나가야 먹고 사는데, 나갈 수가 없으니까 영세장애우들 불만이 전부 장 회장에게 쏟아졌죠.
게다가 PD수첩이 장 회장 발언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추적해 들어가면서 이게 장 회장이 연수원을 지으려고 한 의도적 발언이었다는 게 드러났어요. 그러니까 장 회장이 무책임하게 발언하는 바람에 괜히 성인장애우들만 못살게 됐다고 하면서 이들이 지장협 사무실에 찾아가서 때려 부수고 장기철 회장 물러나라고 했죠. 그때 그래서 장 회장이 잠시 물러났던 거죠.
방귀희 : 근데 그게 전혀 없었던 사실은 아니었다면서요?
백종환 : 절반 정도는 실제 봉고차로 장애우를 실어 나르면서 앵벌이 한 돈을 나눠먹었어요.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그나마도 그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해주면 나올 수가 없으니까 앵벌이조차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깍두기 형님이든 뭐든 그렇게라도 돈을 벌겠다는데 그 조차도 못하게 해버린 데 분노했던 거죠. 그리고 사실 폭력조직보다는 대부분 상부상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데다가 경찰 때문에 그런 것과 관계없이 혼자 앵벌이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노점 하는 사람들조차도 뭘 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 되니까 그 사람들의 분노까지 전부 합쳐진 거였죠.

빈곤 문제, 아직도 끊이지 않는 장애우들의 자살

▲1996년. 92년 박승학 씨, 95년 3월 최정환 씨가 스스
로 목숨을 끊은 데 이어 같은 해 11월 이덕인 씨가 아
암도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함께걸음은 이
를 계기로 장애우들이 노점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
던 이유를 집중 분석하기도 했다. 사진은 이덕인 씨 사
망 후 그가 활동하던 전국노점상연합회 회원들이 집회
하던 모습니다.
방귀희 : 근데 사건을 돌아보면 장애우 자살사건이 많았어요. 92년 박승학씨의 자살은 단속반원에게 포장마차를 뺏겨서 그랬던 건가요?
김정열 : 이게 이때 이후로 계속 이어진 사건이었죠. 김순석씨도 마찬가지로 좌판을 빼앗겼고요. 배터리를 뺏겨서 자살하고 물건 뺏겨서 자살하고… 뭐 많죠.
이때부터 장애우들이 사회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자본이 없으니까 좌판을 놓고 노점상을 했어요. 그런데 장애우다 보니 단속할 때 단속을 피하기 어려우니까 물건을 빼앗기고 10만원씩 벌금을 내는 일이 반복되니까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일이 늘어난 거죠.
김동범 : 내 기억에 이때만 해도 노점상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어요. 딱 들고 뛰기 좋을 만큼만 늘어놓고 팔았죠. 천호동 박승학 씨도 남들은 단속 나오니까 다 들고 도망갔는데, 이분만 도망을 못가고 잡힌 거라고 하더라고요.
백종환 : 최정환씨 이후에는 장애우뿐만이 아니라 노점상 연합회 분들이 같이 운동을 해서 명동성당에서 아주머니들이 전라상태로 목에 쇠사슬을 감고 노점상연합과 철거민연합 등등이 연합해서 그렇게 투쟁한 적이 있었어요. 아주머니들이 옷을 벗고 있으니까 경찰들이 감히 저지를 못했죠.
김정열 : 이때 사실 더 큰 사건은 이덕인 씨 사건이었어요. 일간지에 보도 될 만큼 큰 사건이었죠. 이분이 당시에 골리앗을 만들고 거기서 몇 달 동안 거기서 투쟁을 했는데 그 투쟁의 현장에서 이덕인     씨가 두 손이 묶여 사망한 채로 발견돼서 크게 문제가 됐죠.
김동범 : 이덕인씨 사건이 95년에 벌어진 일이었나요? 그렇게 오래된 일 같지 않은데.
방귀희 : 98년 외환위기로 인한 장애우 자살 급증도 심각했어요.
김동범 : 그때 자살뉴스가 정말 많았어요. 뭐 98년에는 장애우만이 아니라 비장애우들도 엄청 죽었죠. 근데 98년 이후로 장애우관련 뉴스를 찾아보면 다른 기사에 비해 장애우 자살 기사가 무척 많더라고요.
방귀희 : 사회전반적인 현상이었죠. 아직도 그렇고.

90년대 중반, 장애계, 정치세력화를 외치다
; 장애 대통령 만들기에 합심

▲17대 총선에 직전. 전국을 어우르는 48개 단체가
모여 "2004장애인총선연대"를 만들고 각 정당 10%
장애우 비례대표 의석확보와 출마의사가 있는 15
명의 장애우 후보를 공식 지지·지원했다.

방귀희 : 95년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지방자치제도의 시작과 그에 따른 정당후보 장애우 10% 공천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누가 있었나요?
김동범 : 비례대표로 들어간 건 시각장애우 김정관씨가 임기 한 달을 남겨두고 시의원으로 들어간 게 있었죠. 지자제 2기보다 1기 때 당선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당시엔 운동의 결과로 장애우가 들어간 게 아니라 들어가고 보니까 여기저기 장애우들이 많았다는 정도의 의미였다고 생각해요.
백종환 : 당시 직접적인 운동도 했어요. 장애가 있는 사람 중에 정치에 뜻이 있다고 하면 직접 가서 명단을 제출하기도 하고, 이쪽에서 밀어준 사람은 아닌데 후보가 된 사람들 중에 장애우가 있으면 밀어주기도 하고 그랬죠.
그렇게 된 사람들이 있었어요. 선거가 끝나자 지장협이 당선된 사람들을 모아서 63빌딩에서 백남치 의원과 함께 사진 찍고 그랬는데 거기에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왔었죠. 대부분은 장애쪽과 관련이 있었다기보다는 일반시민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이었고 다만 장애가 있으니까 초청에 응해서 사진을 찍고 그랬던 거죠. 그것이 시발점이 됐다고 생각해요.
김동범 : 그렇지만 1기에는 장애우 비례대표로 들어간 사람이 없었어요. 비례대표로 당선된 건 98년 이예자씨와 정화원씨가 처음이었죠.
김정열 : 장애우가 정치에 입문하기 시작한 건 89년 지역구로 당선된 이철용 의원이 최초였고, 장애우 비례대표로는 96년 이성재 변호사가 최초였죠.
김동범 : 그 영향을 받아서 98년 2기 지자제 선거 때는 장애우 대표를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1기에 비해 장애우 당선자는 양적으로 줄었지만, 질적으로는 장애우 대표를 인정하는 괄목할만한 변화가 있죠.
김정열 : 그리고 양적으로 준 것도 몇 가지 제도의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95년 첫 지자제의 경우엔 단일후보의 경우 무투표당선이었는데 98년엔 단일후보라고 하더라도 당선여부를 묻는 투표를 했거든요.
김동범 : 사실 장애우들의 정치참여를 요구했던 건 오래됐지만 이성재 변호사가 최초로 가시화되고, 98년 지자제 선거 등에서도 지속적으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고, 현재 장애우 국회의원이 국회에 들어가기까지가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이었다고 봐야죠.
백종환 : 95년 김대중씨가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 장애계가 다 함께 김대중을 밀었던 기억도 나네요. 그때는 지장협까지 다 함께 들어왔었죠.
김동범 : 그때 장애계는 “장애우 대통령 만들기”를 내걸고 함께 했어요.

99년, 직재법 때문에 갈라진 장애계
;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향방, 복지부냐 노동부냐

▲1999년 장애인고용촉진법 및 직업재활
법 논쟁이 활발하던 당시의 집회 모습
김동범 : 99년 장애인고용촉진법및직업재활법이 장애계에서는 커다란 사건 중 하나죠.
본래 쟁점은 장애우 자영업 지원과 중증장애우 고용 지원이었는데, 노동부가 그걸 거부하는 상황에서 복지부가 하겠다고 나섰던 거죠. 그래서 이 문제가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하 공단)을 보건복지부 산하에 두느냐 노동부 산하에 두느냐하는 부처이관 문제로까지 번졌어요.
백종환 : 그래요. 이성재 의원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던 96년 12월에 국정단과의 회의에서 처음으로 공단을 복지부 산하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냐고 발언했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이와 관련된 기사를 97년 1월 신년호에 톱으로 올렸던 기억이 나네요.
김정열 : 당시 이성재 의원은 한신대 재활학과 권도용 교수의 의견을 받은 것이었어요. 당시 권 교수가 중증장애우의 노동문제를 가지고 여러 차례에 걸쳐 세미나를 하면서 공단 이관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고 이 의원이 그 의견에 동의하면서 법개정을 추진하게 된 거죠.
백종환 : 하지만 이 싸움은 밖에서 볼 때 노동부와 복지부 두 부처간의 밥그릇싸움으로 비쳐졌고, 장애계가 양분되는 것으로 보였어요. 장판에서 한 쟁점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나뉘어서 부딪혔던 것은 이게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김동범 : 당시에 장애계가 갈라지니까 정치, 행정이 다 갈라졌죠. 당시엔 청와대까지 갈라졌어요. (모두 웃음).

2000년, 장애계 새로운 바람이 불다
; 재활에서 자립으로, 전문가에서 당사자로

방귀희 : 2000년에 들어서면서 장애계 흐름이 자기 성격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장애우 단체들이 만들어지고 투쟁의 모습들이 전문화되는 방향으로 바뀐 것 같아요. 옛날에는 우르르 몰려다녔던 장애우들이 요즘엔 다양한 연대체를 만들어서 전문화된 투쟁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죠. 비슷한 맥락에서 법개정도 다양해지고 있고. 또 다른 흐름은 문화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애우의 성이라든지 누드모델이라든지 이런 장애우의 성문화가 굉장히 발전한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장애계 세대교체가 일어났다는 것이에요.
김정열 : 세대교체라고 하면 예를 들어 어떤 걸 말하시는 건가요?
방귀희 : 황 관장님 송 변호사님 등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신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지도자 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옛날에는 장애를 가진 엘리트들이 주로 단체장으로 활동했는데, 요새는 엘리트보다는 얼마만큼 자기가 이 바닥에서 많은 인적자원을 확보하고 있고 얼마나 오랫동안 운동을 했느냐가 중요하죠.
언론입장에서 보면 그 때문인지 예전에는 황 관장님처럼 인물중심으로 취재가 가능했는데, 이제는 인물을 찾아서 취재할 사람이 별로 없어요. 단체가 중심이죠.
옛날에는 단체장이 장애계 스타였는데, 요즘 장애계 스타라고 하면, 클론의 강원래,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폭소클럽의 박대운, 화상장애우 이지선 씨처럼 개인적으로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이에요. 앞으로도 그렇게 변화될 것 같아요.
김동범 : 2000년 이후 사건을 중심으로 짚어보면 먼저 LPG 투쟁이 벌어졌고, 이거 수습하니까 오이도 리프트 추락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동안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산자부랑 두 번을 붙었어요. 그 과정에서 박경석을 중심으로 한 이동권연대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는데 이 단체가 장애계에 미친 영향이 컸어요. 이후 장애계는 대중운동, 시민과 연대하는 방향으로 흐름이 바뀌었죠.
그리고 박경석 씨를 모델로 보통의 장애우들, 즉 장애우 단체장도 되지 못하고 조직을 그럴싸하게 가지고 있지 않은 보통의 장애우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유사그룹이 생겨나게 됐죠.
방귀희 : 그렇게 보니 황연대에서 시작해서 박경석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변화를 짚어볼 필요가 있겠네요. 두 운동은 상당히 달라요. 옛날엔 눈물로 호소하고 높은 사람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잖아요. 저변에서 자신의 투쟁으로 접근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시민사회와 연대한다는 점에서도 완전히 달라졌죠.
백종환 : 이러한 변화는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장애우의 패러다임 변화와 동일한 것 같아요. 눈물로 호소했던 대규모 재활 패러다임에서 당사자 중심의 소규모단체가 욕구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자립패러다임으로 바뀌었죠.
김동범 : 이 시발에는 물론 박경석씨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정착하게 된 것은 박경석 개인의 능력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시대적 상황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시대적 상황이라는 건 두 가지 정도가 될 것 같은데, 하나는 95년에 장애우 특례입학이 시작돼서 그 즈음 졸업자가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죠. 본래는 이 친구들이 정상적으로 일반 사회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고, 그 고등교육을 받은 친구들이 대거 운동에 참여하면서 운동이 굉장히 세련되게 변했죠. 그리고 또 옛날에는 장애우 천명 모여 봐야 뉴스에도 안 나오기 때문에 어디 불을 지른다던가 도로를 막는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뉴스에 나오게 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인터넷 덕분에 소수 몇 사람만으로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할 수 있거든요. 이렇게 운동방식이 자기 논리와 홍보루트를 갖추면서 개별화된 소규모 운동이 가능해진 거죠. 이런 토대 위에서 처음으로 이동권운동이 이러한 운동 방식을 펼쳤고 앞으로 상당기간 이 흐름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해요.
백종환 : 사실 이것은 일본의 야시로 의원이 이동권연대가 생기기 몇 년 전부터 한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강연을 할 때마다 지금 이동권연대가 하는 그런 방식의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에서도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었죠. 이동권연대가 거기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동권연대가 시작했다고 봐요.
김정열 : 운동의 변화는 운동 주체의 변화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중증장애우 당사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자기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동휠체어 보급도 한몫을 했다고 봅니다. 예전에는 차로 집에 있는 장애우를 데려와야 했다면 이제는 스스로 전동휠체어를 가지고 사회에 나올 수 있게 됐어요. 그 때문에 몇 사람이라도 전동휠체어를 가지고 집회에서 하루 종일 혹은 일주일, 열흘까지 버틸 수 있게 된 거죠. 중증장애우의 경우엔 거의 직업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집에 있는 것도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어서 그 같은 지속적인 운동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요즘 하루 이틀이 아니라 30~40일 어떤 것은 1년까지 가는 지속적인 운동이 가능한 건 주체의 변화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장애언론, 장애운동과의 시너지를 내야 할때

 

김정열 : 이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장애언론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동범 : 한때는 장애언론이 장애우를 계몽하는 역할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어요. 이제는 언론이 장애우의 문제들을 세상에 알려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현진 : 일단 장애당사자의 목소리를 알려내고 그것이 정답이라는 근거 하에 활동을 하는 것, 그것이 장애언론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백종환 : 언론의 역할은 본래 정보와 뉴스를 제공하는 것이죠.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시대 조류에 맞게 장애언론도 장애우가 직접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언론으로 나가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함께걸음이 이제까지 사상지의 역할을 해왔다면, 이제는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이버상의 공간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귀희 : 함께걸음 표지만 보더라도 이제는 많이 대중적이 되어간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장애운동은 공감할 수 있는 운동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애해방운동을 하지 않는 지식인이 창피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할 것들을 가지고 무조건 운동을 하면 운동을 위한 운동으로 느껴질 뿐이에요.
일반인들이 공감하는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운동이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케팅이 필요해요. 하지만 지금의 장애운동은 하다보면 매번 똑같은 운동이고, 프로그램이 없어요.
김정열 : 저는 언론이라고 하면 결국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용을 어떻게 생산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죠. 단순히 정보만 전달하는 것은 포털사이트를 통해서도 충분합니다. 언론은 전략적으로 내용을 생산해서 적절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보는거죠. 그렇기 때문에 장애언론도 장애운동에 관해 지속적으로 내용을 생산해 줄 때라야 장애운동과 시너지 효과를 거두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오늘 장시간 좌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사진 조은영 기자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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