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준 열사의 삶과 죽음(1)
장애에 절망하지 않았던 나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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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현준 열사의 장례식장 (함께걸음 자료사진) | ||
그이는 근디스트로피라는 진행성 중증 장애 때문에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장애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실 간사로 활동하던 이현준 열사.
그이는 중증의 장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동휠체어로 장애판을 누비며 장애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또 몸소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삶 때문에 고 이현준 씨는 지난 3월 26일에 있었던 제 1회 전국장애인대회 때 장애해방열사로 추대되었다.
이에 함께걸음은 이현준 열사의 모습들을 다시금 기억해보고자 두 편의 글을 준비했다.
함께걸음은 이현준 열사의 동생인 이현제 씨가 쓴 수기와 고인 함께 장애운동을 했던 함께걸음 여준민 객원기자가 쓴 추모 글을 편집해 실었다.
고 이현준 열사 (함께걸음 자료사진)
내가 어렸을 때 봤던 형 형은 1960년대 중반,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시기, 집안에 병신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전세방조차 얻기가 쉽지 않았고 동네 주민들에게 눈총을 받았다.
형은 동네 친구들이나 학교에서 심한 놀림을 받았고, 맞고 들어오는 날이 태반이었다. 이때마다 어머니는 쫓아나가 아이들을 두들겨 패주었고, 동네 아줌마들하고 싸우기가 일쑤였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 형제는 매일, 어머니의 한스러운 눈물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힘들어했던 건, 아버님의 잦은 부재에 의한 고통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던 중, 어린 나에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사건이 형의 초등학교 졸업식 때 벌어졌다. 그때가 1977년도니까,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의 일이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왔었다. 어머니가 큰아들의 첫 졸업식이라 큰 맘 먹고 새 옷을 입혀 학교로 보냈는데, 형이 금방 옷을 흙탕물에 적셔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어이가 없었지만 “니가 무슨 복에 그런 옷을 입냐”하면서 옷을 갈아입히고 다시 학교로 보냈다. 그것도 잠시, 형은 “애들이 밀어서 넘어졌다”면서 흙탕물이 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다시 옷을 갈아 입혀 보냈지만, 5분이 채 안돼서 또 옷을 버리고 들어왔다. 형은 “평소에 못되게 구는 여자애가 자꾸 자기를 넘어뜨린다.”고 했다 화가 날 만큼 난 어머니는 비통의 눈물을 흘리면서 형을 흠씬 두들겨 팼고, “이렇게 살면 모하냐 차라리 같이 죽어버리자”하면서 아버지한테 악을 쓰셨다.
그런 후, 더 이상 갈아입을 옷이 없는 형은 궁여지책으로 체육복을 입고 졸업장에 갔지만 학교에 가다가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져 또, 옷을 적시게 됐다. 어머니는 옷에 묻은 흙만 물로 씻겨서 다시 입혔고, 형은 젖은 체육복을 입은 채 그날 잔인한 졸업식을 마쳤다.
더욱더 어려워진 가정생활
형이 상급학교를 진학하면서 우리 집은 형의 학교를 따라 이사를 해야 했다.
이 무렵, 나도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집은 더욱더 정신이 없게 됐다. 남다르게 교육열이 높으셨던 어머니는 형의 학교 근처로만 이사를 다녔는데, 전혀 인연이 없는 동네에서 전세방을 얻는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이사만 여섯 번을 했으니, 거의 매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장애인이 있는 가정에 동네에서 집을 내주지도 않아서, 우리는 지하 단칸방이나 비 새는 집, 은행 차압 잡힌 집 등만을 전전해야 했다. 그래서 도저히 형이 안정적으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고, 우리 집은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다행이 형은 고등학교 진학할 때 상위 10위안에 들 정도로 성적은 괜찮은 편이어서 어머니는 그래도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형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 집의 라이프 사이클은 온통 형으로 집중됐다. 그동안 지방에 계시던 아버지도 형 때문에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두 분이 전적으로 형의 통학을 도왔다. 그러기를 6년, 두 분의 스트레스는 극도로 치달았고, 자연히 나는 등한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별반 소득이 없는 아버지로 인해 가정 경제는 더욱더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3학년 때는 1년 내내 수제비와 라면으로 연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어머니는 밀가루만 보면 학을 땐다.
형의 잔인했던 학창시절
그 당시 교복세대가 엄한 규율의 학교를 다녔듯이, 형도 마찬가지로 힘든 학창 생활을 보냈다. 남다른 교육열을 갖고 계신 어머니는 될 수 있으면 모든 학교 행사에 형을 소외 시키지 않으려고 옆집에서 돈을 꿔가면서까지 열성적으로 형을 참석시켰다.
그러다가, 집안을 발칵 뒤집힐 사건이 일어났다.
형이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경복궁으로 사생대회를 갔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없는 돈에 화판까지 사주면서 형을 보냈다. 그러나 아침에 나간 형은 밤 10시까지 들어오질 않았다. 어머니는 학교로 전철역으로 백방으로 형을 찾아 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밤 12시가 되서야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형은 집으로 돌아왔다.
사연인즉, 아침에 전철을 타고 경복궁으로 가다가 이름 모를 역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전철문 밖으로 밀려 넘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전철을 타려고 했지만 힘든 몸을 이끌고 타려고 하면 이미 전철이 떠나버려 결국에 그곳에서 집까지 걸어왔다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하면서 형은 무려 14시간이나 걸어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연실색했고, 이러다가 자식 죽이겠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다시는 소풍이나, 외부행사에 형을 보내지 않았다.
우리 집엔 어느 봄날 학교 교정에서 그림을 그리는 형을 미소로 쳐다보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오래된 사진이 한 장 있다. 사생대회 때 홀로 학교에 남아 그림 그리는 모습이 하도 다정해 보여 지나가던 교사가 찍어준 사진이라고 한다.
아무리 장애 때문에 형의 몸이 부실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점점 커지는 몸을 두 분이 감당하기엔 많이 무리였다. 그리고 형만 쫓아 다녀선 식구들이 생활을 할 수 없었기에 자연히 학교 친구들에게 신세를 져야했고, 이게 학교에서 문제가 되었다.
형이 중학교 3학년 때, 담임교사가 어머니를 학교로 불러 심한 모욕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사는 어머니에게 “당신 아들 때문에 다른 애들이 공부를 못하니, 학교를 때려치우든가, 아니면 전학을 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어머니는 담임고사와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싸움을 했고, 이후에 교장선생님이 직접 찾아와 백배 사죄를 하고, 담임교사는 징계 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형은 학교 내에서 유명인사 아닌 유명인사가 되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장애에 몸은 더욱더 나빠지고
중,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 식구는 형의 정확한 장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당시는 단순히 몸을 쓰지 못하면 으레 소아마비라고 생각했던 시기라, 우리 가족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형은 1년에 한 두 번씩 나라에서 보내주는 버스를 타고 광장동에 있는 정립회관에 가서 수영을 하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형의 장애는 소아마비가 아니었다. 중학교 졸업식 때 형의 모습을 본 김명선 박사(당시 세브란스의대 초대학장)의 주선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특별 검사를 받게 됐다. 무려 석 달 동안 다양한 검사를 받았지만 진단은 ‘병명 무, 치료 불가능, 현재의 의술로 알 수 없음’ 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형은 더 이상 일어 날수가 없었다.
형이 주저앉으면서 집안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도, 목발로 걸었던 형은 아버지 등에 업혀 학교를 통학하게 되었고, 없는 살림에 휠체어는 꿈도 꾸지도 못했다. 나빠지는 몸에 부모님은 많이 긴장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작은 끈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검증되지 않은 약과 민간요법으로 형을 치료하겠다고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형의 몸을 보면 온통 몸이 뜸 자국이다. 형의 몸은 점점 나빠졌다. 그래도, 고 2때까지는 학점 관리를 했지만, 형이 성성한 급우들과 경쟁을 해서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나중엔 안 사실이지만 부모님은 형이 한의사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먹고사는데 걱정이 없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졸업 후, 칩거의 생활로
84년으로 형의 정규 학교 과정은 마치게 됐다. 그러나 고등학교 마지막까지 아픈 기억이 있는데, 형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아버지가 형을 업고 계단을 올라가다가 넘어져 이빨이 3대가 빠지는 중상을 입는 사건이 있었다. 형은 미안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로부터 정확히, 20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나는 아버지에게 그럴싸한 틀니를 해줄 수 있었다.
그렇게 졸업 후, 형은 그야말로 아무런 미래가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 후 7년 동안, 형은 외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시 중학생인 내가 형을 돕는다는 건 불가능했고, 나는 솔직히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는 형의 존재를 무척이나 부끄러워했고, 아직도, 내 친구 중에는 그런 형이 있었냐라고 되물을 사람도 적지 않다.
이시기는 형에게 암흑과 같았지만, 형은 정서적으로 무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재주가 많았던 형은 아버지 등 넘어 배운 바둑으로 아마 3단 자격증을 따기도 했고, 자기가 혼자 치고 노래 부를 정도로 기타도 배우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숟가락 하나 들기도 힘들지만) 이외에도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음악 등 다양한 방면에 방대한 지식적 소양을 쌓아, 각종 라디오 퀴즈에 입선해 무미건조한 집안에 잔잔한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의 형을 만들게 했던 것은 잠재적인 사회비판의식과 글솜씨였다. 사실 학교 때 형의 국어 실력은 전교 1등이었다.
형이 집에 있으면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신문의 독자투고란 투고를 해서 돈을 버는 일이었다. 당시 한번 선정되면 2만원∼3만 원 정도 됐으니깐, 신문사 10군데 정도 투고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나는 우리 형이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나름대로 진취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형이 더욱 인정받았던 건 단순히 글 솜씨가 아니라 글안에 묻어난 장애에 관한 사회 비판의식이었다.
알에서 깨어나 사회에 나오다
이때쯤, 형은 우연히 라디오에서 근이양증 장애인(근육디스트로피)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형은 자가진단법을 통해서 본인의 장애가 근이양증 장애라는 판단을 했고, 한국 근육디스트로피장애인협회(잔디회)의 상담을 통해 한달에 한번 정기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이후, 형은 모임에 가입하게 되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잔디회를 비롯한 문학을 좋아하는 환우들의 중심으로 만든 상록수회 모임에 참석하는 등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꾸준히 외출을 하게 된다. 이때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7년만의 일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향후 5년 동안 형의 생활은 큰 변화를 맞는다.
어느 날 형은 장애인 신문사의 자사 창립 기념식에서 특별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때 형은 이미 장애관련 언론 쪽에서 상당히 이름이 나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활동에 탄력을 받은 형은 장애인문인협회에 가입을 해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4년에는 장애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곰두리 문학상에 ‘네 개의 이름을 가진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당당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했으며, 그해엔 솟대 문학 신인상도 받아 인생의 황금 같은 시기를 맞이한다.
장애인복지에 관심을 두고 일을 시작
평소에 장애인 복지,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형은 1994년부터 2000년도까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함께걸음에 고정 칼럼을 쓰기 시작한다.
당시 형의 글은 장애와 관련된 다양한 사고를 방대한 자료와 검증을 통해 글로써 사회에 알렸으며 인기 순위 1~2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독자층에게 인정받았다. 이후, 형은 2000년 4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글 이현제(이현준 열사의 동생)
작성자홍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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