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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표지에 할말 있어요]아름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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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세상을 꿈꾸며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월간지 ‘함께걸음’ 6월호 표지에 내 눈이 고정되었다.
한 청년이 홀라당(?) 벗은 몸으로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약간 뒤틀린 몸짓, 고개를 쳐들고 실눈이 되도록 참지 못하여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환한 모습에 마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표지 이야기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우 누드모델, 조병찬씨. “제발 한번만 벗자. 장애를 가진 몸도 드러내서 자꾸 보여줘야 해.” 몇 개월 전부터 졸라대던 기자가 귀찮았는지 어느 날 그는 “그래 해보자. 시간 잡아” 당당히 말한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촬영, 그야말로 혼자보기 아까운 작품사진들이다. “갈매기 살에 팔린 내 살”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지만 “정말 훌륭한 모델”이라고 사진 작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뇌병변 장애우의 경직된 몸 “근사하지 않아요?”」
미술전시회의 누드작품 앞에서도 오래 머물기 민망스러웠는데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누드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니. 왜 일까? 멋스럽게 보이려는 포즈도 없이 있는 그대로 ‘나다움’을 보여주는 사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울 미(美)의 한자를 살펴보면, 상서로울 양(羊) 밑에 큰 대(大)자가 받쳐진 글자다. 이 한자어의 뜻은, 고대 중국인들은 양고기를 맛있는 고기로 여겼기에 양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가장 좋은 일로 여겼고, 여기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영어의 뷰티(beauty)는‘아름다운’이라는 뜻의 고대 프랑스어 ‘bellus’에 어조사 ∼ity가 더해진 것으로, ‘bellus’는 ‘좋은’이라는 뜻을 가진 ‘bonus’와 어원이 같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말 ‘아름다움’은 ‘아름답다’가 명사화된 말이다. 아름답다는 ‘나 아(我)’를 뜻하는 고어 ‘아’에 접미사 ‘답다’가 붙어서 된 말이라고 한다. 즉 ‘나’다운 모습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자연미인, 인공미인이란 말이 나돈다. 성형수술 하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외국의 어느 미인대회에서 수 차례 성형수술을 한 것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한 참가자가 법정 소송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날지 몹시 궁금하다. 나중에는 인공미인대회, 자연미인대회로 구분될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보이는 겉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아름답게 보이려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외형적인 아름다움만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거나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만을 과시하는 것은 가치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이다.
달리기를 잘하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자기보다 더 잘 달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누가 그런다. “야! 너보다 더 잘 달리는 건 아무개 집 개다.” “그래?” 그래서 그 개하고 달리기 시합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개하고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개보다 못한 놈이네.” 한다. 또 열심히 연습을 해서 “여러분, 오십시오. 제가 이번엔 이길 수 있습니다.” 열심히 달렸는데, 골인점에 같이 도착을 했다. 똑같이 들어갔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개 같은 놈이네.”한다. 더 열심히 연습을 해서 이번엔 개보다 먼저 결승점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개보다 더 한 놈이네.” 그랬단다. 자기 자랑이 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니꼽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몸짱이 활개치는 세상이다.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기쁨으로 살아가는 맘짱을 귀하게 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겠다. 사람 눈 속에는 간상세포 1억 3천만개가 들어있고, 1백조 분의 1에 해당하는 약한 빛까지 식별하는 초감도 기능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눈은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볼 수 없는 것도 있다. 제아무리 눈이 밝아도 박테리아나 세균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종이 한 장 너머에 있는 것도 볼 수 없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외모가 눈에 띄지 않더라도 ‘자기답게 사는 사람’을 아름답게 여길 수 있어야겠다.

자기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우리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귀하게 여기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이기 때문에 그렇다. 에베소서 2장10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했다. 공동번역성경에 보게 되면 ‘그의 작품’이라 번역 되어있다. 예술작품은 그것을 만든 예술가의 혼이 베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이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를 가리켜 작품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탄생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요 신비 중에 신비가 아닐 수 없다. 3억 개의 정자에서 단 한 개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하나의 수정난 세포가 되고 여기에서 10조개에 이르는 세포가 형성되고 드디어 거기에서 한 생명이 탄생한다. 이 신비와 감격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감탄부호인 느낌표를 저 광활한 하늘 공간에 찍고 찍고 찍어서 하늘 공간을 다 채워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인간탄생의 신비이다. 우리는 창조된 이 몸 하나만 보더라도 너무나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학의 대가인 레오 버스카롤리아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시대의 문제중의 하나는 자기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데 기인한다.” 그렇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미켈란젤로는 “아름다움은 쓸데없는 것을 정화한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허세와 가식은 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리하게 카드빚을 내서라도 명품을 사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겉치레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과시를 하고 좀더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외모의 단장은 일시적으로 호감을 갖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마음과 생활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잃는다고 할지라도 한가지는 잃지 아니해야겠다. 곧 우리 자신을 잃어서는 안된다. 어느 정신장애우가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개는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갔는고?’하는 우스운 삶은 살지 말아야겠다.

글 이강수(부산장애인선교회, 백향교회 담임목사)

 

 

작성자이강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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