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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수용시설을 벗어나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 두사람 이야기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수 있는 자유를 실감하고 있지요"

본문

  미신고시설이든 신고시설이든 우리 사회에서 "시설"은 형기 없는 감옥과 다를 바 없다.
가족이 와서 꺼내주기 전에는 언제 시설에서 나가게 될지도 알 수 없고, 어쩌면 생을 그 안에서 마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설에서 생활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설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막상 시설이 폐쇄되더라도 시설에서 생활하던 사람이 "또 다른 시설"이 아닌 "사회"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정부조차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사회"는 결국 나가고 싶지만 나가기가 두려운 곳이 되어버렸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시설을 벗어나 독립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지연우(가명)씨와 정진삼씨다. 함께걸음이 시설을 벗어나 당당하게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 그들을 만났다.

▲지연우씨

지연우, 10년 만에 다시 사회로 나오다.
햇살이 가득한 오후, 공원에 지연우(가명, 34)씨를 먼저 만났다.

"그때 시민단체에서 시설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시설에 있겠죠. 시민단체가 시설에 찾아와서 시설폐쇄 명령이 떨어지니까 가족에게 연락이 가고 전 병원으로 이송됐어요. 드디어 시설에서 나올 기회가 생긴 거죠."

시민단체가 제보를 받고 S시설에 간 것은 지난 2003년 10월.
당시 이 시설에 들어갔던 시민단체 활동가의 말에 따르면 S시설은 일가족 4명에 의해 운영되던 시설로 사방이 꽉 막혀진 건물,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2~3평 남짓의 작은 방에 7명가량씩 총 204명이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리고 이들은 오전 5시 새벽기도로 시작해 하루 너덧 차례의 기도 말고는 아무런 치료프로그램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대부분의 미신고시설들이 그렇듯, 이 시설도 3중의 철문에 방문도 밖에서 잠그도록 되어 있고, 외부와의 연락은 물론 가족과의 면회까지도 대화내용을 일일이 기록하고 통제할 정도로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된 상태였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방장이나 관리인 눈에 벗어난 행동을 하면 폭력과 폭언이 쏟아져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눈 밖에 나서 교육실이라는 이름의 감금방에 갇히면 짧게는 사흘 길게는 열흘까지 0.5평의 방에서 금식이라는 명목하에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굶어야 했다. 결국 S시설은 이러한 심각한 인권침해 실태가 드러나 폐쇄결정이 내려졌다.

당시 시설폐쇄 결정에 따라 병원으로 이송된 지씨는 다시는 시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단다. 그래서 의사를 붙잡고 나가고 싶다 나가게 해달라고 말했다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사회에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렇게 병원에서 한달을 보내고 사회로 나온 게 11월, 막 겨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나가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살집이 막막해 걱정은 됐었죠. 부모님은 이혼해서 각자의 가정을 꾸렸고, 제가 시설에 있는 동안 제 공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의사 입에서 막상 나가도 좋다는 말을 듣고 나니까  "드디어 나가게 됐다"는 사실만 생각이 나더라고요. 마냥 기쁘기만 하고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나오기만 하면 뭐든지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의 얼굴은 마치 방금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처럼 웃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막상 사회에 나와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가 시설에서 보낸 10년 동안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이 다들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데 처음엔 그것도 적응이 안됐어요. 컴퓨터도 그랬죠. 다들 컴퓨터를 하는데 저만 아무것도 모르니까 진짜 처참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는 운이 좋았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아빠가 마련해준 돈으로 시설에서 나오자마자 고시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 고시원 주인이 인상이 좋다며 그에게 총무자리를 맡긴 덕분에 어렵지 않게 첫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고시원 주인 언니가 컴퓨터도 못한다고 원시인이라고 놀리더라고요. 그러면서 인터넷을 가르쳐줬는데 겁이 나서 만질 수가 있어야지요. 10년 동안 시설에서만 지내면서 컴퓨터를 배우기는커녕 만져보지도 못했거든요. 게다가 클릭 한 번만 잘못해도 화면이 다른 데로 넘어가고 이상한 게 뜨고 그러니까 혹시 망가진 거 아닌가 싶어서 깜짝깜짝 놀라고 도망가게 되고. 하하하. 지금은 인터넷도 하고 남들처럼 빨리는 못해도 워드도 해요. 국비지원을 받아 학원에 다니면서 포토샵, 캐드, 엑셀도 배웠고요. 배울 때는 따라하니까 할만 했는데 지금은 많이 까먹은 거 같지만 어쨌든 자신감은 생겼어요."

이력서에 남은 10년의 공백기

운이 좋긴 했지만, 시설 안에서 예배만 보고 아무 일도 안했던 그가 시설에서 나오자마자 일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좁은 고시원에 하루 종일 앉아있으려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좀이 쑤시기도 했던 것. 그래도 꾸역꾸역 버텼다. 나오자마자 주어진 첫 일자리니까.

그렇게 두 달쯤 일했을 무렵 고시원은 주인이 바뀌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엑스트라 일을 하기까지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정한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이력서에는 10년의 공백기만 덩그러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면접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10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물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난감한 적이 많았단다.

"바텐더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일이에요. 사장이 나이도 젊고 경영학과를 나와서 그곳 말고도 몇 군데 더 바를 운영할 만큼 꽤 괜찮은 곳이었죠. 그런데 거기서도 이전에 뭘 했었는지를 묻더라고요. 그래서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말했어요. 어릴 때 마약을 복용했고 그 때문인지 조울증이 생겨서 기도원에 있었다고 말이에요. 처음엔 말이 잘 안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다행히 사장이 생각이 좀 트인 사람이었어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도 사장은 제 외모가 자신이 생각했던 컨셉과 맞지 않는다면서 안 된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컨셉은 일하면서 바꾸면 되는데 바에서 하는 일이 대부분 밤을 새는 경우가 많아서 오전에 학원 다니는 건 어렵겠다고 하더라고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긴 어려울 거라고. 그때 9시부터 1시까지 국비로 컴퓨터를 배우고 있었거든요.

또 한번은 안내데스크 일자리가 있어서 면접을 보러 갔는데 거기서도 공백기에 뭘 했냐고 묻더라고요. 근데 거기선 얘기가 잘 안됐어요. 시설에 있었다고 말해서 그랬는지 표정이 어둡고 안 좋다면서 안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꿈을 찾은 지연우씨

결국 그는 식당일부터 시작했다. 시간당 2천5백원, 많아야 4천원을 받는 식당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오전에 컴퓨터 교육받는 시간을 제하고 일요일엔 식당이 안하니까 일을 할 수 없다보니 한달을 꼬박 일해도 그의 손에 쥐어지는 돈은 32만원이 전부였다. 그 돈으로는 20만원가량 되는 고시원비를 내고 10만원가량 들어가는 교통비와 식대를 대기도 버거웠다. 게다가 식당 아줌마들이 드세서 자존심 깎는 말도 자주했다고.

"고등학교 때 비슷한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것만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이건 세팅하면서 뭘 놓을 때마다 손을 탁 때리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사소한 일에도 실수만 하면 그렇게 혼나는 일이 반복되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나중에는 주눅이 들더라고요."

식당일은 학원을 안다니고 손톱이 잘라져나갈 정도로 뼈빠지게 일해도 한달에 고작 70~80만원 정도를 버는데다가 적성에도 맞지 않았고 비전도 없었다. 결국 그는 식당일을 접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에 지금의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단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역으로 방송에 출연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계속 방송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거죠. 촬영장에 가면 재미있는 일이 많아요. 다니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요. 사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이 일을 하는 게 쉽진 않아요. 정장이나 캐주얼, 화장품을 스스로 챙겨가야 하거든요. 그래도 꿈을 가지고 이런 거 저런 거 알아보다 보면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여러 자원들도 연결이 되더라고요."

서글서글한 웃음. 그리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솔직함. 그는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 그 때문인지 시설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꽤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기뻐

그렇게 잃어버린 10년의 자리를 메워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시설에서 10년을 보낸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억울하죠. 처음엔 정말 되게 많이 억울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그냥 어느 곳에 있든지 감사하며 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 제 마음도 안 좋으니까."라고 말하면서 웃어넘겼다.

"처음 나와서 그냥 가방을 메고 햇볕이 내리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분이 좋고 기뻤어요. 정말 시설에서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유라는 게 이런 거다 싶고. 지금도 혼자 좀 외롭다고 느껴지면 공원에 자주 나오는데, 이렇게 햇살이 좋은 날 사람들이 강아지 데리고 나와서 노는 모습을 본다거나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사먹고 싶은 걸 사먹고 구경하고 그래요. 그게 자유잖아요. 이런 공원에 나올 수 있다는 거. 하하."

그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특히,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상태라 고등학교부터 다니고 싶다고. 이미 옛날에 다니던 학교로부터 오는 9월부터 2학년으로 복학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상황이다.

그러나 학비와 교통비, 식비 등을 대강 계산해도 학교를 마치기 위해서는 4백만원가량의 돈이 필요한데 백방으로 알아봐도 그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자금 대출을 받으러 은행에 갔지만, 대학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그리고 소득도 적고 집도 없어서 다른 대출도 불가능하다고 했다고.

"처음엔 어떻게든 학교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반이상 포기한 상태에요. 대신 지금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요. 물론 2~3백이나 하는 연기학원엔 못 다니겠지만, 단역으로 들어가면 연기하는데 필요한 트레이닝, 복식호흡도 배우고 얼굴근육을 풀어주는 것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단역배우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어느 순간에도 실망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기자 역시 그가 좋아졌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시설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시설에서 나왔을 때 당장 돈이 급하니까 아무 일이라도 하게 되는데, 되도록 비전이 있는 일을 하라고. 또, 조금 힘들더라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고 하고 싶은 꿈이 있으면 다 된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도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부딪혀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정진삼씨
정진삼, 반지하방에 둥지를 틀다

지연우씨가 시설을 나와 홀로 독립생활을 시작한데 반해, 이제부터 소개할 정신삼씨는 시설에서 지내던 사람 몇 명과 함께 나와 독립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다.

처음엔 살림살이가 별로 많지 않은 단촐한 집을 생각했다. 독립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니까.

그러나 막상 찾아간 정진삼씨 댁은 오래 살지 않았다면 있을 법 하지 않은 갖가지 살림살이들로 빼곡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는 살림살이들. 새것이라고 생각되는 건 한쪽방 구석에 놓인 이층침대 뿐이었다.

그들이 둥지를 튼 반지하 전셋집은 방 두개, 화장실 하나, 그리고 부엌을 겸한 작은 거실로 이루어져 있었고, 거실에 놓인 냉장고에는 벌써 복지관 차량시간표를 비롯해 각종 정보를 전하는 종이들이 게시판인 양 붙어있었다.

서정환(가명)씨 부부가 쓰는 방에는 어린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주는 교육용 브로마이드가 붙어있고, 볼풀, 푸우인형, 장난감 등이 방안 곳곳에 놓여있어 "가정"이라는 느낌을 더했다.
그래서였을까. 사실 어른 다섯에 아이 한명이 함께 살기는 비좁은 집이었지만, "살림"을 꾸려가는 재미와 향기가 강하게 풍겨왔다.

"안 그래도 바울선교원에서 벌어지던 문제들을 더 이상 놔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만나게 됐어요. 그 활동가들로부터 시설을 폐쇄시킬 거라는 말을 들었죠.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그때 마침 시설에 오기 전에 애들 앞으로 들어둔 교육보험에서 2천만원까지 약관대출이 가능하다는 우편물을 받았어요. 그렇게 전셋집을 알아보게 된 거죠."

그길로 그는 시설 밖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고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살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단다. 정진삼씨의 독립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집을 계약하기 전에 안양 쪽에 집을 먼저 봤어요. 처음엔 주인이 좋다고 했죠. 그런데 시설에서 나와서 자립하려고 한다니까, 새로 들어온 사람과 먼저 논의를 해봐야겠다고 하더니 다음날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시설에서 살던 사람은 싫다는 거였죠. 그래서 다시 인터넷을 뒤져서 괜찮다 싶은 전?월세집 여덟 곳을 적어놨는데 그중에서 여기만 통화가 됐어요. 게다가 여긴 중계인도 없고 이사비용도 50만원이나 제해주겠다고 해서 전화통화한 다음날 아침에 바로 방을 보고 계약을 했죠."

사실 그 집은 반지하라 휠체어를 이용하는 정진삼씨에게 적절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가 가진 돈으로 1층에 있는 집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계단 몇 개는 그냥 감수하고 다니기로 했단다.

당시 함께 살기로 결정된 건 지금 정진삼씨와 방을 함께 쓰고 있는 세 명뿐이었다. 그래서 남는 다른 방을 쓸 사람을 구하고 있었는데 집을 계약하고 이틀 뒤 선교원에 불이 났다. 처음에 시청에서는 가고 싶은 사람들은 같이 갈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전조치를 빨리 마치겠다는 생각으로 가족조차도 서로 다른 시설로 이전조치 했던 것. 그때 정환씨 가족이 결합했다.

지금 우린 가족이에요

"사실 시설에서 나오면서 가장 걱정이 됐던 점은 함께 살기로 한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과연 같이 잘 살아갈 수 있을까였어요. 나오기 전에 이미 집은 계획대로 마련했고 생활비는 당분간이라도 국가에서 수급권자에게 나오는 생활보조금으로 해결할 계획이었는데, 그 돈으로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이 독립생활이 오래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게 제일 걱정이 됐죠."

그러나 시설을 나와서 생활하면서 그런 걱정은 많이 줄었단다.
"지금 우린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서로 간에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가족처럼 서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해요. 멀리 친척이 있어도, 그건 친척이고, 우린 함께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가족인거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면 함께 살기 어려워요. 혹시 문제가 생겨서 떠나게 될 땐 떠나더라도, 일단 같이 살 때는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죠."

퇴소하고 이곳으로 와서 주민등록과 수급권을 이전하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데 두세 달이나 걸리더란다. 그동안의 일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대신 이런저런 것들을 옮기고 병원도 알아보고 하면서 휠체어 타고 많이 돌아다녀서 이곳 지리도 많이 알게 됐다고.

요즘의 일상도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바울선교원에 있으면서 너무 치료를 못 받아서 요즘은 다들 잇몸치료부터 시작해 밀린 치료를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근처 장애인복지관에 다니면서 사람들을 통해 정보도 얻고 탁구 같은 운동도 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이 가만히 있다보면 우울할 때도 있는 건데, 뭐 하나 하려고 해도 같이 움직이는데다가, 뭐가 있다거나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쯤 갈 건지, 어디로 갈 건지 계획해서 가야지, 치료해야지, 복지관에 가야지 뭐 또 일보러 가야지…, 이러다보면 너무 바쁜 거예요. 바빠서 우울하고 그럴 시간조차 없더라고요.  다른 마음먹을 시간도 없고. 허허허."

그렇게 하루하루가 바쁘다는 사실이 정진삼씨에겐 즐거운 일처럼 보였다. 시설과는 완전히 달라진 삶이었다. 그래서 시설에서 나왔다는 걸 실감할 때가 언제인지를 물었다.

"누가 집들이를 한다거나 어디 행사가 있다고 연락이 올 때요. 시설에 있을 땐 그런 게 있어도 참여를 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실제로 거길 가든 안가든 일단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뿌듯한 마음이 들어요.

지난번에도 도자비엔날레를 다녀왔는데, 친구 오라고 해서 기름값만 대고 구경을 하고 왔거든요. 어디 얽매이지 않고 내 일정을 내가 계획해서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시설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해요. 그리고 또…." 정진삼씨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골목으로 "뭐 얼마요~"하면서 싼 값에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 그럼 그런 때 싸게 사다가 바로 먹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시설에서처럼 사람이 먹든 안 먹든 때가 되면 무슨 모이 주듯이 그렇게 주는 게 아니라 함께 의논해가지고 먹고 싶은 음식을 바로 사다가 먹으면 재미있잖아요. 허허허허허." 정진삼씨는 약간 민망해하면서도 뿌듯하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소한 것에도 기쁨을 느끼는 그를 보면서 사람이라는 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유를 빼앗기고 자기결정권을 무시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런 작은 차이가 사람의 삶에 얼마나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독립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마냥 좋기만 해보여서 혹시 시설에서 나와서 어려운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시설에 있을 때가 더 어려웠죠. 처음 자립생활을 결정할 때 조금 두렵고 그런 게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자립생활을 시작하면 솔직히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서 아무리 잘해주고 잘 먹여준다고 해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자고, 먹고 그 시간이 아니면 굶어야 하고 그런다는 게 정말 사람이 할 일이 아니거든요. 시설에서는 생활통제가 많아요. 종교생활도 하나하나 통제하고…. 그러니까 생활하는 거 자체는 시설보다 지금이 더 편해요."

하지만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려운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돈을 벌겠다는 욕심보다는 일단 나오는 돈으로 안정된 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 두세 달은 생활을 해봐야 대강 한달에 얼마가 들어가고 생활비를 어떻게 조정해야겠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 같아요. 저희도 이제 대강 예측이 되기 시작했는데, 처음 생각과 달리 만만치가 않아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청구서들도 날아오기도 하고. 얼마 전에도 정화조 청소비라면서 전혀 생각지 못한 2만원짜리 청구서가 나왔거든요.

한달에 쌀도 60Kg이 넘게 먹더라고요. 중간중간 라면도 끓여먹고 그러는데도 그래요.
게다가 일단 아프면 병원에 가야하는데 그럴 때마다 돈이 들어가잖아요. 저도 옆구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결석도 있는 것 같다고 초음파를 찍자고 하더라고요. 초음파는 혜택이 안된다고 해서 7만원을 내야해요. 뭐, 그렇게 돈이 들어가니까 대강 50만원 아니, 최소한 30만원 정도는 항상 여유돈으로 챙겨둬야 하더라고요."

현재 그는 전세를 위해 대출받은 돈 뿐만 아니라 원장이 쓴 카드빚도 갚아야 하는 상황이다. 나중에 소송을 해서 받더라도 일단은 정진삼씨가 갚아야 한단다. 그렇게 나가는 돈만 한달에 50만원.

"지금으로서는 2년 안에 어느 한가지라도 빚을 갚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원장에게 뜯긴 돈을 받아내면 생활이 지금보다 나아지겠죠."
하지만 정진삼씨는 그런 어려움들에 대한 불안보다는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삶을 잘 꾸려나가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와서 생활해보니 사람들 만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래야 정보교환도 되고, 얘기하면서 정도 나누고 그러죠.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사람들이 옆에 있고 지켜봐준다는 거, 그런 게 좋은 거 같아요. 그리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시간을 좀 가졌으면 좋겠어요. 너무 급하게만 마음을 갖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좇아가지 말고 말이죠."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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