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준 열사의 삶과 죽음(2)
이현준 열사를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
본문
그의 삶 자체가 장애 차별에 대한 저항이었다
“장애가 심해지면서 자는 것이 나에게는 이라크 전쟁 같았다. 얌전히 자는 나를 너무 좋아한다고 방바닥에서 찌르기, 사방에서 팔다리 잡아당기기, 심지어는 관절 꺾기 무공, 급기야는 조르기 한판으로 들어올 때 아주 죽여준다.
여자 친구가 이런다면 오죽 좋겠냐만. 나는 지난 십 년 간 이런 고생을 지낸 터이다. 오죽하면 가족조차 두 손을 들었을까… (중략)… 나는 잠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안전하게 잠들 수 있도록 잠자리 안전모드 세팅을 한다.
아참 발등의 붓기를 빼기 위해 양다리 밑에 커다란 쿠션을 받친다. 이렇게 오른발 다리 쪽과 오른쪽 어깨 부분에 리프트 줄을 걸고 오른손에 리모콘을 끼운 다음 개구리 포즈가 취해지면, 나를 너무 사랑해 주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투 준비가 끝난다… (중략)… 그렇다고 충분한 숙면을 취하게 된 것은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잠 문제는 해결됐지만 나의 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비몽사몽 중에 손에 쥔 리모콘으로 리프트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여명이 밝아온다.”
- 월간 함께걸음 2004. 3‘내 잠 좀 돌리도~’고(故) 이현준님의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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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이현준 열사 모습 (함께걸음 자료사진) | ||
30여 년 전, 근이양증 진단을 받은 그는 10년 동안 여느 중증장애인들처럼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거리의 턱과 계단은 스스로 휠체어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 거대한 장벽이었고, 가족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도 갈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장애가 심해져 유일한 벗은 책이었고, 책 속에서 세상을 읽어나갔다. 한 때 문학청년을 꿈꾸던 그였기에 책 읽기와 글쓰기는 그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91년 <함께걸음>에 ‘장애인의 날을 보내며’란 글을 통해 기만적인 체육관 행사를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시작으로 그는 장애로 인해 겪는 차별과 고통, 대안모색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간헐적인 기고였지만, 그의 예리한 분석력은 고정 팬을 만들었고, 이후 3년 동안‘장애인의 세상형편’이란 고정 꼭지를 통해 장애당사자의 입장에서 본 세상이 모순 그 자체라는 점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러다가 90년대 초 컴퓨터와 통신문화가 정착하면서 그는 외부와의 소통을 시작한다. 중증장애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날카롭고 예리하게 분석했고, 때로는 유머와 풍자로 일그러진 장애차별 현실을 고발했다. 사랑과 봉사라는 단어로 비참한 장애인의 현실을 외면했던 때라, 그가 말하는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은 함께 하던 통신동호회 사람들을 변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전국에서 수백 명이 가입했던 천리안 장애인통신동아리 나누리의 시삽을 맡으며,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바라보는 사회 인식개선을 위한 교육, 강좌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 활동을 계기로 그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회적 관계망이 넓어지다 보니, 자연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동호회 회원들은 그의 집을 찾아가 기꺼이 자원 활동을 해주었다.
바깥세상에서 그가 할 일은 많았다. 집안에만 있을 때는 시와 소설, 평론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이었지만, 장애인의 삶을 벼랑으로 몰고 가는 사회를 안 이상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중증장애인에게 이동권 확보는 기본이자 중심임을 몸으로 터득한 그는 한벗회 활동을 거쳐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라는 조직을 건설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아니 하고 싶은 것은 해야만 했다. 혹자는 근이양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3-40세 정도이기 때문에, 그 때가 되면 거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그 누구보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그는 자유기고가,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찾아와 월간 함께걸음의 정식 객원기자로 일하고 싶다고 하더니, 얼마 후에는 “자신을 정식 기자로 채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중증장애인의 노동권을 이야기하는 단체에서 왜 중증장애인 활동가 한 명 없냐!”는 것이었다.
열악한 재정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방법은 계단뿐이었지만, “휠체어를 올려달라”고 당당히 말했고, 연구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말로만 “중증장애인 문제 심각하다, 해결해야 한다!”고 해왔지, 그 해법의 출발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은 그가 정식 출근을 하고 활동하는 걸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아 나간 것이 맞는 것 같다. 중증장애인의 억압과 차별의 실체는 그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온전히 전해지는 현실이었으니까.
그런데 2001년, 글쓰기가 무기였던 그가 조직개편 이야기가 나오자, “정책실에서 일하고 싶다”며 부서 이동을 요구했다. 전동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생겨나면서 그는 “너무 답답하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은데,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을 수 없다.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장애차별과의 싸움이고, 지금 내 문제는 너무 심각하다. 왜 장애인은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가! 자립생활은 불가능한가!”라며, 자주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즉 인권확보 활동임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써 화두였던 독립생활에 대해 그는 한평생을 바치고자 했다. 아니 그렇게 실천했다.
그 후 그는 지난 5년 동안 연구소 정책실에서 이동권, 콜택시 문제, 기초연금제, 자립생활운동, 활동보조인제도, 성년후견인제도 등을 주로 담당하며 사회적 이슈를 제기했다. 거의 모든 정책의 기본 틀거리를 준비하고 이제 운동으로 풀어나가는 일만 남았는데…이제 그를 볼 수 없다.
그는 지난 해 1월, 39년 만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 책상 위로 손을 올려주고 컴퓨터도 켜 줘야 하고, 생리현상을 처리할 때도, 휠체어를 탈 때도, 침대에 오를 때도, 그렇게 24시간 다른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던 그가 말이다.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천여만 원 상당의 고가 의료장비들을 구입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사비를 털어서라도 열심히 활동보조인을 구해가면서.
그의 독립생활은 그 자체가 중증장애인을 차별하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었다. 매번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고 일상에서 지치도록 싸워왔다. 고장 일색인 지하철 휠체어 리프트에서 몇 십 분을 앉아 있어야 했고, “우리 집 음식은 매워요”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들으면서 식당 주인에게 거부당하기도 했다.
워낙 노래를 좋아해 조직 안에서 오영철 활동가와 전동브라더스 라는 듀엣 팀을 만들기도 했는데, 대개 노래방이 엘리베이터 없는 지하나 2,3층에 위치해 있어 갈 수 있는 노래방을 찾아 몇 시간을 다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가도로를 달리다 우비가 휠체어 바퀴에 걸려 고꾸라졌지만 일으켜 세워줄 사람이 없어 한동안 그 자세로 있어야 했고, 웅덩이에 박혀 옴싹달싹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가래 하나 시원하게 내뱉을 힘조차 없어 ㅋㅋ~ 소리 내며 호흡곤란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고, 혼자 방에 있다가 몸이 기울어져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10시 이후에 콜택시를 이용할 수 없어 2시간이 넘게 전동휠체어로 목숨 걸고 도로를 내달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중증장애인에게 필요한 정책과 서비스를 정리해 나갔고, 이런 태도는 그가 존재하고 활동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후배 활동가들에게 큰 힘은 물론 장애해방을 외쳐야 하는 이유이자 근거였다.
심한 장애를 가진 후배들은 “현준이형을 보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를 자신의 미래로 생각하며 장애차별철폐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또 미술, 음악, 영화, 연극, 사진, 문학 등 거의 모든 영역을 망라한 해박한 지식을 장애와 연관시켜 분석하고 비평했던 점도 그의 업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 몰라라 바쁘게 앞만 보며 달려갈 때, 장애인의 관점에서 삐뚤어진 세상을 통렬히 비판하며 오히려 장애인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장애가 문제임을 설명해 갔다.
그렇지만 때로는 세상의 잣대를 무시하며 느리고 낮고 작지만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왔다. 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삶을 미적 감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던 것 같다. 치열한 현실에서 내내 투쟁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는 언제나 넉넉한 품으로 그 모든 것을 품어 안았다.
‘도전하는 사람들’이란 사진 모임에서 그의 따뜻한 시선을 볼 수 있다. 손가락 하나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디지털 카메라를 꼼지락거리며, 이 기능 저 기능을 실험하고 투쟁현장의 모습도 담아내면서 자기만의 시선을 표현했다. 앵글의 위치는 그 사람의 시선이다. 비참함과 치열함도 따뜻함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그의 작품에는 들어있다.
끝없는 열정을 품고 느리지만 언제나 완벽에 가까운 결과물을 내놓던 그였다. 우리는‘속도’의 문제가, 자본의 본질이, 중증장애인을 차별하는 주범임을 그를 통해 알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늘 장애 때문에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해왔지만 보다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그 길에서는 처절한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었다. 매 순간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삶에 대해 끝나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애로 인한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저항해왔다.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아니 장애해방 참 세상을 바란다면,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살아지는’삶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인간답게’를 실천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의 가슴에 새겨질 ‘열사’이다.
제1회 장애인대회에서 그가 열사의 이름으로 불린 일은, 그래서 당연하다.
그를 기억하면서 중증장애인의 해방 그 길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글 홍여준민 객원기자
작성자홍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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