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연대와 자기역량 강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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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연대와 자기 역량 강화를 위해(4)
노동권 분과 토론회에서 필리핀 발제자에게 항의한
필리핀 지역 장애청년 운동가 ‘자센 엠 카스트로(Jansen M, Castro)’
(남, 소아마비 장애, 34세)
“나는 정부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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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다른 나라 정책에 관심을 갖고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일본이나 한국의 참가자들이 질문을 해야 할텐데, 어찌된 일인지 필리핀 참가자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며 질문 공세를 시작한 것.
질문은 대체로 정부 정책의 허구와 기만에 대한 강한 질타 일색이었다.
“노력하고 있다”는 관료들의 대표적 멘트를 날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마사 국장이 왜 그 자리에서 발제를 했었어야 했는지, 잠시 참가자들은 의문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항의성 질문으로 눈길을 끈 자센 엠 카스트로와 미니 인터뷰를 나누었다. 중간 쉬는 시간에 나눈 짧은 대화지만 필리핀 장애우 정책 현황 대부분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숨 가쁘고 분노에 차 있는 카스트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함께걸음: 노동관련 관료에게 강하게 주장한 내용이 무엇인가
카스트로: 1% 고용은 계획이지 난 혜택받지 못했다.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 약을 사거나 항공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할인정책이 있다고 하지만 일반시장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1960년대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의 부유국이었다. 지금은 형편없이 낙후되었다. 정부가 말로는 이러저런 정책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실천하고 있는 것은 전무하다. 자원이 없다, 돈이 없다 는 것이 핑계다. 피해는 고스란히 장애우의 몫이다. 근본원인은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인,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일상화되어 있어 예산이 어떻게 쓰여지는지 모르겠다. 각 계층을 대표하는 조직과 조합, 이익단체들이 생존권 투쟁을 하고는 있지만 힘들다. 싸워봐야 피곤하기만 하다. 패배의식이 전반에 깔려있다. 나도 학교다닐 때는 민주화투쟁에 참여도 했다.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 즉 생존권 확보를 위해 고용과 장애차별 전반에 관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난 지금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주장과 요구가 먹혀들지 않는다. 오늘 정부측에서 한 이야기는 다 허구다. 필리핀 장애우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번드르르한 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가 혜택을 받는 정책을 원한다.
함께걸음: 필리핀 장애우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무엇인가
카스트로: 장애우나 비장애우나 빈곤이다. 일정한 직업을 갖기가 너무 어렵다. 경제가 침체되고 정치가 불안하니까, 모든 것이 다 흔들린다. 국민들의 삶은 없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급급하다. 거리로 나와 구걸해야 살 수 있다. 부정부패를 퇴치하고 빈곤한 삶을 탈출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이다.
함께걸음: 필리핀 고용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카스트로: 법률상 5% 의무조항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지키는 곳은 아무 곳도 없다. 의무조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우를 고용했을 때 사업주에게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법을 위반했을 때 가해지는 패널티는 전혀 없다. 정부는 법만 만들어놓고 사업주만 알아서 하라 하고 뒷짐 지고 있다. 현재 많은 필리핀 국민이 직업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특별히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사회적 눈길이 미치지 않는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다들 어려우니까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다. 정부 관심은 딴 데 가 있고. 이력서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전신사진을 부착토록 하고 있어 만약 클러치나 휠체어 이용자, , 절단장애우 등은 원서를 내면서부터 배제된다. 기회조차 차단되는 차별이 벌어진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에 대해 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함께걸음: 이력서 전신사진 부착은 국가인권위 같은 곳에 제소하면 되지 않는가?
카스트로: 아, 그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제안 감사하다.
함께걸음: 오늘의 이 3국 교류대회를 일반 참가자로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카스트로: 난 지역의 장애단체 대표다. 이곳에 온 100여 명의 장애우들이 거의 대부분 지역 대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일본과 한국의 장애운동에서, 정책에서 많은 간접 경험을 하고 있다. 함께 토론하면서 배우고 있다.
함께걸음: 이번 대선에서 장애우들의 투표성향은 어떤가? 투표접근권은 보장되어 있는가?
카스트로: 필리핀은 75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다. 전체 국민 수도 제대로 파악이 안되어 있다. 장애우도 마찬가지다. 장애우 현황이란 것이 정리된 게 없다. 그래도 이번 대선에서 장애우의 투표참여는 활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아직 우리는 영역별 단체도 없고, 전국적 조직도 없다. 모인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함께걸음: 장애우를 보는 필리핀 사회의 시각은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카스트로: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노동권이 확보되지 않아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하류계층으로 본다. 좋게 보지 않는다. 다가가면 ‘또 뭘 달라는구나’이상한 시선으로 보면서 피한다.
함께걸음: 청년 장애우로 필리핀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카스트로: 정애우로서가 아니라 평범한 필리핀 국민으로서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 필리핀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럽다. 부정부패 때문에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소수자, 사회적 약자의 차별과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지만 정치적 혼란 때문에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수가 없다. 부정부패 척결과 정치적 안정, 믿을 수 있는 정치가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글·사진 홍여준민기자 / 통역 정호용(대한보장구협회 사무국장)
아시아 연대와 자기 역량 강화를 위해(5)
특집좌담 : 일본장애운동가들이 말하는 ‘일본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
“경제적 풍요? 우린 여전히 배가 고프다”
일본 장애운동은 30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 사회변혁운동이 활발했던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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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2-30여 년을 한결같이 장애운동에 몸담고 있었던 운동가들의 평가는 어떨까? 현재 그들의 고민은 무엇인가? 일본 장애운동가들이 말하는 ‘일본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좌담회에 참석한 일본 장애운동가
가도와키 겐지(일본공동연 대표, 뇌병변 장애우 47세) : 양호학교를 거쳐쟁정시설에 입소, 장애당사자주의에 의한 해방운동을 접하고 운동에 참여,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작업소(공동작업소) 근무
사이또겐죠(일본공동연 사무국장, 비장애우, 50대후반) : 71년 나고야시에서 무방부제 빵 생산하는 왓빠공동체운동 시작. 대학시절부터 리어카에 빵과 정신지체장애우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빵을 판매했음. 시설에서 약 2년간 생활하면서 정신지체, 뇌성마비 장애우들을 조직해 나와 공동체 생활 시작. 탈시설 주장. 84년 공동연 결성참가. 97년 장애우정책 연구소 노동프로젝트 담당. 2001년 장애우노동연구회 시작. 나고야 작업개척학교 개교
하나다 마사노리(장애우노동연구회원, 장애우) : 구마모토 사회복지학과 교수. 프랑스 사회정책학 공부. 사이또 겐조의 대학 동기. 구마모토 장애우 노동센터 이사
노구찌 로시히로(일본공동연 대표, 근육디스트로피 장애우, 50대 초반) : 동경 자립생활겐터 소장, 일본의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한국 IL운동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연수를 가기도 함. 활동보조인이 꼭 있어야 생활이 가능함. 일본 정부에서 한 해 노구찌 씨에게 지원하는 금액은 총 6억원 정도라고 함.
나가자키 히또미 (여, 발달장애 아들을 둔 부모, 비장애우) : 시가현에서 비장애우, 장애우가 함꼐 하는 빵 생산공동체를 운영하고 있음. 6년 전만해도 10여명 정도 였던 규모에서 현재 60여명의 상근 노동자가 일하고 있음.
경제적 풍요? 우린 여전히 배가 고프다
김정열: 1995년 6월로 기억되는데, 온이시씨가 “한국과 교류하는 이유는 일본 장애우 노동운동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성공할 수 있는지, 지금으로써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적 있다. 이 고민은 끝난 것인가,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사이토: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김정열: 요약하자면, 경쟁과 효율만 강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우의 노동권이 확보될 수 있는지 의심된다고 하는 고백이었던 것 같다. 왓빠(장애우 생산공동체: 빵을 생산하는 사업장 이름)는 그게 해결되었다고 보는가
사이토: 그렇지 않다
김정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이토: 그 권리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지만 할 수 있도록 하겠다. 그 뿐이다.
이태곤: 일본의 장애운동이 경제적 문제에 너무 집중하고 있는 것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그게 일본 장애운동의 전부인가, 다른 무엇은 없는가, 그렇게 보인다.
노구찌: 일본 장애운동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운동이라고 보는 것인가?
이태곤: 연금, 복지취로, 개호보험, 서비스 확대, 소득보장 등 집중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그렇다. 그런 것이 더 강조되는 것 아닌가.
홍여준민: 오늘 이 자리는 근 2-30년 간 일본의 장애운동을 실천했던 활동가들이 현재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 화두는 무엇인지, 2-30년 간 활동을 통해 무엇이 변했고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가고 있는지를 자유롭게 토론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어려운 주제일 수 있지만 큰 부담없이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갔으면 한다.
가도와키: 우선 활동가의 고령화가 가장 큰 문제다. 열정을 갖고 활동해야 하는데,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렸다.
홍여준민: 일본의 장애우들이 현실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젊은 세대들이 운동의 주체로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가도와키: 후배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한 것도 반성의 지점이지만, 우리가 운동할 때는(1970년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가자키: 왜 후배가 없는가, 당신이 나를 길러내지 않았는가.
(모두 웃음)
노구찌: 우리가 젊었을 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면서 ‘차별과싸우는전국공동체연합(이하 공동련)’도 조직화되고, IL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최근 후배들은 그 과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그걸 찾아가도록 노력할 것이다.
과거에는 무(無)가 무기였다
김정열: 가도와키씨가 ‘활동가의 고령화’문제를 지적한 것은 다른 문제인식인 것 같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달라.
노구찌: 틀린 것 같지만, 연결되는 이야기다. 우리는 무(無)가 무기였다. 정부와 투쟁하면서 없는 걸 만들어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취업도 수월하고, IL센터에도 올 수 있다. 굳이 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본인이 원하는 게 있으면 쉽게 얻을 수 있다.
이태곤: 일본 장애운동을 비판적 관점에서 보는 한 가지를 이야기하겠다. 우리가 ‘고립’을 이야기할 때는 ‘사회적 고립’이다. 장애문제가 경제적 풍요 혹은 보상이 되었다할지라도 사회적 고립이라는 여전한 위치에 처해져 있는 것 아닌가? 일본 사회는 ‘장애문제는 장애우들만의 문제’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크지 않은가?
노구찌: 난 IL운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IL운동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겠다. 과거에 장애우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도와줄 사람을 구하고, 스스로가 관계를 형성할 줄 알아야했다. 하지만 이제는 IL센터에서 활동보조인을 구해주니까 스스로 관계를 잘 형성하거나 사람을 구하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 때문에 ‘고립’이라 이야기하는지 모르지만 이 또한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자체로도 의의가 크지 않을까.
이태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문제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현재 일본에서 그런가? 사회 속에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국가가 너희에게 해 줄만큼 해줬으니까, 이제 그만 요구해라’이런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지 않은가?
가도와키: 이 주제의 연속일지 모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다. 과거에는 장애우가 거리에 나오면 손가락질하고 곁눈질하면서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장애우들만 모아놓고 일하는 작업소가 대부분이었는데, 단순 보호 개념이 지나지 않는 취로 중심이었다. 완전한 분리정책이었다. 장애우들끼리만 모여 작업소에서 일하는 모습도 일 하는 것처럼 비춰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노동권을 확보한 모습이 아니다. 절대 착각이다. 또 하나의 차별을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초등학생들은 장애우를 보러 그곳에 견학을 왔다. ‘장애우들은 이런 곳에서 따로 일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서로가 틀리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결국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지역에서 살고 함께 일하기 때문에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파병반대 운동으로 새롭게 결집하는 일본의 사회운동세력
나가자키: 과거에는 주로 튀는 운동을 많이 했다. 차별받는 장애우가 이렇게 많다. 이게 바로 장애차별이다, 라는 것을 몸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도 장애차별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사회는 비장애우와 장애우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특별한 존재로 간주하고 취급했다. 장애운동은 ‘동등한 인간’이란 점을 알리는 운동이다.
홍여준민: 튀는 운동의 사례를 좀 더 알려달라
나가자키: 직접 활동했던 노구찌 선배님이 해달라
노구찌: 뇌성마비가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하하
나가자키: 예를 들어, 7-80년대 가도와키상은 휠체어를 타고 버스 타기를 시도했고, 불편한 몸으로 지하철, 버스를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올라타려고 애썼다. 끝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라탔다. 거의 기어가면서. 휠체어 탄 장애우가 버스나 전철을 탄다는 것은 가히 상상하기 힘들었던 때다.
이태곤: 외람되지만 일본 장애우들은 차별 대신 경제적 보상을 받았다고 봐도 좋은 건가? 경제적 보장은 받았지만 여전히 차별은 존재하고, 장애우들은 운동의 주체로 나서지 않고 있지 않은가?
노구찌: 경제적으로 풍족하냐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장애우에 비하면 아직도 저소득이다. 근래 일본 사회에도 이라크 파병 때문에 사회 운동세력이 다시 결집하고 있다. 국민들이 다시금 사회진보와 공공성을 고민하고 있다.
이태곤: 그게 무슨 관계냐?
노구찌: 장애차별, 분리교육의 부당성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도 사람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만약 과거에 지금의 파병 문제 같은 것이 불거지면 총리대신을 바꿀 정도로 힘차게 운동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파병반대가 주요 이슈라고 해도 그만한 힘이 없다.
일본 사회의 운동이 전반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5,60대 선배들이 그렇게 가열차게 운동했어도 사회가 변하지 않았다고 패배감이 많은 것 같다. 운동해도 소용없다는 그런….
홍여준민: 후배인 나가자키씨도 이 말에 동의하는가?
나가자키: 공감한다. 과거 강하게 운동했던 사람들은 ‘사회는 변할 것이다’고 믿었다. ‘내일은 변할 것이다’는 믿음이 확실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이또 선배다.
차별이 있는 곳에 연대가 있다
이태곤: 여하튼 고여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변화를 추구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그렇다면, 사회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가, 장애계층이 먼저 변화해야 하는가?
노구찌: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르지 않을까?
이태곤: 공동연은 사회적 과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발언하고 참여하고 있는가? 개인이 아닌 조직적으로 말이다.
노구찌: 공동연은 모든 차별과 싸운다. 장애문제만 매몰될 수 없다. 여성장애우의 문제는 장애문제로 출발해도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 받기도 한다. 첫출발은 ‘장애’가 화두였다고 해도, 장애우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차별과 싸우게 된다.
이태곤: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참여한다는 이야기인가?
노구찌: 공동연 전체 이름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왓빠 등 지역에 따라 개별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이태곤: 사회 어떤 세력들과 주로 연대하는가, 우군이 있는가?
노구찌: 운동을 할 수 있는 힘은 나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과거 장애운동 세력의 힘이 약할 때는 노동운동을 하는 세력들이 함께 공부하고 싸워줬다.
가도와키: 공동연은 각 지역에 있다. 보통 한 가지만을 갖고 싸우지 않고 환경, 전쟁반대, 미군기지 반대 운동, 장애차별 반대 등을 한다. 이것들이 모인 세력이 바로 공동연이다. 참 어떤 운동과 연결되어 있나를 생각해 보니까 절대로 한계에 부딪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고령화 이야기를 했는데, 젊은 친구들은 다른 단체와 연대하면서 방법은 다르지만 나름의 운동을 펼치고 있다.
홍여준민: 그 속에서 치열함이나 열정을 느끼는가?
가도와키: 우리가 과격하게 운동했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그 때 방식이 열심히 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방법상의 차이일 뿐, 어디서나 치열함은 녹아나 있다.
사회는 변한다. 우리 요구도 끊임없이 변한다
이태곤: 일본의 장애운동이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잘먹고 잘살기 위한 운동이라고 보는가, 사회변화를 위한 운동이라고 보는가?
노구찌: 출발은 내 문제였다고 해도, 분명 나만 변화하고 잘 살기 위한 운동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최근도 마찬가지다. 눈에, 몸에 보이는 강함이 아니더라도 운동은 계속 지속된다.
이태곤: 일본에서 장애우는 끝없이 요구하는 존재로 인식되어지지 않는가?
노구찌: 물론 정부측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다.
이태곤: 끝없이 요구하는 존재로 인식되어지면 한계가 분명하지 않은가
노구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변하니까 우리의 요구도 끊임없이 변한다.
홍여준민: 지금까지 하나다 교수는 듣기만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가?
하나다: 2가지 정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선 장애운동만을 하다보면 사회의 모순이 보인다. 또 사회전반적 운동을 하다보면, 각 영역별 과제와 모순이 보인다. 난 구마모토에 사는데 얼마 전 장애운동단체에서 이라크 파병반대 집회를 아주 크게 했다. 그런데 환경단체, 노동운동단체 등이 모두 나왔더라. 장애운동 세력이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는 아주 큰 사회적 문제다. 이라크 파병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장애우다. 정신지체장애우는 총알받이가 될 가능성이 있고, 시, 청각 장애우, 지체장애우들은 아수라장 속에서 피하기가 어렵다. 주저앉아 그대도 죽을 수밖에 없다. 파병반대는 비장애우 입장에서도 큰 운동이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한 영역만을 줄기차게 운동하는 것도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연 또한 그런 입장을 갖고 운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낮게, 평등하게, 천천히…. 중요한 건 ‘실천’이다
김정열: 그렇다면 공동연의 사회적 역할, 미션은 무엇인가?
하나다: 정신지체장애우가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사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난 사이또를 30년 전에 만났다.(하나다 교수와 사이또씨는 대학 동기다) 10여 년 동안 서로 어울리며 활동했는데, 그 후 18년 동안 내가 프랑스로 유학을 가면서 가끔 전화통화만 했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사이또는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정신지체장애우들과 함께 일하며 생활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고, 또 처음 시작 당시는 어려운 일이 굉장히 많았는데, 지금은 동료나 지지자, 일하는 정신지체장애우 등 규모도 커지고 월급도 높은 수준으로 가고 있다. 절대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이라 보이던 힘들고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이렇게 변해버렸다. 실천으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게 공동연의 목표며, 역할이라 생각한다.
김정열: 이러한 공동연의 실천운동이 구체적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다: 첫째, 장애우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작지만 끄집어내서 시작하면,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함께 살고 일하는 장소를 만든다는 건 말이 쉽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실천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공동연의 이런 사업장 운동은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말하는 일반적 ‘노동’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미진할지 모르지만, 함께 공동체 형성이 가능하다는 생각과 실천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는 실천적 모델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다.
가도와키: 만일 사람들에게 “장애우가 차별받는 게 좋을까요? 안받는 게 좋을까요?”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안받는 게 좋다고 말한다. 또 “장애우가 직업을 갖는 게 좋을까요? 직업이 없는 게 좋을까요?”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직업을 갖는 게 좋다”고 대답할 것이다. 말은 참 쉽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은 하지만, 결국 실천으로 옮기는 부분에서는 포기하고 만다. 왜? 그건 무척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연은 말과 실천을 일치시키려고 애써왔고, 지금 노동과 삶이 일치되고 비장애우와 장애우가 평등한 관계 속에서 일하고 있다. 우린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공동연은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는데, 아직 경제적 풍요를 이루었다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할 수 있다. 물론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에서는 임금도 많이 주고 장애우와 같이 일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같은 장소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장애, 비장애우 분리된 채 노동하는 건, 함께 일한다고 볼 수 없다. 아무리 임금을 많이 줘도 그건 함께 사는 법이 아니다. 어찌보면, 우리 공동연은 공동체적 삶을 쉽게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운동의 길, 행복을 찾는 여정
김정열: 벌써 2시간 30분이 지나고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운동을 하면서 행복한가?
가도와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 난 행복하다. 하지만 책임, 부담 역시 크다.
노구찌: 나는 행복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내 존재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도와키: 김정열 소장은 어떤가?
김정열: 나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찾아다닐 뿐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 같다. 노구찌씨, 가도와키씨, 사이또씨, 하나다씨 등 일본 선배 활동가들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나에게 행복이다.
노구찌: 오늘 이 자리를 통해 난 처음으로 공동연의 사회적 역할을 알게된 것 같다. 하하
하나다: 처음에 장애운동에 결합할 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하다보니까 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이란 확신이 드니까 하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장애운동의 당사자는 누구?
김정열: 그렇다면 정말 마지막인데, 사이또씨와 하나다 교수는 비장애우다. 근 2-30년 간 장애운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노구찌씨는 비장애우도 장애운동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도와키: 하나다 교수, 당신 장애 없나?
김정열: 비장애우도 운동의 주체인가, 단지 도와주는 사람인가?
사이또: 난 지원이란 말 자체, 또 생각하는 것 자체도 싫다. 항상 난 주체다. 난 내 인생의 주체다. 장애운동은 내 인생일 뿐이다.
하나다: 내 안에서의 기본 원칙은 장애우가 운동을 함에 있어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주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반대한다. 장애우는 차별 받는 주체지만, 비장애우는 차별을 가하는 주체일 수 있다. 상호관계 속에서 모두 주체라고 본다.
노구찌: 내 입장에서 활동보조 서비스 안에서 생각해보면, 활동보조를 받는 나나, 보조를 하는 비장애우나 모두 주체다. 그러긴 하지만 또 장애운동이기 때문에 당사자를 빼고는 할 수 없다. 우리가 없다면 하나다 교수 같은 경우도 장애운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다 교수와 같은 생각이다.
가도와키: 나는 항상 내가 주체라고 생각하고 여러 운동을 해왔다. 차별을 받았을 때 나만 아픈게 아니라 다른 많은 장애우들도 똑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게 운동을 하는데 힘이 되어준 것 같다. 차별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만드는 사회구조의 문제라 생각하고 운동을 해왔다.
나가자키: 장애우와 비장애우 모두 주체다. 장애운동은 함께 하는 운동이다.
정리 홍여준민 기자 / 사진 이태곤 편집국장 /
통역 정희경(정립회관 자립생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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