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함께걸음을 통해서 본 장애우 역사(9)-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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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여성운동, 장애운동의 새 흐름을 형성하다
언제나 되풀이되는 듯한 장애우 역사에서 95년을 기점으로 확실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장애계 내의 여성운동 흐름이다.
94년 이전까지 ‘여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꼭지들은 대부분 육아, 가사, 결혼 등의 문제였고 인권 문제라고 해도 성폭력 문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95년부터 장애여성의 문제를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노동능력이라는 말로 장애우 차별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의 문제로 재해석하고 이중적인 차별상황에 놓인 장애여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려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장애여성운동의 흐름은 96년에도 이어졌다.
<함께걸음> 9월호는 서울에서 개최된 제2차 동아시아여성포럼. ‘빗장을 여는 사람들’ 25명과 한국맹인여성회 5명이 참여하여 95년 북경세계여성대회에서 채택된 행동강령을 각국이 얼마나 이행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장애여성의 완전한 참여와 평등을 위한 의견들을 내놓았다.
<함께걸음>에 따르면 채은아 당시 빗장 위원장은 이 포럼에서 장애여성의 문제가 “여성계와 장애계 양쪽에서 모두 논외의 사항으로 치부되고 있으며 … 장애여성의 특별한 요구를 수렴할 수 있는 명문화된 법제도가 없다”고 한국사회 장애여성의 차별실태를 알렸다. 그리고 빗장은 마지막 날 전체 토의 시간에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각국 NGO위원회에는 장애여성의 참여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촉구하고, ▲한국정부에는 여성장애우의 특별한 관심사와 요구를 수렴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기구를 설치하도록 요구했으며, ▲전국의 장애우 단체에는 장애여성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여성단체와 장애여성이 연대하게 되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빗장의 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0월에는 ‘가정과 여성장애우’라는 주제로 ‘96 여성장애우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빗장은 이 대회를 통해 ‘가정 내의 장애여성 차별실태’를 발표했다. <함께걸음> 11월호는 이 차별실태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전체 응답자의 67%(기혼 71%, 미혼 63%)가 가정 내 폭력을 경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는 69%에 이르렀고, 가사문제에 있어서 56.1%의 장애여성이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도맡아 하는 반면, 10.6%의 장애여성은 아예 가사노동에 접근할 기회를 주지 않기도 했다. 또, 장애여성의 결혼 및 임신, 출산, 육아의 문제 등도 지적되었는데, 가족 내에서 이러한 차별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장애여성의 경우 소득보장 즉, ‘경제적인 자립’이 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지체장애우, 성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
<함께걸음> 95년 12월호가 ‘정신지체인의 성에 대한 몇 가지 그릇된 관점’이라는 제목으로 정신지체장애우의 성(性)문제를 처음 다룬 것에 이어 96년 1월호는 ‘정신지체인의 이성교제’라는 이름으로 정신지체장애우의 이성교제 뿐만 아니라 성교육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해 눈길을 끈다.
당시뿐만 아니라 요즘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지체장애우의 성적 능력을 부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가지 그릇된 편견을 사실인 양 믿고 있기 때문에 정신지체장애우가 비장애우처럼 성에 대해 이해하고 표현하고 성취할 수 있는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함께걸음>은 “정신지체장애우의 경우 단지 장애정도에 따라 시기가 늦어지는 것일 뿐”이라며 “부모조차 성적으로 성숙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정신지체장애우의 성적행동에 놀라 감추거나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사춘기와 청년기의 정신지체장애우에게 ▲적절한 이성교제 방법과 ▲이성간에 지켜야할 것 ▲바람직한 성적표현 등을 배울 기회를 제공해야 본능적이고 충동적으로 성적행동을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를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이 글에서는 실제로 이성교제의 지도단계라든지 여러 가지 성적행동 지도 등의 사례를 들어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을 시작으로 97년부터 <함께걸음>은 장애우의 성 문제나 성교육과 관련된 내용들을 싣기 시작했다.
장총련 출범, 장애계의 분열?
96년 장애우 역사를 언급하면서 빠질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있다. 바로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이하 장총련)의 출범이다. 96년 9월 11일 맹인복지연합회, 농아복지회, 지체장애인협회, 정신지체인애호협회 이 네 개 단체가 주축이 되어 장총련이 공식 출범함으로써 그동안 장애인복지를위한공동대책협의회(이하 장대협) 안에서 이루어진 공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함께걸음> 10월호는 이 소식을 다루면서 장애계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실제 장총련이 출범식에서 “그 동안 비장애우가 장애계를 주도하면서 많은 폐해가 발생했다”며 “이제 비장애우가 주도하는 장애우복지는 끝나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공식화되었다.
<함께걸음>에 따르면 당시 장애계는 소위 ‘장애우를 위한 단체’와 ‘장애우단체’가 공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정부에 의한 새로운 사업이 생길 때마다 서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했고 번번이 장애우 단체가 밀리는 양상이 펼쳐졌다. 뿐만 아니라 장애계의 대표성 인정 측면에서도 각종 장애관련 행사에 장애우 단체의 장보다 장애우를 위한 단체의 장이 대표로 인정받는 일이 빈번했다. <함께걸음>은 “이로 인해 그 폐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장총련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함께걸음>은 그러나 이와 더불어 “이것만이 장총련 출범의 이유가 아니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고 전했다. 그 예로, 당시 맹인복지회(이하 맹복)의 회장이자 장총련의 초대회장인 나종천 회장이 “맹인 안마사의 사회인식 개선을 위해 보건소 및 의료기관에 취업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가 안마사협회와 갈등을 빚게 되자 이듬해의 맹복의 선거를 앞두고 ‘장총련의 회장을 탈락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속에서 배수진을 친 것이라는 장애계 일부의 분석을 들 수 있다. 또, 지장협의 경우에는‘장애인먼저운동실천협의회’을 놓고 재활협회와 지장협이 격돌하여 재활협회가 승리하자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지장협의 장기철 회장이 재활협회 조일묵 회장이 상임대표로 있는 장대협을 탈퇴한 것 이라는 게 장애계 일각의 분석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장총련의 출범으로 장애계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장총련과 장총(장애인단체총연맹)의 양편으로 갈라선 채 대립은 계속되고 있다.
장애우 생존권을 사수하라!
지지난 호에 운동사를 정리하면서 92년 박승학씨에 이어 95년 3월, 노점상을 하던 최정환씨가 단속반에 쫓기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그로부터 채 일년이 되지 않은 95년 11월 28일 또다시 노점상을 하던 소아마비장애우 이덕인씨가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송도매립지, 속칭 아암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것도 두 손이 끈에 묶인 상태로 시신의 얼굴과 뒷머리, 양쪽 어깨, 팔 등에는 상처와 피멍이 가득한 채 말이다. <함께걸음> 96년 1월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노점상을 하는 장애우들의 생존권 문제를 특집으로 다뤘다.
일단 이덕인씨 사건부터 살펴보자. 당시 <함께걸음> 기사에 따르면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95년 5월 지자제 선거를 앞두고 인천시는 원래 군사지역인 아암도 부근 방파제를 단계적으로 개방해 시민 휴양지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계기로 아암도에 몰려든 시민을 따라 포장마차도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한 것. 이즈음 최정환씨 분신사망 사건을 계기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와 전국노점상연합회가 연합해 만든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이하 장자추)는 서울 청계천8가 이후 새로 노점상을 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던 중에 이를 알게 되었다. 장자추는 그곳 조직폭력배와 몇 가지 복잡한 논의 끝에 7월 3일부터 인천 지역 장애우 10여 명과 전국노점상연합회 회원 10여 명으로 구성된 회원들의 포장마차를 아암도 부근에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이들 중에 바로 이덕인씨가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이 포장마차가 관할 구청인 연수구청의 허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곧 연수구청의 강제철거로 이어졌고 생존권을 주장하는 노점상들과 96년 11월 24일 까지 네 달여에 걸친 대치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11월 24일 인천시와 연수구청이 경찰, 철거 용역, 구청직원과 포크레인을 동원해 일제히 철거해버렸고 이에 몇몇 노점상인은 끝까지 철탑망루에 남아 저항했다. 그리고 25일 저녁 문제의 이덕인씨가 그들과 함께 있다 망루 뒤쪽으로 내려와 바다로 뛰어 든 것이다. 여기까지는 동료 노점상들이 분명히 목격했다. 그런데 바다로 뛰어든 이덕인씨는 곧 행방불명된 채 3일이 지난 28일 차디찬 시체로 떠올랐다.
이후, 이덕인씨의 사망을 둘러싸고 아암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인천시는 이덕인씨 시신이 발견된 다음날인 29일, 시신이 안치돼있던 인천 길병원에 경찰을 투입해 시신을 탈취한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했고 사망원인을 ‘단순 익사’로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덕인씨 사망을 계기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에서는 발견 당시 손이 묶여 있었고 시신 곳곳에 맞아서 생긴 것으로 보이는 멍이 가득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덕인씨가 공권력에 의해 구타당해 바다에 버려졌다는 타살 혐의를 제기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진상조사단 보고서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비대위의 재부검 요구에 관계자는 “이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 당시 샅샅이 해부돼 사실상 재부검이 어렵다”고 밝힐 뿐이었고, 연수구청 역시 “이인덕씨는 철거 과정에 사망한 것이 아니므로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다.
노점상 장애우 어덕인씨가 인천시 아얌도에서 죽은채로 발견되었다. 당시 함께 결합해 싸운 학생과 재야 운동 단체는 다섯 차례가 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이덕인씨 사인규명과 빈민의 생존권보장을 요구했다.
당시 <함께걸음>은 이덕인씨의 사망과 관련해 장애우가 노점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집중 분석하면서 당시의 장애우 복지정책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냈다.
당시 정부가 내놓은 장애우를 생계보장 대책이라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공공시설내의 신문, 복권판매대, 매점 및 자동판매기 설치계약에 관한 조례안’이었는데, 이 조례안은 시행 초기부터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며 장애우들의 불만이 높았다. 장애우들은 공공기관 자판기의 계약자가 어떻게 정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또 당초 조례상에는 언급되지 않은 국가유공자와 상이군경 등이 신청대상자에 포함되곤 했다.
복권판매대 역시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재활사업본부가 주도하고 있는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4억원의 예산을 확보해 100개의 복권판매대를 지원하기로 하고, 기본 운영자금으로 보건복지부가 1인당 50만원씩 총 5천만원을 조성해 장애우들에게 나눠줄 계획이었으나 책임부서인 건설행정과에서 미관과 보행편의를 해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단다.
그렇다고 평균연령이 40대 정도에 기술도 없는 그들에게 취업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설사 취업이 된다고 하더라도 고용촉진법을 통해 주어지는 일자리는 비장애우들이 기피하는 3D 업종뿐이었으며, 장애우라는 이유로 월급도 많아야 50만원 정도 주면서도 고용주의 생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경우엔 도저히 이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이를 포기하고 노점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노점상이 아니면 구걸 밖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세장애우에 대한 정책부제의 심각성은 많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들이 선호하는 노점상은 계속 법 테두리로 들어오지 못한 채 단속에 쫓기고 생계의 위협을 받았고 그러한 상황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대학, 곳곳이 장애우 출입제한구역
94년부터 실시된 장애우 특례입학 제도. 장애우에게 94년부터 실시된 장애우 특례입학 제도. 장애우에게 대학의 문은 개방되었지만, 장애우에게 대학 생활은 녹녹치 않다. 문만 개방되었을 뿐, 장애우에게 학교의 곳곳은 편의시설이 설치되어있지 않아 출입제한구역과 마찬가지이다. <함께걸음>은 95년에 이어 96년에도 대학의 장애우 편의시설 설치문제를 지적했다.
<함께걸음> 1월호에 소개된 실태조사에 따르면 편의시설 조사항목의 대다수에 단 하나의 편의시설도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 즉, 편의시설이 전무하다는 말이다. 시각장애우용 유도블럭도 없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 역시 고려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산 위에 지어지는 학교의 특성상 장애우가 편하게 이동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자원활동자가 꼭 필요한 법인데 이를 연계해주는 시스템을 갖춘 학교 역시 하나도 없었다. 또 수업시간에 시·청각장애우를 배려하는 조치는 물론 각종 학사업무 역시 장애우 접근성이 떨어졌다. 도서관의 경우 규정에 맞게 지어진 예는 조사대상이었던 18개 학교 24개 캠퍼스에서 전무했다. 꼭 필요한 화장실에 편의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대학식당이 셀프시스템이기 때문에 식사조차 수월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건물의 출입문조차 규정에 맞지 않아서 아예 들어갈 수 없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결국 대학 곳곳이 장애우 출입제한구역인 셈이었다.
<함께걸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4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이러한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자세한 보고회를 갖고 대학평가 기준에 장애우 편의시설 설치조항도 삽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또 9월, 이러한 현실에 문제제기를 하며 서울지역 장애우대학생들이 직접 정당한 교육권 확보를 위한 사진전 및 서명운동을 펼쳤다는 소식도 전하는 등 96년 한해 대학의 편의시설 설치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촉구했다.
장애아동은 학교가 없어서 교육을 못 받는데…,
일반아동의 과밀학급부터 해소하라?
“일반아동은 2부제 수업과 과밀학급을 말하지만 장애아동은 학교가 없어서 못 다니는 형편이 아닌가?”
강남구 일원본동에 들어설 장애아동 특수학교인 밀알학교 설립을 그 지역 주민들이 일반아동의 교육환경도 열악하다며 그 곳에 일반학교를 짓자고 반대하자 정형석 당시 밀알복지재단 상임이사가 특수학교 건축의 반대 명분으로 적합지 않다며 한 말이다.
<함께걸음> 3월호에 실린 이 기사는 밀알학교의 험난한 설립과정을 들려준다.
밀알학교는 남서울교회에서 35억원을 지원받아 94년 10월에 학교설립계획을 승인받고, 95년 1월 강남구 일원본동의 학교부지를 매입했다.
문제는 학교 설계를 마치고 건축허가서를 제출한 후부터 시작되었다. 밀알학교 건너편에 위치한 샘터마을 주민들이 구청에 민원을 제기한 것. 민원의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반아동의 교육환경이 열악하므로 일반학교부터 지어야 한다는 것과 종교재단에 짓는 학교이기 때문에 종교시설로 전용될 것이 확실하므로 건축허가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상 특수학교 건립을 반대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에 불과했다.
학교측은 공식적인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으나 주민들은 참여하지 않은 채,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특수학교를 내세워 종교시설을 짓는다느니, 땅투기를 한다느니, 고위층에 돈을 주고 특혜분양을 받았다느니, 대통령과 관계가 있다느니….
밀알학교는 95년 12월 27일에 건축허가를 받았지만, 건축 현장 입구를 차량으로 막고 장비 진입을 방해하는 등 밀알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이기적인 집단행동이 나날이 거칠어지자, 학교측은 95년 1월 장애인복지를위한공동대책협의회와 밀알학교건립촉진대회를 개최, 5~6백명 정도의 사람들이 침묵시위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집회로 주민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나 끝끝내 협상은 이뤄지지 않았고 주민들은 이후의 공사에도 끊임없이 물리력을 동원해 방해했다. 결국 학교측은 공사방해중지가처분 신청을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법원이 “아파트 주민들이 뚜렷한 이유나 법적 권리 없이 자신들의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해 물리력을 동원, 장애우 특수학교 설립을 방해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집단 이기주의적 행동에 해당한다”며 이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주민의 반대가 잠잠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소동 속에서 96년 3월에 개교하려던 밀알학교는 97년에나 개교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밀알에서 교육을 받을 학생들은 육영학교에서 미리 뽑아 교육을 시켜야 했다. 그 정도로 장애아동의 교육은 열악하건만, 아직도 이러한 지역이기주의는 계속되고 있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8시간 근무도 아니고, 단지 집에서 출퇴근하겠다는 주장에 해고?
실상 사회복지시설종사자의 문제는 시설문제의 또다른 축을 형성하고 있다. 96년 <함께걸음>은 이점을 놓치지 않고 사회복지시설종사자의 인권문제를 세 차례에 걸쳐 실었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8시간 근무도 아니고, 단지 집에서 출퇴근하겠다는 주장에 해고를 당한 조항주(당시 임마누엘재활원 보육사)씨. 단지 그녀만이 아니라 24시간 근무에 한달에 한번 휴가 나가기도 어려운 것이 당시 보육사들의 노동환경이었다. 언제나 그 뒤에 따라붙는 말은 “여기 애들에겐 보모가 엄마다. 자식 두고 집 비우는 엄마가 어디 있느냐”였다. 결국 보육사들은 형편없는 월급에 장시간 중노동이라는 희생만을 강요당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24시간 연속노동은 보육사들의 사회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문제도 있었다. 사람들과 격리되어 24시간 외떨어진 시설에만 갇혀 생활하다 보니 보육사들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결국 보육사들은 외부사회를 포기한 채 시설이라는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고 이러한 소극적 사고가 시설의 문제점이나 직원복지의 문제를 덮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당시 <함께걸음> 7월호는 연속근무가 낳은 불치병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시설병’을 소개하고 있다.
<함께걸음>은 이 기사에서 노동환경의 문제가 결코 사회복지시설종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장시간 중노동이 강요되면 보육사는 자기개발은 커녕 소진되게 되고 시설비리나 시설민주화의 문제는 논의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걸음>은 당시 활발하게 논의가 되고 있었던 사회복지노조를 설립해야한다는 주장을 전하고 있다.
오랜 싸움 끝에 시설 종사자의 1일 12시간 2교대근무는 보장받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전국단위는 아니지만 서울경인사회복지노동조합이 탄생했다. 그러나 아직도 근무법정 근무시간, 휴가 및 연월차 보장 등 근로기준법 준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글 조은영기자 / 사진 함께걸음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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