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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한 정신지체장애인의 아픈 삶 이야기

그래서 그의 삶은…

본문

장애계에 있다보면 인권이 보장되는 지역보다는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 ‘인권의 사각지대’가 더 넓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인권의 영역에서 예외로 취급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겠다는 장애인의 주장은 배은망덕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정신지체장애인나 정신장애인의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판단능력이 약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일을 시키고도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사례나 장애인을 데리고 있으면서 생계보조금을 가로채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배경에는 장애인의 노동이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있다. “장애인이 일을 하면 얼마나 하냐”는 말로 평가절하 되는 장애인 노동. 이러한 편견은 결국 장애인에게 일을 시키고도 월급을 주지 않거나 적게 주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는 관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혹여 그를 보호할 가족이 없거나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경우에 그 사정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건이 접수가 되어 인권활동가가 개입을 해도 사건이 해결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정신지체장애인이 돈에 대한 개념이 약하고 협박이나 회유 등에 잘 넘어가기 때문인데, 요즘 체불임금을 합의 중인 이태훈씨 사례를 통해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짚어보기로 한다.
지난해 10월 어느 이른 아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상담소에 한 통의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핸드백을 만드는 공장에서 정신지체장애로 보이는 사람이 지난 밤 공장주인에게 머리를 맞아 심하게 다쳤는데 병원에라도 데려가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으니 신변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한 이 제보자에 따르면 그는 그 공장에서 15년 가까이 일했으나 월급을 받은 적이 없으며 일이 끝나면 공장주인이 공장 근처에 얻어 둔 반지하방에 감금되어 있다고 했다. 제보자는 또, 감금된 남자의 온 몸이 멍투성이며, 가끔 성남종합시장으로 도망을 가기도 하는데 도망에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잡혀온다는 말도 전했다.

심각하고 긴급을 요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담당간사는 112로 경찰에 연락을 취하고 기자와 함께 공장이 있다는 성남으로 출발했다.

성남에 도착하자마자 제보자가 일러준 위치에 공장이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112로 연락, 경찰을 대동하고 지하에 위치해 있는 공장으로 들어갔다.

화학약품 냄새와 제봉틀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 찬 공장은 경찰이 들어오자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거기에 근래에 머리가 찢어졌던 흔적이 분명한 이태훈(39)씨가 실밥을 따는 일을 하면서 앉아 있었다.

조사를 위해서 경찰과 함께 이씨를 데리고 공장 한편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그의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머리에 동일한 크기의 상처자국이 수십 개나 됐다. 그러나 이씨는 상처에 관해 묻자 "어제 잘못한 일이 있어 사장님께 머리를 맞았다."고 별일이 아니라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 경찰이 조사를 하는 동안 기자가 공장직원을 상대로 어제 있었던 일을 물어봤으나 모두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나 직원들이 모두 있는 근무시간에 발생한 일인데다가 직원들이 눈치를 볼 뿐 입을 꽉 다무는 것이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머리카락을 기르면 상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습적 구타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때리는 경우도 많다”는 최재득(당시 현장에 동행한 경찰관) 씨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이씨와 공장주인 박씨를 임의동행하여 성동지구대로 갔다.

월급은 줄 필요없으니 데려다 먹이고 재워주기만 해라

경찰 조사에 따르면 사건은 다음과 같다.
공장주인 박씨가 이씨를 만난 것은 사건 발생 11년 전인 94년 성남시청 앞에 있는 술집주인을 통해서였다.

당시 술집주인은 “월급 줄 필요는 없으니 데려라 먹여주고 재워주라”고 하며 이씨를 박씨에게 소개했고 박씨는 그때부터 이씨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공장을 전전하며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황이었고 본인의 이름만 겨우 기억할 뿐 나이도 모르는 상태였다.
92년부터 공장을 운영을 시작한 박씨는 당시 다른 공장 직원들과 함께 숙식하고 있었고 이씨도 그곳에서 함께 숙식을 시작했다.

이후 하나 둘씩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방을 옮기고 3년 전 박씨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이씨만 남게 되자 현관문을 밖에서 잠그는 형태의 감금이 시작되었다. 감금 이유에 대해 박씨는 “이씨가 혼자 나가 동네에서 물건을 훔쳐오거나 경찰서에서 2~3일씩 자고 오는 등의 일이 일어났고 한번은 그렇게 나가서 도둑으로 몰려 경찰에게 맞고 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감금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씨는 폭행에 관해서는 “이틀 전 이씨가 공장의 다른 여직원과 싸우다 여직원을 울렸기 때문에 혼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며 이번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씨의 머리에 난 수십개의 상처자국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씨가 핸드백 공장에 들어오기 이전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씨는 그에 대해 매우 어렴풋하고 불확실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의 머리에 가득한 수십개의 상처자국에 대해 이씨는 ‘처음에 집에서 나와 밥상 등의 상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그때 드라이버나 니빠라는 공구로 맞아서 난 상처’라고 진술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 이후에도 몇몇의 공장을 전전했으나 월급을 받아 본 적은 없었으며, 비슷한 종류의 폭행이 많았기 때문에 맞다가 참기 힘들면 공장을 도망쳐 나왔던 것으로 보였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박씨는 3년간의 감금과 이번 사건에서의 폭행이 인정되어 폭력및감금건으로 고발 조치되었고 성남남부경찰서로 이송되었다.

   

   
▲ 공장 주인 박 씨에게 90센티가 넘는 나무자로 맞아서 찢어진 이 씨의 머리. 그리고 문제의 나무자. 이씨의 머리에는 이미 3센티 크기의 수많은 상처들이 있었는데, 경찰조사에서 이 상처들은 핸드백 공장에 들어오기 이전에 생긴 상처들로 밝혀졌다. 그 상처 하나하나에 힘겨운 그의 삶이 기록되어 있는 듯 했다. ⓒ조은영 기자

 

 

 

 

 

 

 

 

 

 

 
가족에게, 사회에게 버림받는 정신지체 장애인 시설이외에는 갈 곳이 없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고발조치를 한 이상 이씨가 공장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이씨가 긴급하게 며칠 머무를 곳을 수소문 했으나 서울 시내에 성인 남성 정신지체장애인이 임시보호를 받을 만한 기관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대부분이 아동, 청소년 혹은 여성을 위한 기관이기 때문에 성인 남성인 이씨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나마 갈 수 있는 노숙자 쉼터이거나 미신고시설에도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노숙자 쉼터나 미신고시설의 경우 거의 관리가 되지 않고 이씨가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당시 이씨는 신분이 확인되지 않아서 장애인등록증은 물론 주민등록증도 없는 상태였다) 적절치 않다고 결론을 내리고 개인의 집을 수소문해 우선 그곳에서 하룻밤 숙식을 해야만 했다.

이후 알음알음으로 봉천동에 위치한 나눔의 집 그룹홈에서 3박을 하고, 성남에 위치한 노숙인센터 ‘안나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안나의 집에서 친하던 사람을 따라 다시 미신고시설로 충북 옥천에 위치한 무료노인요양원 ‘행복한 집’으로 옮겨간 상태이다.

두 번째 문제는 가족을 찾아갔을 때 발생했다.
경찰서의 신원조회를 통해서 어렵사리 아버지와 여동생이 수서동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찾아가게 된 아버지가 "자신은 아들이 없다"며 이씨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뭐, 황당했죠. 딱 보니까 전 알아보겠던데, 그런 아버지 입에서 아들 키운 적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이 황당하기만 했어요.” 이씨는 그때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완강히 부정하는 아버지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고 설득해 태훈 씨의 주민등록을 위한 본인확인을 받았다. 이씨의 가족은 이씨를 버린 셈이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은 없으나 수서의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의 아버지 역시 생계보호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다지 순탄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동생도 만나보고 싶은 눈치였으나 이씨는 “제가 찾아가면 부담스러워 할 거 아니에요.”라고 대답할 뿐 연락을 취하지도 만나지도 않았다.

세 번째 문제는 박씨를 둘러싼 주변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박씨가 고발 조치된 다음날부터 모 교회의 목사라는 사람을 위시하여 공장직원 등의 사람들이 연구소에 전화를 걸어 고소를 취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박씨는 장애인을 거둔 좋은 사람이다. 이씨가 물건을 훔치고 집을 나가도 다시 받아줬으며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이씨를 데리고 교회를 나왔다”며 연구소가 잘못 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이씨의 감금에 대해서는 “이씨는 정신지체가 있지 않냐. 보호 차원에서 감금을 한 것 뿐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결국 그들은 이씨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둬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임금체불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감금에 대해서도 장애 탓을 할 뿐 잘못된 일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현재 이씨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그동안 일한 정당한 대가를 돌려받도록 공장주인 박씨 측과 합의 중이다. 이 합의가 깨지면 그동안의 손해를 배상받기 위한 민사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다. 그리고 박씨는 아직도 10년이 넘도록 친동생처럼 잘해줬으며 거지같았던 아이를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해왔는데 이런 일을 당하다니 억울하고 기가 막힌다는 입장이다.

이제 마지막 합의만 남은 시점에서 다시 만난 이씨는 지난 가을 그를 처음 보았을 때에 비해 살이 많이 올라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밀린 임금을 돌려받고 싶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씨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보고 싶기도 해요. 여기 올라와서 사장님 사시는 아파트에도 가보고 일하던 공장에도 다녀왔어요.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그의 기억 속에 사장님은 키워주시고 밥을 먹여 주신 분이었다. 그리고 월급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월급날이 되면 콜라 과자 뭐 이런 맛있는 것도 사주고 다른 사람들이랑 회식을 하고 노래방을 갔던 기억이 좋았다’고 기억할 뿐이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서도 박씨를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렇게 된 게 자신이 잘못한 것 혹은 자신이 모자란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오랜 습관인 것처럼 보였다.

이제 합의금을 받고 나면 그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더 이상은 이씨가 상처받거나 피해를 입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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