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호 특별기획 (3)| 함께걸음과 나의 인연 ②
본문
#1 빨간 표지였던 것 같다. 피곤한 듯 충혈된 눈의 남학생은 빨간 표지의 잡지를 받아들고 여학생에게 고맙다고 인사치례를 하고 펴보지 않고 가방 속에 넣는다. 빨간 표지의 잡지는 그렇게 가방과 책꽂이를 전전하다, 외로움에 지칠 무렵 남학생의 여전히 충혈된 눈에 발견되다.
표지의 사진과 글은 여느 사회과학과 같은 빨간책엔 눈에 띄는 한 단어가 있었다. [장애]였다. ‘장애우’라는 생소한 단어보다 ‘장애’자체가 주는 낯섦은 그 남학생이 한 장 두장 책을 넘기게 도와주었다. 남학생은 아주 아득한 한 기억을 더듬는다.
#2 높은 오르막을 올라서 꼭대기의 십자가가 보이는 곳이 약속 장소였다. 오늘은 특별한 약속이라 소년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누굴까? 처음보고 내가 놀라면 어떻하지?’ 소년은 말도 안되는 걱정이라 자신에게 말을 걸면서 교육관 문을 연다.
‘앗 !’ 소년은 아주 짧은 들릴 듯 말 듯한 높은 소리를 끊는다. 교육관 한쪽에는 얼굴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남자가 앉아있다. “안녕하세요? 저 00시죠?” 먼저 묻는다. “에~~, 그,그,그… 그럼, 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 이… 죠?”라고 한참 만에 답을 한다. 그렇게 시작한 남자와의 인연.
20년 넘게 집 한구석 두 평 정도의 방에 누워 지내다 주님의 기적으로 일어났다는 그 분을 만난 것이다. 신앙에 대한 두터운 신망을 가지고 있는 소년은 그 분과 손을 잡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3 현실로 기억을 돌린 남학생은 그 남자와 잡았던 손의 느낌을 기억해낸다. ‘아~!’ 맞다. 내가 낯설게 대면했던 그 남자의 떨리는 손. 남학생은 [장애]와 그 남자의 손을 동시에 기억해 낸다. ‘그 형이 장애인?’
남학생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장애’와 ‘장애우’가 따로국밥처럼 하나로 인식되지 못한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며 빨간 표지의 잡지를 천천히 넘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줄을 치고 읽기 시작한다. 민법총칙보다 빨간 줄, 파란 줄이 많이 그어진 빨간 표지 잡지는 남학생과 92년부터 함께 걷기를 시작한다.
#4 93년 남학생은 2학년이 되면서 강원도장애인종합복지관에 문을 두드린다. 알고 싶었다. 빨간 잡지가 말하는 ‘장애우의 현실과 정책, 대안’에 대한 수 많은 글들의 진실성을. 그래서 만난 아이가 파열음이 잘 되지 않는 ‘말장애’ 아동이었다. 그 아이와 일주일에 한번씩 두 시간을 놀면서 파열음이 들어간 단어를 의도적으로 시키라는 교육을 받고 꼬박 일년을 그 아이 집으로 다녔다.
그래도 남학생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5 97년 대학원에 합격하고 잠깐의 공백을 즐기던 백수 남학생은 책상에 꽂혀있던 ‘함께걸음’을 집어 든다. ‘세달 동안 뭐 좋은거 없을까?’ 그렇게 뒤지다 수화를 발견하고 바로 전화하여 강의를 듣게 되었다. 장장 1-2년의 시간을 수화 배우는데 보낸 백수 청년은 97년 드디어 ‘함께걸음’을 만들어내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수화통역을 하러 간다. 92년부터 빨간 표지 잡지와는 인연이 있었지만, 그 발행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수화통역을 하러. 그 잡지를 통해 자극 받아서 배우게 되었던 수화를 가지고,
‘참! 인연하고는…’하며 연구소에 들어서다 너무 낯이 익은 여00을 만난다. 몇 년전에 밤새워 술 마시며 조국과 민중을 걱정하던 친구를 연구소에서 만난 것이다. ‘장애’라는 말이 서로 어색하지 않은 든든한 동지를 만난 것이다.
#6 대학원에 진학하고 간신히 백수에서 학생 신분을 취득한 학생은 함께걸음을 들고 사회복지학과 강의실로 들어간다.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함께걸음을 소개한다. 누가 묻는다. “연구소 직원이신가요?” 학생은 그냥 웃는다. “아닌데요 제가 이 잡지를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서 같이 봤으면 해서 그냥 추천하러 왔어요!”
이렇게 시작한 홍보는 학생이 강사로 뛰는 ‘기초수화교실’에서도 이어진다. 잡지를 보고 ‘정말 몰랐어요,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하고 수강생이 말하면 학생은 내심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뿌듯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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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시 백수인 청년은 함께걸음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야한 표지를 보고 격세지감을 느낀다. 빨간 표지 당시에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누드’ 표지, ‘비키니’ 표지.
청년은 자신이 아직도 갇혀있던 자신의 고정관념을 돌아본다. ‘왜? 놀라지?’ 천천히 넘기면서 자신의 의식을 하나씩 살펴보는 백수 청년은 다음 호가 어떤 충격을 줄지 내심 기대하면서 마지막 장을 넘기고 물을 내린다.
‘쏴~~~~~’
글 도임방주 (수화통역사)
장애, 비장애들과 부모들의 심리상담을 주활동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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