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 UP.캠페인
본문
“빈곤이란 한자를 풀어쓰면 가난해서 통하지 않는, 즉 ‘소통불능의 상태’를 의미한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는 빈곤을 ‘사회적 배제’란 용어로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유럽연합(EU)의 전신 유럽공통체(EC)에서는 1980년대 ‘사회적 배제’를 공식 용어로 채택하였다.”
가난과 빈곤의 차이
중, 고등학교 시절 늘 칠판 한쪽 구석에는 몇몇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떠든 사람? 아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이었다. 심지어 방송으로 호명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서무실로 오라고. 아이들 면면을 보고 또 장소가 서무실인 걸 보면, 무엇 때문에 불려 가는 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괜한 위화감이 조성될 법도 했지만, 다행히 당시만 해도 그런 건 친구 사이에 별로 가릴 것이 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대수롭지 않았던 문제였던 것 같다. 소도시에서 크게 가진 놈도 갖지 못한 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시대도 변했거니와 워낙 빈부격차로 오는 문제가 다양하기도 하고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물질을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는가가 사람 자체를 인정하는 잣대가 돼 버린 지 오래다.
빈곤(가난할 貧, 통하지 아니할 困)은 말 그대로 가난해서 통하지 않는 ‘소통불능의 상태’로 이어지고 있으니까. 굳이 구분하자면, 일각에서 ‘가난’이 개인의 선택으로, ‘빈곤’이 등 떠밀려 가난을 강요당하는 사회구조의 문제로 읽혀지는 이유다.
빈곤은 국가의 책임
그렇다면, 가난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고 배제되어 있는 집단 혹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게 빈곤한 삶으로 내몰리게 되는 게 사회구조의 문제라면? 당연히 결론은 ‘국가가 나서 책임져야 한다’로 귀결된다. 일부 국민이 그러한 처지에 놓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공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법을 통해 이러한 국민을 위해 국가가 해야 하는 의무를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 헌법 제10조(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인권보장)에서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밝히고 있는데, 배우지 못해서, 아파서, 장애가 있어서 등등의 이유로 빈곤이 일상화된 국민들에게 최소한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복지정책 수립과 시행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의미다.
빈곤을 모르는 정책결정자들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논리적으로 풀 수 있을 만큼 간단명료하지 않다. 마치 동물의 세계인 것 처럼 국가정책은 대부분 힘의 논리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볼 수 있는 국가 최대 현안은 역시나 경제 살리기다. 무엇을 의미하는 성장인지도 모른 채, 모두가 하나같이 경제살리기 목소리 속에만 귀를 기울인다. 민간 차원의 ‘나눔’은 있어도 정부 차원의 ‘분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걸 최대한 막기 위해 시민운동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와 힘은 아직 미약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조용한 외침은 그 어디서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을 죄스러운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약간의 보조금에 그저 감사해하고 감지덕지한다. 책임이 있는 국가이며 권리가 있는 국민이라는 관계 설정을 스스로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오히려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에게 쓰여질 예산 확보에 매우 인색하고 매정하게 대응할 뿐이다.
최저생계비로 살아봐!
정부는 5년에 한번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을 책정한다. 좀더 전문 용어로 풀어보면, ‘최저생계비 계측’이라고 부른다. 이 최저생계비는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빈곤한 사람들을 파악해 지원하는 기준 금액이 된다.
이 최저생계비 계측은 지난 99년 3천 가구의 소득과 재산, 지출실태를 조사한 후, 이 결과를 바탕으로 생활필수품 항목의 가격과 사용량 등을 고려해 정했다. 하지만 현재 생활필수품의 일환으로 자리잡은 핸드폰, 컴퓨터 등은 필수품 항목에서 제외되었었다. 소비패턴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너무 경직되게 기준을 정한 것이다. 물론 물가상승률도 고려했다. 99년 90만 1천 원로 산출되었지만 물가 상승을 감안해 현재는 4인 가구 기준 105만 5천 원으로 책정되었다. 이 최저생계비는 5년에 한 번 새롭게 계측된다. 만 5년이 되는 해가 올 해 2004년이기 때문에 12월 1일 보건복지부 장관은 새롭게 최저생계비를 공표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최저생계비가 과연 ‘빈곤한 사람들의 최저생활을 유지해주고 있는가’는 지난 몇 년간 내내 문제로 지적되어왔다. 하지만 말과 행동으로도 이 주장은 사회에 먹혀들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체험하자”는 캠페인이 진행됐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거니와, 정책을 형성하고 결정하는 사람들도 빈곤의 실상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
누가 곰팡이로 둘러 쌓인 2평 남짓 단칸방에서 잠을 자고, 차비를 아끼기 위해 웬만한 거리는 걷는 것으로 대치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몇 번이나 둘러보기나 할 뿐 선뜻 살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해 보았을까. 그 입장이 되기 전에 아니 한번이라도 보거나 듣거나 느끼거나 상상해 보기 전에는 아무도 그 실상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옛 현인들은 백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했던가. 그래야 진정 알 수 있다고. 지난 7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 달간 아름다운 재단과 참여연대가 공동으로 주관한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 UP!’캠페인은 그런 취지로 시작되었다.
최저생계비? 최소생존비!
이 한달 간의 캠페인에는 일반 참가자들의 신청 외에도 국회의원, 교수, 행정 관료, 시민단체 활동가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11명이 5세대를 구성해 한 달간의 체험을 했고, 상황에 따라 일일체험이 진행되었다. 한달 동안 참여한 이들의 결과는 모두 적자. 일일 참가자들의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식사 한끼 못하는 결과가 나왔다.
회사원인 이대원 씨. 그는 애초 한 달 용돈이 30만원 가량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만하면 되겠지’라고 생각으로 참여했단다. 그는 1인 가구로 구분되어 36만 8천 원 정도를 받았다. 그런데 한달 방 값 10만 원을 내고 나니 그만 26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 아침은 우유, 점심은 김밥, 저녁은 라면으로 살았다. 교육비는 원래 없지만 아프거나 상처가 나도 의료비가 아까워 약 한번 사먹지 않았단다. 그런데 직장을 오가야 하니 교통비는 일정하게 지출되었다. 전화 등 통신비가 아까워 급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살수 밖에 없었는데도 그는 16만 7천 원을 초과하고 말았다. 그는 “국가가 주는 이 금액은 최소생활비는 될 것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고, 영양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리고 친구나 친목모임 등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말이다”고 체험 소회를 밝혔다.
빈곤이 사회와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바꿔 가는지 몸소 느낀 것이다.
빈곤은 인권의 관점에서
이 체험에 참여한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 그는 참여연대와의 인터뷰에서 30년 전에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고 체험 경험에 대한 말문을 열었다. 6-70년대 보편적이었던 주거환경과 식단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또 계속 될 수밖에 없는 집단을 눈과 몸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위원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 체험을 소중히 갖고 정책마련을 위한 관련 공무원과 예산 심의를 하는 동료 국회의원에게 어떻게 잘 전달할까”가 고민이라고 말한다.
그는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이 어떤 이론을 갖고 일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정서적 상태에서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느냐도 중요하다”며, “이 캠페인에 많은 공무원들과 함께 경험하지 못해 아쉽다”고 전했다.
하지만 2시간 정도 방문한 것으로 체험을 마친 보건복지부 김근태 장관은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 체험은 의미 있다”고 말한 후에도 “납세자들을 설득해야 한다”고만 입장을 밝혀 아쉬움을 전했다. 어려운 사람들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현실, 자식 공부 시키고 싶어도 일터에 보내야 하는 심정을 알아달라고 주민들이 부탁했지만, 그에게서 뾰족한 대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캠페인에 참여한 국가인권위원회 김창국 위원장은 월간 ‘인권’을 통해 “장애우 문제도 그렇지만 빈곤의 문제는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의 관점이란 “몇 퍼센트 인정할 것인가 숫자에 집착하는 소극적 복지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생존권을 국가가 어떻게 보장해 줄 것인가”란 것이다. 개인이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소극적이고 시혜적인 관점에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접근 태도와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결정에 빈곤을 대표하는 사람 참여해야
그러나 현실에서 획기적인 변화는 예상하기 어렵다. 보건복지부는 공적부조의 내년 예산을 약 9백억 원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이 캠페인을 결산하는 토론회에서 민주노동당의 현애자 의원은 “1백 40만 명을 수급자로 산정할 때 이 금액으로는 1만원도 올리기 힘들다”며 꼬집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체험이 의미를 가지려면 “최저생계비를 최종 결정하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에 빈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체험자들의 동네였던 서울시 하월곡동에는 질병이나 장애를 갖고 있는 가구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빈곤이 질병이나 장애와 겹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도움을 주지 않을 시에는 아무런 거동도 하지 못해 그저 누워서 병만 키울 수밖에 없다.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질병은 고정적인 ‘장애’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최저생계비 계측이 제대로 되어야 장애수당, 노인수당의 현실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정지된 삶은 희망이 없는 것
그동안 정부는 빈곤문제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쩔 수 없다. 예산이 없다. 한정된 파이다. 어려서 다 그런 경험이 있다, 극복했다, 그러니 너희들도 열심히 살아라”고 항변하고 설교해왔다. 법과 제도로 희망을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빈곤으로 소외된 이 시대의 빈민을 여전히 게으르고 무책임한, 구제 받지 못할 인간으로 보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김창국 위원장은 월간 ‘인권’에서, 그가 방문한 집에 세 개의 시계가 있었는데, 모두 정지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내내 그 시계가 지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에게 멈춘 시계가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고 느낀 그는, 이내 “희망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정지되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싶었단다. 희망이 있으면 흐를 것이오, 희망이 없으면 정지된, 즉 죽은 삶이라는 것이다.
쿠바의 혁명가 호세 마르티는 ‘게으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격이 고약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불의가 있는 곳이다’고 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바란다면, 국가는 응당 책임 있는 실천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글 홍여준민 기자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