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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창을 닫으며]깨어나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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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4일, 저녁 뛰다시피하며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갔다. 광장에 가까워지면서 성조기, 태극기를 손에 쥔 어른을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저녁으로 서둘러 삼킨 칼국수가 뱃속에서 미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월드컵, 효순이 미순이, 탄핵사태 등으로 거리의 군중은 익숙해졌으나 10만 인파의 구국기도회라니…우리는 법을 폐지하자 말자하는 논쟁에서 왜 이런 광란에 가까운 모습일까. 눈물이 날려고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외쳤던 한 사람으로서 쓸쓸하고 무겁고 슬픈 마음이 들었다. 

나는 북한공산집단을 따뜻한 볕으로 기억한다. 이 무슨 용공스런 표현이냐고 돌아볼지 모르지만 70년 말 초등학교 2학년때 ‘북한공산괴뢰집단’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그 이전은 기억이 없다. 그때 선생님의 수업내용은 기억나지 않으나 2학년짜리 머릿속에서 북한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쳐들어와서 쑥대밭을 만들고 뿔달린 괴물처럼 나를 잡아먹어버리라는 생생한 공포효과를 창출했다. 어찌나 생생하든지 수업이 끝나고는 기운이 쭉 빠져서 비척비척 양지녁으로 걸어나가 따뜻한 햇볕을 쪼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웅크린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붉은 칸나꽃이었는데 20여 년 지난 이즈음 종로거리나 국회 앞 마당의 칸나꽃을 마주하면 그 공포와 공포효과를 주입하고자 했던 국가권력의 광기가 되살아나 오싹하곤 한다. 특히 ‘괴뢰’라는 단어의 음감이 주는 괴로움은 너무도 강력해서 감히 무슨 뜻인지 알려고 한다거나 두 번 다시 입밖에 내서는 안될 무엇으로서 오랫동안 내 영혼을 갉아먹었다.
15여년 뒤에 굳은 의지로 한자사전을 뒤적여 ‘괴뢰’의 뜻을 찾고서는 길고긴 탄식과 더불어 다시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 무시무시한 금기가 겨우 허수아비였다니! 

정작 시청광장에 다다라서 마주친 것은 감정적 흥분상태로 또아리를 튼 어른들 무리였다. 그들은 집회의 여운을 가라앉히지 못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격앙된 목소리와 과도한 흥분을 표출하고 있었다. “젊은 것들이 나라를 뺏어갔다”, “우리가 목숨걸고 지킨 나라, 우리가 다시 되찾아야한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졌고 분노, 증오, 소외감, 박탈감들을 신랄하게 내뱉고 있었다. 30분 넘게 서성거렸으나 정작 듣고자 했던 보안법이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참가자가 보안법 폐지를 학생들에게 얘기한 전교조 교사 집으로 쳐들어가자고 선동하자 모두가 “옳소! 옳소!” 했을 뿐이다.

내가 “깨어나 일어나” 라고 말을 건네야할 진정한 대상은 누구일까?
국가보안법은 우리사회에 56년 동안 반공이데올로기, 이분법 사고를 통해 ‘국가보안법 최면상태”를 유지해 왔다. 젊은 세대인 내가 아무리 자유로운 사고를 한다고 큰소리쳐도 내 안의 국가보안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반세기 이상 국가보안법 세계에서 살아온 그 어른들이야 오죽할까.
국가보안법 폐지는 우리사회가 집단적 최면상태에서 깨어나 인권실현과 민주주의 원칙들을 실천하기 위한 시작일 뿐이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열여섯번째 인권콘서트를 만들고 있다.

글 박성희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간사)


 

작성자박성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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