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노숙장애우, 거리에서의 삶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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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요즘 언론에서는 노숙인의 수가 4년 만에 최고치에 이르렀다거나 작년에 비해 무료급식소의 밥줄이 50% 이상 증가했다는 등의 보도가 자주 나오고 있다. 그러나 경기가 나쁘니 민간의 지원은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이란다.
결국 지난해부터는 겨울이면 줄어드는 노숙인의 숫자가 겨울에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얼어죽을 수 있는 겨울에도 길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을 만큼 열악해진 노숙인의 삶을 보여준다.
노숙인들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고, 폭력과 인신매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장애를 가지고 있는 노숙인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장애를 가진 노숙인이 30%나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노숙인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에서 조차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으며, 동료 노숙인 사이에서도 차별 받고 무시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삶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노숙 장애우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들을 찾아 거리로 나섰다.
2004년 8월 23일 청량리
내리 며칠동안 쏟아진 때늦은 장맛비. 그 비가 그치고 난 서울 청량리는 막바지 여름의 열기를 후덕지게 내뿜고 있었다. 늘어지듯 길게 꼬리를 빼며 시끄럽게 우는 매미소리와 자동차 클랙션 소리…. 한낮의 청량리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습기를 머금은 스펀지처럼 마냥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청량리역사 뒤쪽으로 쌍굴다리를 지나면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 ‘밥퍼’가 있다. 그 곳에서 막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한 노숙장애우를 만났다. 50세쯤 됐을까, 알코올중독으로 제천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작년 10월 퇴원했다는 그는 병원생활 중에 환청이 들리는 이명(耳鳴)현상이 생겨 정신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단다.
“퇴원은 했지만 병원생활을 오래해서 어디 받아주는 데가 있나요? 취업도 안 되고, 집에서는 직접 벌어먹고 살라며 받아주지 않지…. 그래서 강원도 영월 고향집을 등지고 청량리로 왔어요. 마누라는 애진작에 집을 나갔고, 하나 있는 아이는 늙은 엄마가 키워요.”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전 한식요리사였다는 그는 지금 정릉천 하천가에서 노숙을 하고, 하는 일 없이 하루 두 끼 밥 먹으러 다니는 게 일과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요리사로 잘 나가던 그가 노숙인으로 전락하게 되어버린 건 전적으로 술, 그중에서도 소주 때문이다.
그는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겉으로는 장애 유무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기자가 장애우 등록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어보자 “장애우 등록증 그거 필요 없어요. 지하철표야 그냥 달라면 주거든요. 잃어버렸는데 재발급 받으려면 고향에 가야하고 게다가 한달이나 기다려야 나오니 원….” 그런데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꾸만 허리에 손을 갖다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해서 어디 아프냐고 묻자 “어제 청량리역에서 자는데 못된 애들이 와서 허리를 밟았어요. 뭐 이유가 있나. 경찰에 신고해봐야 잡지도 못하는데 신고하면 뭐 해…. 저기(다일천사병원) 병원에 가보래서 거기나 가보려구요.”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힘겹게 몇 발자국씩 발걸음을 옮겼다. 안타까움 때문일까, 걷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는. 그의 뒷모습에서도 허리 통증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게 보이는 듯 했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김지선씨의 말에 따르면 노숙인 대부분이 술을 마시지만 그의 경우처럼 술이 문제가 되어 노숙을 하게 되는 건 드문 편이란다. 대부분은 노숙을 하면서 수치감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노숙 초기에 노숙생활의 정보를 가진 다른 동료들과 어울려야 하기 때문에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결국 알콜중독을 비롯해 우리가 소위 ‘부랑끼’라고 부르는 자포자기, 의타성, 게으름 등은 노숙생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셈이다. 그래서 노숙인 관련 기관 전문가들은 노숙생활 초기에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지 노숙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노숙인들의 사회복귀가 어렵다고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다.
“일자리 구할 땐 활동성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고, 장애우등록을 하려니 활동성이 있어서 안 된대요.”
올해로 13년째 노숙인과 주변 노인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온 ‘밥퍼’이지만 지금의 식당자리는 2002년에야 얻었다. 그 전엔 황량한 쌍굴다리에서 식사를 제공했다. 이 때문에 추운 겨울에 식사를 기다리며 줄을 섰다가 그 동안을 못 참고 동사한 노숙인이 두 명이나 있었다는 것이 ‘밥퍼’에서 일하는 한 관계자의 얘기다. 그는 이 곳 ‘밥퍼’에서는 하루 점심만 800명에서 많은 날은 1200명, 평균적으로 쌀 140Kg이 소비된다며 “노숙인들은 보통사람의 두세 배를 먹어요. 보통 60명이 먹을 밥을 여기선 35명 정도 배식하면 끝이에요. 뭐 언제 다시 먹을지 모르니까 한번에 많이 먹어두는 거겠죠.” 라고 말했다. 지난 1월부터 5월까지는 아침식사도 제공했었는데 소문이 나면서 혼자서 제공할 수 있는 한계인 60명을 넘어서는 바람에 중단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이어진 말이다.
‘밥퍼’ 근처에서 만난 이대학씨, 49세인 그는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애우 등록이 되어있지 않아 서류상 ‘비’장애우이다. 이씨는 현재 노숙인이 아니다. 그는 월 20만원을 내고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점심만 ‘밥퍼’에서 먹고 아침과 저녁은 고시원에서 먹는단다. 그렇지만 그도 외환위기 때 노숙을 해 본 경험이 있다. 당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서 노숙을 하다 영등포 문래동 ‘자유의 집’에 들어가 1년간 생활했다. 그리고 한두 군데 노숙인 쉼터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숙인을 위해 마련된 쉼터는 술 마시는 사람들의 행패 때문에 오래 지낼 곳이 못됐다. 그래서 일자리를 구하게 되면서 다달이 20만원씩을 내야 하지만 음주자를 받지 않는 고시원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시장에서 등짐, 지게 지는 일은 물론 농장에도 나가고 건설현장에도 나간다. 봄, 가을 건설경기가 좋을 때 저축을 해서 용역 일자리가 거의 없는 겨울을 대비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경기침체로 일자리가 거의 없어 걱정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인지라 지금처럼 경기가 나빠 일자리 얻기 힘든 날이 계속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노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다리에 소아마비를 장애를 가지게 됐어요. 나이가 좀 들었지만 지금도 뛰면 어지간한 사람은 못 쫓아올 정도로 가벼운 장애인데도 불구하고 장애우라고 일자리 얻기가 쉽지 않아요. 예전엔 취업해서 공장도 다녔는데, 지금은 닥치는 대로 일하려고 해도 일자리 잡기가 쉽지 않네요.”
그는 자유의 집에서 생활할 때 장애우등록을 하려고 병원에 갔었다고 했다. 하지만 “활동성이 있는데 무슨 장애우냐”며 진찰조차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활동성이 있으니 장애우가 아니다”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장애우라서 일자리를 못주겠다고 하고. 그래도 그는 커다란 불만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았다.
“살아오면서 국가에서 도움 한번 받은 적이 없어요. 난 활동성이 있으니까….”
그의 고향은 과천. 멀지도 않다. 다른 형제들도 나름의 삶이 있으니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스무 살에 집을 나왔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 청량리에 정착한지 어느새 15년이 되어간다. “청량리는 시장도 있고, 음식값 등의 물가가 싸서 없는 사람들에겐 그나마 살기 나은 곳이에요. 미래요? 많이 생각은 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그냥 웃는다.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게 하는 빠듯한 삶‘밥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또다른 급식소 ‘프란체스코의 집’이 있다. 이 곳은 다른 급식소와는 다르게 노숙인들이 직접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배식하는 것이 아니라 여느 밥집처럼 앉아 있으면 자원활동가들이 직접 밥을 가져다준다. 역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노숙인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이 곳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한 장애우를 만났다. 그는 한 손에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는 그래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국기법)에 따른 수급권자다. 정부에서 매달 나오는 생계비로 용두2동에 16만원짜리 쪽방을 얻어 지내고 있다. 그가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건 불과 1년. 이전까지는 노숙을 하며 지냈다. 서울역 근처에 있는 노숙인 쉼터에서 쪽방을 얻어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노숙생활을 접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노숙인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가족과 형제는 있지만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다. 애초 폐결핵으로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된 것이 80년이니까 벌써 20년도 넘은 일이다. 그동안 결핵으로 공주, 마산, 서울 은평 등의 시립병원을 떠돌아다니다 이 곳 청량리에 정착한지는 10년쯤 된다.
예전엔 건축시공면허를 가지고 일을 했는데 지금은 결핵으로 폐도 상당히 망가진 상태이고, 고혈압에 지체장애(2급)까지 있어서 직업을 얻는 것은 포기한 상태다. 지체장애는 4년쯤 전에 사고로 복숭아 뼈를 다쳐서 얻게 되었다. 장애를 가지고 나서 한 동안은 장애진단을 받을 돈이 없어서 장애등록조차 하지 못했단다. 몸이 안 좋아 약을 달고 사는 그는 서울역 근처에 있는 쉼터에서 그 약을 조달하고 있었다.
수급권이 있으니까 다른 노숙인들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급권이 있어도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빠듯한 삶이다. 갑자기 이런 의혹이 든다. 국기법에 따른 모든 급여산정은 다음과 같은 제약조건을 달고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희망 따위는 품지 않을 만큼”이라는 제약조건 말이다.
‘프란체스코의 집’ 역시 정부지원 없이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경기가 나빠진 요즘은 찾아오는 노숙인들은 늘어나는데 후원금은 오히려 줄어들어 운영이 힘들단다. ‘프란체스코의 집’ 관계자에게 다른 곳과 달리 일반 식당처럼 직접 서빙까지 해주는 이유를 묻자 “손님이시니까요.”라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작은 규모의 식당. 식당 문 바로 옆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있다. “밥을 남기면 벌금 2000원.” 진짜로 벌금을 받느냐고 물어보니까 ‘프란체스코의 집’ 운영자 김수희 씨는 “음식을 남기면 야단을 치고 식당이 문을 닫는 3시까지 다 먹고 나가시도록 해요. 그래도 안 되면 벌금을 받죠.”라고 말하며 멋쩍게 웃는다. ‘프란체스코의 집’에는 노숙인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행상을 하는 사람들도 밥을 먹으러 온다. 김수희 씨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행상을 하는 한 장애우가 카세트테이프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세워두고 밥을 먹으러 들어왔다. 그는 왼쪽 팔과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물어보니 벌써 24년째 행상 일을 하고 있단다. 이제는 이런 노래 테이프를 듣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그도 알지만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단다.
“어데!! 누구한테 무슨 해코지를 당하려구 밤에 잠을 자!!”
돌아 나오는 길. 길가에 신문을 깔고 앉아 보도블록 난간에 빨래를 널어놓고,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가방에 기대어 쉬고 있는 장애를 가진 한 노인이 눈에 띈다. 꼬장꼬장한 욕쟁이 할아버지 같은 인상에 날카로운 눈매. 그가 노인이 아니라 청년이었다면, 그의 옆에 목발이 놓여있지 않았다면, 기자는 아마도 그를 배낭여행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배낭여행객처럼 거리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지도 않고, 그에게 거리에서의 삶이 낭만적인 일탈도 아니다. 옆에 놓인 목발이 그가 지고 다니기에는 분명 힘겨울 배낭의 무게를 떠오르게 한다. 나아가 그 배낭보다도 더 무거울 삶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있는 듯 보였다.
기자가 말을 건네자 장애우단체에서 나왔냐며, 대뜸 어느 지부냐? 라고 묻는다. 한 장애우 단체의 동대문지부에서 간부로 일했다는 그는 “협회에서 나오래서 나가보면 신문구독해라 뭐해라, 꼬박꼬박 회비만 3만원씩 챙겨가고… 지들이 해주는 게 뭐가 있어? 정부에서 지원 나오는 거 뻔히 아는데 지들끼리 다 해 쳐 먹고… 내가 거길 뭐 하러 나가!”라며 화를 낸다.
내막을 들어보니 그도 국기법 수급권자다. 그렇지만 60세가 넘었는데도 방을 얻지 않고 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다. 쪽방이라도 거처를 마련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여인숙을 구하면 적어도 한달에 17만원이 나가. 원래 전셋집을 얻어 살았는데 전세금이 올라가면서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났어. 어디 요즘에 불쌍하다고 도와주는 거 봤어? 장애우라고 봐 주는 거 없어. 다들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이지. 교회? 다 변했어. 문 열어둬서 눕기도 하고 쉬기도 하던 동부교회도 문 닫아 걸었어. 병신이 가봐야 구걸이나 하지 도움 될 리 없다 이거지. 청량리 교회도 옛날엔 가면 와서 밥 먹으라고 했는데 요즘엔 그런 소리 안 해.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
그는 이야기 하는 내내 멀쩡한 놈도 헌금 안하는데 나 같은 놈에게 헌금하라고 한다고 성당도 욕하고, 불쌍한 사람 주라고 공짜로 받은 옷을 자기더러 사가라고 한다고 알뜰시장도 욕하고…, 아무튼 세상에 불만이 많았다. 잠도 이렇게 길에서 자냐고 물어보니까 큰일 날 소리 한다는 듯 인상을 잔뜩 구기며 “어데!! 누구한테 무슨 해코지를 당하려구!!”라고 말하며 손사래를 친다. 그는 밤이 되면 사람이 많은 대합실이나 버스정류장에서 꼬박 앉아서 지샌다고 했다. 그 와중에 벌써 목발을 네 번이나 잃어버렸다.
“이거(목발) 가져다 술집에 가서 술을 먹고 장애우라고 우기고 돈을 내지 않고 그냥 나오는 거야, 이것도 4만원이나 하는데, 나는 일년이 가도록 먹지도 않는 고기에 술을 처먹고 그 지랄을 한다니까.” 거리에서 밤을 꼬박 지샌 다음 아침이 되면 지하철을 타고 인천에서 의정부 사이를 오가며 잔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들도 그가 다리가 불편한 걸 아니까 깨우지 않는단다. 경찰이 뭐라고 안하냐고 물었더니 “병신한테 와서 얘기하면 뭐할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다.
그는 커다란 가방을 매일 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멀리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침은 시장을 돌아다니며 분식집에서 어제 팔다 남은 김밥을 얻어먹고, 점심은 프란체스코의 집에서 먹는다. 미래에 대해선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다. “몸뚱이 불편한 놈이 미래는 생각해서 뭘 해!”
청량리에는 노숙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또 다른 급식소가 있다. 제기동 역 근처에 있는 ‘소망의 집’, 이 곳은 본디 녹십자 혈액원 앞에서 피를 팔아 끼니를 때우던 매혈 노숙인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했다. 그러나 경험이 없던 당시 운영자는 과다한 운영비를 견디지 못해 얼마 안가 파산하게 되었고, 장애우를 중심으로 사역하기 때문에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작은예수회가 인수해서 운영하게 되었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그래서 부지런한 노숙인이라면 하루 세 끼를 이곳에서 해결 할 수 있다.
‘소망의 집’ 운영자 김종학 씨에 따르면 건설경기가 나쁜 탓인지 이곳도 요즘 확실히 찾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비 오는 날은 아예 건설 쪽 일이 없기 때문에 급식소를 찾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면담도 한다는 그는 “요즘은 여성 노숙인들도 많이 늘어났어요. 경제가 안 좋으니까 가족 전부가 거리로 나앉기도 해요. 그렇게 길거리로 나온 노숙인들을 부랑인 시설에 수용하는 건 문제가 있죠. 그건 교도소랑 다를 바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2004년 8월 23일 영등포역
서울 영등포역 주변은 요즘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주거지인 쪽방 철거로 시끄러운 곳이다. 영등포구청이 작년 10월 영등포1동에 있던 쪽방 240여 개를 강제 철거했고 또다시 지난 7월 초에 영등포2동의 쪽방 철거 계획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철거 이유는 지방자치단체의 녹지조성. 지자체가 노숙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곳의 노숙인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아 그 이야기를 들으러 영등포역으로 갔다.
영등포 역을 나오자 롯데백화점 앞 원형 벤치에 노숙인들이 무리지어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역 광장 왼편 광야교회 표지판을 보고 따라가자 좁아지는 골목길에 파출소가 하나 버티고 서있다. 파출소 앞을 지나 좁다란 길을 따라 들어가니 벌써 광야교회 앞엔 사람들이 기다란 밥줄을 섰다. 우리가 찾아간 광야교회엔 놀랍다 싶을 정도로 장애우가 많았다. 노숙인들 대부분이 한두 가지 이상의 장애를 가지고 있어 보였다. 영등포역과는 불과 삼백 미터 남짓이다. 그러나 파출소를 사이에 두고 이편과 저편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3개월 동안 휠체어에서 내려 본 적이 없어.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누워서 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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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투자를 한다고 까불다가 무려 20억을 날렸어요. 결국 부인과도 헤어지고 제주도로 도망가서 1년을 살다가 이 곳으로 오게 됐죠.”
그러나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 놓고도 끝내 자신이 어떻게 장애를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긴 밥줄 옆에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장애우가 눈에 띄었다. 예순한 살이라는 그는 예전에 차를 정비하던 기술자였단다. 그러나 28살 젊은 나이에 처음 중풍으로 쓰러지고 이어 두 번을 더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지금처럼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결국 거리에서 노숙을 하다가 부랑인 수용 시설인 ‘은평의 마을’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은평의 마을’에서의 생활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장애 때문에 일일이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나름대로 그 ‘안’에서는 자유로웠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입소 후 5개월이 지나자 외출도 가능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었다. 비장애우들은 그 안에서 일을 할 수 있어서 돈을 모았지만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일이 주어지지 않아서 수중에 돈이 없었단다.
“일하는 사람들은 한달에 봉급을 두 번 받아. 한번에 만오천원 정도 되는데 여기선 몰라도 그 안에선 큰돈이야. 여기 몇십만원의 값어치가 있다고…. 막걸리 한잔에 오백원. 마시고 싶으면 나도 사먹었는데 막걸리는 배운 적이 없어서 못 먹겠더군. 암튼, 지내다 보니 돈이 떨어졌어. 그거 참 골치 아프대.”
돈이 없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그는 정부에서 그의 이름으로 나오는 생계비를 ‘은평의 마을’에서 대신 받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된 모양이었다. “정부에서 내 몫으로 나오는 돈이니까 우리에게 줘야 하는 건데 그런 게 전혀 없어. 원 아무데서도 돈이 안나오니 내가 돈이 어디 있어? 그래서 은평의 마을에 있을 때보다는 오히려 지금이 훨씬 더 편해.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고…” 결국 그는 외출을 신청해서 ‘은평의 마을’ 밖으로 나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단다.
영등포역에서 먹고 자는 생활이 벌써 3개월째라고 한다. 다행히 영등포역은 장애우 화장실이 있어서 혼자 씻는 것이 가능하다. 국기법 수급권은 있냐고 물었더니 대뜸 “사연이 많소.” 한다. 사연인 즉, 친구 집에 얹혀살며 미안해서 집에 잘 안 들어갔더니 동사무소에서 현장조사를 나온 날 집주인이 그런 사람 안산다고 한 모양이다. 그 바람에 수급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국기법 수급권자로 책정되어 있고, 정부에서 주는 생계비가 적금처럼 자신의 이름으로 동사무소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돈이 모이면 전세방을 얻고 싶다고 말했다.
청량리가 생각나 길에서 자면 다른 노숙인들이 해코지 안하냐고 물었더니, “경찰서가 코앞이잖아” 한다. 그러면서 지나가듯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누워서 자는 거야.” 그 말을 듣자 당황스러웠다. 지난 3개월 동안 휠체어에서 내려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며 꺼낸 그의 소원. 그러고 보니 그의 발은 이미 팅팅 부어 검붉게 죽은 채였다. 휠체어를 잃어버릴까 싶어 휠체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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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사람을 내쫓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든다고 하니, 노숙인들은 나무나 풀만도 못하단 얘기 아닌가요?”
오후 세 시가 되자 광야교회 앞 무료급식소는 자취를 감췄다. 많던 노숙인들도 그새 어딘가로 사라지고, 그 곳에서 무료급식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건 달그락거리는 설거지 소리뿐이다.
광야교회는 한눈에 봐도 어둡고 낡은 건물이다. 이층과 삼층 난간엔 이 곳에서 생활하는 노숙인들이 빨아 널었음직한 청바지가 여러 개 걸려있다. 빨아 널은 것이 분명한데도 청바지는 광고에 등장하듯 파랗고 뽀송뽀송한 청바지가 아니다. 청바지는 며칠동안 거리를 헤매다 돌아온 꾀죄죄하고 주름이 가득한 지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노숙인들의 피곤한 삶이 빨아 널은 옷에 스며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담임목사를 만나기 위해 광야교회로 들어섰을 때, 현관엔 신발 하나 놓여있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가 싶었는데 어둠 속으로 40명 남짓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예배당에는 대형 텔레비전의 화면만 움직이고 누워 있는 사람들은 거의 미라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예배당 옆 작은 골방에서 기자는 김양목 부목사를 만날 수 있었다. 김 목사는 “구청직원을 만나니까 영등포역에서 500m까지를 모두 녹지로 조성하는 계획은 변경할 수가 없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쪽방 지어 놓고 술이나 마시고… 저 새끼들보단 녹지가 낫다’고 그러더군요.” 김 목사는 조금씩 흥분하고 있었다. “멀쩡히 살고 있는 사람들 내쫓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든다고 하니, 노숙인들은 나무나 풀만도 못하다는 얘기 아닌가요? 이 사람들도 노숙하기 이전엔 국가에 세금도 내고 군대도 다 갔다 왔어요. 이 사람들은 국가에 의무를 다했는데 국가는 지금 당장 이 사람들이 돈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 대해도 되는 겁니까?”
작년 10월에 벌써 영등포1동 일대 240여 개의 쪽방이 강제 철거되었고 이 교회를 비롯해 영등포2동 일대 쪽방 60여 개도 곧 철거당할 처지에 놓여있다는 게 김 목사 말이었다.
김 목사는 영등포역 일대 쪽방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사업에서 실패하거나 사고를 당한 사람, 폭력조직에 있다가 밀려난 사람, 그리고 길 건너 윤락가에서 생활하다 나이가 들어 일할 수 없게 되자 이곳으로 넘어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 대부분이 가장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정신적으로는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는 게 김 목사의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비감한 표정으로 이곳의 남자들 대부분은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발생하는 위암, 간경화, 간암으로 죽고, 여자들은 오랜 윤락가 생활의 후유증으로 자궁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자궁암으로 사망한단다. “이곳은 창살 없는 감옥이에요. 그런데도 노숙인들은 갈 곳이 없죠. 그래서 이 지역의 쪽방을 없애고 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킨다고 해도 곧 다시 이곳에 모일 수밖에 없을텐데, 왜 쪽방을 없애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며 안타까워했다.
2004년 8월 25일 서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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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농성에 참여한 노숙인 중에 장애를 가진 김지태(뇌성마비 3급)씨가 있었다.
그는 올해 29세로, 노숙생활은 올해로 8년째에 접어든다고 했다. 부모에게 버려져 창원 홍익재활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냈다는 그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재활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건 나이 때문이었다.
“재활원을 나와서 바로 서울로 올라왔어요. 처음엔 인력사무소를 돌아다녀봤지만 장애 때문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더라구요. 결국 의정부에서 약 1년 동안 고물을 팔았는데 그나마도 몸이 불편해서 더 지속할 수 없었죠.”
지태씨가 처한 가장 큰 문제는 그를 돌봐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장애 때문에 일자리조차 얻을 수 없는데도 기거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국민기초생활법에 따른 수급권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몸을 누일 곳조차 없으니 더더욱 수급권이 필요한데, 주소가 없으니까 급권을 가질 수 없고, 수급권이 없으니 겨울이 와도 쪽방 한 칸 얻을 돈이 없다. 지태씨뿐만 아니라 노숙인 대다수가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동일한 시간과 공간 속에 있지만 정부는 그들을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흔히 편견을 갖기 쉽지만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들이 모두 구걸을 하며 생활하지는 않는다. 지태씨의 경우도 구걸을 하지 않는단다. 그러면 구걸도 하지 않고 일도 나갈 수 없는데 그는 어떻게 일용할 양식을 구할까? “돈이 필요하면 교회로 가요. 거기 가면 돈을 주거든요. 오백원, 천원씩 주는데 그걸 모으는 거죠. 열심히 다니면 일주일에 만오천원정도 모을 수 있어요. 그리고 신발이나 옷은 헌옷 수거함에서 얻어요.” 지태씨의 말이었다.
서울역에서 만난 또 다른 장애우는 22살의 여성이었다. 깔끔한 옷차림에 여느 여학생과 다를 바 없이 발랄해서 기자는 그녀가 노실사에서 일하는 간사인 줄 알았다. 아마 그녀가 다가와 자신도 장애우라고 밝히지 않았다면 기자는 그녀가 장애우인 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서울역에서 현재의 신랑을 만나 결혼을 했고 벌써 아이도 낳은 엄마였다. 그녀는 자신도 철도 공안원에게 신발로 머리를 맞아봤다며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취직자리를 알아봤지만 언어장애 때문에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취업하기 위해 옷가게도 가보고 여기 저기 많이 가봤는데 모두들 언어장애가 있다고 일자리를 안줘요.”
그래도 그녀는 그동안 남편과 함께 방을 얻어 지냈다. 하지만 남편이 넉 달 전에 쪽방 강제 철거를 막으러 영등포에 갔다가 다치는 바람에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병원에서 4개월을 보냈고, 결국 남편의 약값과 물리치료 비용으로 모아 놓은 돈을 모두 쓰고 현재는 방을 빼서 오갈 데가 없는 상태였다. 기자가 만난 그 저녁에도 그녀는 갈 곳이 없었다. 많은 노숙인들이, 특히 장애를 가진 노숙인들이 그녀처럼 갈 곳이 없었다.
“가장 힘든 건 내일이지 뭐….”
한 노숙 장애우의 무심한 말이 귓가에 남아있다.
누군가 또다시 떠오르는 태양에서 희망을 읽을 때, 다른 누군가는 그 태양에서 또다시 시작되는 삶의 고단함을 본다는 것이 슬프다.
*박스기사(1)
거리에서도 차별 받는 장애우
2002년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이하 노다지)에서 실시된 한 조사에 따르면 노숙인 중 30%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노숙인에게 제공되는 서비스 중에서 장애를 고려한 서비스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숙인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숙박시설의 경우에도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다. 현재 제공되는 노숙인 숙박시설은 크게 노숙인 쉼터와 드롭인센터 두 가지이다. 그러나 모두 장애우에 대한 고려가 거의 전무한 상태다.
우선 노숙인 쉼터는 현재 전국 109개 수용가능인원 총 3,290명이다. 이 중에 장애우를 대상으로 하는 쉼터는 천애재활원과 임마누엘재활원 단 두 곳이며 수용가능 인원이 각각 15명씩 30명뿐이다. 노숙인의 5.9%로 조사된 여성의 경우도 5군데 115명, 노인이 4군데 245명, 가족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쉼터가 4군데 115명이 수용가능하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장애우가 차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노다지의 거리지원팀 김지선씨는 “장애우가 입소를 원할 경우 장애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설계된 일반 쉼터에 그냥 입소하거나 일반 쉼터에 갈 수 없다고 판단될 정도로 장애가 심한 경우에는 장애우시설이나 부랑인시설로 입소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숙박시설인 드롭인센터(Drop in Center, 일시방문시설)는 쉼터 입소를 원하지 않는 노숙인을 위하여 목욕, 세탁은 물론 최대 열흘까지 잠도 잘 수 있는 이용시설이다. 이 시설은 2002년 하반기부터 설치되어 노숙인의 73%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용을 원할 만큼 수요가 넘쳐 앞으로 계속 확대 설치될 예정이다. 그러나 김씨의 말에 따르면 현재 서울지역에 설치된 네 군데 모두 2층에 위치하고 있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이용할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노숙인 정책에 장애가 고려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김씨는 현재의 노숙인에게 제공되는 서비스가 주로 노동가능성이 있는 소위 실직형 노숙인에 초점을 맞춰져 있으며 노동가능성이 없는 장애우의 경우 부랑인으로 간주하여 시설보호를 위주로 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박스기사(2)
노숙인의 권리, 기초생활보장 혜택 받을 수 있다
정부는 2001년 비닐하우스, 판자촌, 쪽방 등에 거주하는 사람들, 노숙인 등으로서 주민등록상의 문제로 인하여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될 수 없는 취약계층에 대한 특별보호대책을 내놓았다.
이 대책에 따르면 주민등록이 없거나 다른 시군구에 있더라도 현거주지의 일정한 주거(주거의 형태와 관계없음)에서 실제 최소한 한 달 이상 지속적으로 거주한 경우 기초생활보장수급권을 신청할 수 있다. 현거주지에 주민등록을 바로 설정할 수 있는 경우에는 즉시 현거주지에서의 신청 자격이 부여된다. 그러나, 주거라고 볼 수 없는 길거리, 지하철, 대합실 등에서 노숙하고 있는 경우는 바로 신청할 수 없다. 이 경우 노숙자 쉼터, 사회복지시설, 쪽방이나 여인숙 등 일정한 주거로 옮기면 우선 긴급급여를 받을 수 있고, 옮긴 후 한달 이상 거주하면 수급자격에 대한 조사를 거쳐 기초생활보장을 받을 수 있다.
선정기준에 해당하는 사람은 현 거주지의 읍면동사무소에 찾아가 사회복지담당 공무원과 상담한 후 신청서를 작성하면 된다.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은 신청자가 선정기준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상담 및 조사를 하며 신청 30일 이내에 결정하여 통지하도록 되어있다.
구체적인 지원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수급자 결정전이라도 생활이 어려워 긴급한 보호가 필요한 경우에는 우선 긴급급여(1인가구 149천원)가 1개월에 한해 제공된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결정되면 생계 및 주거비로서 소득이 없는 단독 가구는 최대 32만4천원을 받게 되고, 필요한 경우 의료급여 ·중고등학생 교육비·출산비·장제비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지원은 예금통장이 없더라도 현금이나 상품권, 식권, 숙박시설이용권 등의 형태로 한달에 한번 또는 여러번 생계 및 주거비를 직접 받을 수 있다.
단, 노숙인 쉼터 거주자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하는 쉼터에서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고 있으므로 생계 및 주거비는 받을 수 없고, 필요한 경우 의료급여 ·중고등학생 교육비·출산비·장제비만 받을 수 있다. 또,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의 경우에는 스스로 일자리를 찾거나 읍면동사무소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이 안내하는 자활사업에 참여해야 하며, 이를 거부하면 생계비 전부나 일부를 받지 못한다.
거주지를 이전하는 경우에는 전 거주지 읍면동사무소에서 "수급자증명서"를 발급받아 이전한 거주지 읍면동 사무소에 제출하면 연결해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노실사 문헌준씨는 이러한 방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숙인들이 이런 혜택을 잘 모르고 또 현장에서는 이 제도가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는다며 그 이유에 대해 “예산규모를 미리 정해놓고 그 예산에 맞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의 수급권자 수를 조정하는 국가의 태도상 수급권자가 급증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기 꺼려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스기사(3)
“노숙인 개개인에 맞는 개별화된 지원이 필요하다”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 대표 문헌준씨
지난 8월 11일 서울역사 안 유실물보관소에서 정신장애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노숙인 문 모(27세)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 모씨가 개찰구 옆에 서 있던 역무원 박 모(47세)씨의 목을 뒤에서 팔로 걸어 넘어뜨리자 철도 공안원이 이러한 문 모씨의 행위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 ‘외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판명되어 철도 공안원의 가혹행위 논란이 일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25일부터 서울역 광장에서는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이하 노실사)과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이 서울역 노숙인들과 함께 문씨의 사망에 항의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노실사 대표 문헌준씨를 만나 이번 사건과 함께 노숙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 노숙인은 주로 역 주변에 많이 모이는데 특별한 까닭이 있나
“첫 번째 이유는 역에 있는 화장실에서 씻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노숙인이 모이다 보니 노숙인에 대한 지원체계도 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역주변이 인력시장의 기능까지 하고 있다.”
- 이번 사건의 핵심은 뭔가
“철도 공안원의 노숙인 단속방식에 문제가 많다. 물론 공안들이 노숙인을 단속하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공안원들도 노숙인들이 만취해서 서울역에 들어오거나 씻지도 않아 냄새나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대합실에 있으면 시민들에게 항의를 받기 때문에 단속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해를 한다. 하지만 철도 공안원도 철도청에 소속된 국가공무원이다. 국가공무원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단순히 단속 위주로 그것도 강압적으로 노숙인을 내모는 건 어떤 이유를 대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 이번 농성을 통해 알리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서울역 공안분실이 너무 폐쇄적이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이고 또 하나의 요구는 철도 공안원들이 노숙인에 대한 의료상식을 갖고 단속을 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철도 공안원들은 노숙인들을 역 바깥으로 쫓아 낼 때 대부분 옛날 경찰들이 하는 것처럼 가슴이나 무릎을 가격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노숙인이 심부전증이나 당뇨 등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 그 정도의 충격도 견디지 못한다. 당뇨병의 경우 제2의 나병이라고 부를 만큼 작은 상처에도 살이 썩어 들어가는데 공안들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따라서 철도 공안원들이 노숙인에 대한 의료상식을 갖도록 이번 기회에 조치가 있어야 한다.”
- 노숙인 겪는 주요 인권문제는 무엇인가
“얼마 전에도 보도가 됐지만 노숙인들은 각종 질병, 폭력뿐만 아니라 장기밀매, 인신매매, 신분도용, 신용사기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역 주변에 범죄조직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철도 공안원들에게 불만이 있는 것도 이점과 관련이 있는데, 철도 공안원들은 역사와 철도 안에서 수사권이 있는데도 이러한 노숙인이 처한 열악한 문제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역사 안에 있는 노숙인들만을 단속할 뿐이다. 결국 공안들이 하는 일은 노숙인을 역에서 끌어내는 일, 역사 안에 들어온 노숙인들에게 범칙금을 부과하는 일 뿐이다.”
- 노숙인이 처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뭐라고 보는가
“가장 시급한 것은 주거와 실업의 문제다. 이 두 가지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노숙인이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은 건설경기가 죽어서 노숙인이 일용직을 얻는 게 힘든 상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노숙인들은 그나마 얻고 있던 쪽방조차도 내놓고 나와야 할 것이다.”
- 쉼터와 쪽방도 있는데 노숙인들이 들어가지 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먼저 수급권자는 쪽방 주거비 지불하면 남는 게 거의 없기 때문에 쪽방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주거비가 부담스러우면 그러면 쉼터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을 하지만, 쉼터는 주거 개념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10명씩 한방에서 생활해야 하니까 어려움이 많다. 노숙인 대부분이 저학력이고 한두 가지 이상의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계신 분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로부터 배제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함께 모여 있는 상황을 견디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사람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 노숙인을 위해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
“노숙인들의 근로능력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 정부가 새 판을 짜야한다. 노숙인 개개인에 맞게 개별화된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쉼터는 요양원화되어야 한다. 노숙인 대부분이 몸이 아프지만 딱히 어디가 아픈지 모르기 때문에 병원에서도 금방 쫓겨나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요양원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런 공적 요양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현재 대부분의 노숙인들은 정신적 공황, 무기력 등의 심각한 상태에 빠져있다. 따라서 역사를 중심으로 민, 관이 노숙인들이 노숙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파악하고 함께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만 한다.”
- 노숙인은 주로 어떤 요인으로 사망하나
“노실사에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년에 약 400~450명이 길에서 사망한다. 예전과는 다르게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경우 보다는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노숙인이 거리에서 사망한 경우에 어떻게 처리되는지
“거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특별한 외상이 없는 경우 3일 동안 가족이 찾아오지 않으면 구청으로 넘어가고 구청에서도 가족을 수소문 해봐서 나오지 않으면 무연고자 처리되어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보내지는 게 일반적인 경로다.”
* 노숙당사자운동단체로 알려진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은 2001년 전국 노숙인 복지시설 실무자 80여 명이 참여하여 창립했으며, 노숙인보호법 제정과 노숙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철폐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다.
글·사진 조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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