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연대와 자기역량 강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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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연대와 자기역량 강화를 위해” (1)
「한·일·필리핀 장애우 국제교류대회」 300여 명 참석자들의 한결같은 외침
“아시아 장애우들이여,
차별 반대 목소리를 높이자”
10여 년 한일 양국 풀뿌리 교류의 성과 지난 5월 18일에서 22일,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한·일·필리핀 장애우 300여명이 모인 가운데, 「2004 한·일·필리핀 장애우 국제교류대회」가 개최되었다.
지난 10여 년간 한일 양국은 한국측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와 일본측 장애우차별과싸우는전국공동체연합(이하 공동연)의 풀뿌리 교류를 통해 어느 정도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우는 동지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주체의 고민은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이 대회를 주관한 한국 측 준비자인 연구소 신용호 사무국장이 기조강연에서도 밝혔듯 “소수 대표성을 가진 몇 사람만의 교류가 아니라 장애 당사자들의 일상적 교류기회 확대와 아시아 전역의 장애우 인권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97년 일본 공동연 사이또 사무국장의 제안으로, 서서히 아시아 장애우 운동세력과의 연대를 준비해 온 한일 양국 장애우 연대의 성과물인 것이다.
아시아 장애우의 연대를 통한 장애우 자기역량 강화
이번 대회의 주제다. 신용호 사무국장은 첫 날 기조강연을 통해 ‘장애우의 연대’와 ‘자기역량 강화’가 키워드라고 설명했다. 그는 “연대는 장애우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이란 공동의 목적으로 위해 힘을 합치는 것인데, 이는 단지 큰 힘으로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연대가 갖고 있는 속성, 즉 강자보다는 약자와,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으로의 연대를 실천할 때라야만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며 “앞서 활동한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의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또 자기역량 강화와 관련해서는 장애우 당사자가 정치·경제·사회적인 능력을 증가함으로써 그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라며, 인권회복과 주체적 인간으로 삶을 영위하자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장애우 복지 패러다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여전히 시설수용, 특수학교 중심의 분리정책으로 벗어나는 것은 시대적 흐름에도 부응하는 것이며, 우리 장애우 운동의 명분과 당위성을 대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보호와 의료, 전문가, 시설 중심에서 벗어나 당사자의 참여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을 이야기하며, 녹록치 않은, ‘생존권조차 위협받는 현실’을 꼬집으며, 그럴수록 힘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좀 더 구체적 연대를 위해서는 서로의 상황을 깊게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소규모 형태의 활동가 연수와 사업 중심의 연대, 아시아 각국 장애우 실태와 복지제도를 위한 공통의 매뉴얼 개발, 각 국 인권침해에 대한 즉각적인 공동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참가자들은 깊은 공감을 나타냈는데, 특히 필리핀 참가자들은 “목표는 같으나 문화가 달라도 과정과 법, 제도 등에 대해 배울 것이 많기 때문에 이번 교류는 그런 기회로 작동할 것이다”고 말하며,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필리핀 발제자들에게 항의하는 필리핀 참가자들
둘째 날은 노동권, 교육권, 이동권, 아시아 연대를 주제로 한 분과별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한일 양국의 경우, 그동안의 교류로 서로의 상황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필리핀의 상황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 모두 관심있게 지켜보는 듯 했다. 그러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부문의 큰 차이 때문인지, 서로에게 접근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듯 했다. 더욱이 필리핀 발제자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기관에서 역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일 참가자들은 필리핀 정부가 제공하는 현황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힘들지만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성과가 있을 것이다.”는 판에 박힌 관료들의 느글느글한 이야기로는 좀처럼 필리핀 장애우들의 구체적 삶과 운동을 한 눈에 짐작하기 어려웠다.
필리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도 참석해 교류대회를 축하하며 강연을 했지만, 그녀 역시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다. 점차 나아질 것이다.”란 말만 되풀이 할 뿐, 뾰족한 대안으로 희망을 전달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한일 양국의 경우, 그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한 사람들이 발제를 해서인지, 궁금한 것에 대한 질문만 오갔지만, 필리핀 발제자에 대해서는 맹렬한 항의성 질문과 질타성 발언들이 끊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법과 제도가 잘되어 있고, 무엇 무엇을 하고 있다는 데, 나에게는 왜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냐!”는 것이 골자였다. 정부에 항의하고 요구하는 발언을 할 기회를 필리핀 참가자들은 이곳 3국 교류대회에서 찾은 것이다. 쉬는 시간, 삼삼오오 모여 뭔가를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필리핀 참가자들 속에서 움틀대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통역자 수의 한계와 경제적 문제(워낙 호텔비가 비싸서 필리핀 참가자들은 지역에서 올라와도 한일 참가자들과 같은 숙소에 머무르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과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언어가 다른 3국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연대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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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도 서로의 상황과 운동방식, 과제를 알 수 있는 의미있는 만남이었다. 앞으로 풀뿌리 교류를 더욱 활성화시켜 아시아 전역의 연대로 확산하자” 이번 교류대회에 참석해 3국 대표들이 말한 한결같은 소회다.
이번 대회 추진배경과 의의에 대해 연구소 김정열 소장은 “양국의 역량이 충분치 못해 제안 이후 바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늘 아시아 운동세력의 결집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으며, 한일이 아닌 제3국에서 대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시작하자고 의견을 모은 것”이라고 간략히 설명했다. 그는 또 “세계 각국이 처해진 입장에 따라 블록을 형성하며 연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만이 유독 힘을 모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번 국제교류대회가 그 첫발점이 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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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BBMC 리챠드 씨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3개 언어로 소통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오해나 일정에 있어 차질이 생기기도 하고, 부족한 점도 많았다. 그러나 이 기회로 전국의 장애우 단체 지도자들과 청년들이 모여 소통할 수 있게 된 것도 의미있고, 한일 양국의 운동 경험을 공유하면서 배운 점도 많다. 따라서 힘겨워도 연대는 계속 되어야 하고, 좀 더 구체적인 결합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교류대회를 평가했다.
2004 한·일·필리핀 장애우 국제교류대회는 그간 한일 양국이 10여년에 걸친 교류와 연대의 성과물이었다. 다른 한 곳의 국가와 연대하는데, 10여 년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하자 말레이시아, 중국도 거론되고 있다. 또 나아가 북한과의 교류도 이야기가 나온다.
시작은 어려웠지만 그간의 신뢰와 경험은 ‘아시아 전역의 장애우 연대’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 것 같다.
3국은 앞으로도 계속 다른 아시아 국가와의 느슨한, 혹은 공고한 연대를 꾀할 것을 약속하며 아쉬운 4박 5일의 일정을 마감했다.
글·사진 이태곤·홍여준민 기자
“아시아 연대와 자기역량 강화를 위해” (2)
밥·일·꿈의 공동체
BBMC (Bigay Buhay Multipurpose Cooperative)
이번 「한·일·필리핀 장애우 국제교류대회」를 주최한 필리핀의 BBMC(Bigay Buhay Multipurpose Cooperative).
2002년 8월호 <함께걸음>에서 잠시 소개한 적 있는 이 단체는 말 그대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필리핀 최초의 생활협동조합’이다.
대표인 리챠드 아르센요 씨가 대학을 다니던 1991년, 그는 대학 내에서 접근권과 이동권 등 장애우가 직면한 과제를 해결하고, 심각한 교육권 침해 상황을 개선하고자 몇 몇 의식있는 장애우들과 만나 작은 소모임을 시작하였다. 당시, 장애를 가진 대학생들은 미네코 하라 라는 전직 일본 교사 출신의 빈민 활동가를 만나게 되었는데, 하라 씨는 그들의 의미있는 활동이 보다 조직화되고 실질적인 성과를 갖기 위해,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활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지금의 BBMC로 성장한 것이다. 가난한 소외계층, 주변화 된 사람들이 자본을 투자해 자원을 나누고 매달 저축하는 살림공동체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BBMC의 활동은 크게 IL센터(독립생활센터)와 의자, 침대, 책상 등 가구를 만드는 생산작업장, 가방 생산 작업장 운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처음 35명의 조합원으로 시작해 10여 년이 지난 지금 조합원의 수는 약 50여명이라고 하니 양적인 발전을 꾀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작지만 옹골찬 그들의 활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그 이유를 그들의 생활 현장 속으로 들어가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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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참가자들이 첫 번째 방문한 곳은 BBMC 작업장. 마닐라 외곽에 위치한 작업장은 조용한 시골마을 같은 분위기의 주택가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30여명의 대규모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가기에는 비좁은 듯 보인 작업장 안은 장애우 노동자들의 바쁜 손놀림과 기계음으로 시끌벅적 했다. 휠체어에 앉아서 용접을 하는 사람, 클러치를 짚고 여기서 저기까지 의자를 운반해주는 사람, 그리고 다시 그걸 칠하는 절단 장애우, 나사를 박는 시각장애우, 다시 차곡차곡 정리하는 한 손이 불편한 사람. 모두 장애우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현재 BBMC 작업장 활동은 장애우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워낙 경기불황과 사회보장정책의 미비로 1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국민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자립적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모습은 신선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곳 장애우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주일에 2,500페소(약 20달러), 경력이 오래된 사람의 경우, 더 많은 임금을 받기도 한다. 의자 등은 하루에 100여개 정도 생산하고 있었는데 모두 직접 손으로 제작하는 수공업 방식을 쓰고 있었다. 경쟁업체도 만만치 않게 많아 판로확보 등에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그나마 작업장의 의의를 중점에 두고 홍보해 공공성을 인정받고 있다. 교육부나 학교 등에서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두 번째로 방문한 IL센터. 애초 생활협동조합의 목적에 부합해 철저히 지역사회와 통합된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다. 작은 도서관과 공부방은 가난으로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 일하런 간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장애가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지역 장애우들이 마닐라에 오게 되면 숙박을 하기도 하고, 장애운동에 관심있는 사람들, 자기역량 강화에 애쓰는 사람들이 모여 세미나나 토론회 등을 개최하기도 한다. 그러한 결과로 정부나 지자체에 특수학교 설립, 직업센터 설립 등을 조직적으로 요구할 수도 있게 되었고, 또 미약하지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다.
또한 직업능력 개발을 위해 가방을 생산하는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오전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재봉틀과 재료들이 잔뜩 쌓여있는 모습이었다. 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니 자그마한 기술이라도 익히는 것은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이곳 역시 조용한 마을 한 어귀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에서는 가장 깨끗하고 활기찬 곳으로 보여졌다. 장애우들의 거점이 지역사회에 활기를 주는 거점으로써의 역할도 하고 있는 듯 했다. 역(逆)사회통합이라 해야 할까? 장애우들의 모범적 활동이 오히려 비장애우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세 번째 방문한 곳은 트리니티 대학. 가톨릭재단의 이 단과대학은 장애학생들에 교육권을 확보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학교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러나 이 명성은 학교 측의 배려 혹은 자발적 깨침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리챠드 씨가 대학에 다니던 1991년, 접근권 이동권 등 장애우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모임을 조직하면서부터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싸워서 얻은 결과물이란 것이다. 현재 30여명의 장애학생들이 있다. 시각장애학생에겐 구술시험을 보게 하고 접근이 가능한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었으며, 교수들에겐 어떻게 장애학생들의 교육을 도울 수 있는지 교수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BBMC 활동가들은 졸업 후에도 여전히 이 소모임에 관여하면서 비중있게 활동하고 있다. 아직까지 필리핀 사회에서는 소수라도 배우고 자각한 장애우가 절실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았다.
풀리지 않은 과제 ‘빈곤’
BBMC는 필리핀 장애우들에게 ‘희망의 본보기’가 되길 원하고 있었다. 교육받을 권리를 거부당하고, 그로 인해 취업기회를 박탈당해 빈민층으로 전락하는 삶을 고스란히 받아 안기만 하는 장애우들에게 힘과 용기,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조직이길 바란다는 것이다. 어쩌면 조직의 형태가 협동조합이기 때문에 조합원들만의 이익을 위한 활동을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비조합원들과도 함께 일하고 있었으며,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수는 150여명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하기 위해 도서관, 공부방도 운영하고 있었으며, IL센터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독립할 수 있는지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싸워나가는 활동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었다. ‘장애우 스스로, 지역사회 속에서’를 생활로 실천하고 있는 BBMC였다.
그러나 내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그 무엇도 있다.
‘빈곤’
필리핀 사회에서 ‘빈곤’은 장애우나 비장애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 대다수가 버거운 삶을 살다보니 장애우의 욕구와 권리는 스스로 주장하려고도, 주장될 수도, 주장을 듣고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발전이란 이름이 개발이란 개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니, 필리핀이 어떤 변화를 가져야 좋은 것인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있다. 그나마 필리핀 장애우 활동가들이 이제 시작이지만 BBMC처럼 나름의 방식과 대안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BBMC의 활동이 필리핀 색깔을 지니는 운동으로 지속된다면…. 불과 며칠 동안 제3자의 눈으로 본 나름의 결론이다.
글·사진 홍여준민 기자 / 통역 김치훈(영3 어린이집 특수교사)
**한·일·필리핀 공동선언문**
우리는 2004년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시아 연대를 향한 장애우의 역량강화’라는 주제로 한국, 일본, 필리핀 3국 장애우 및 관계자 300여명이 참여해서 국제교류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번 대회는 1995년에 시작한 한국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일본 공동연의 교류의 성과이며, 이러한 성과를 아시아의 장애우와 교류하려는 생각으로, 우선 필리핀 BBMC와 함께 함으로써 이번 대회를 개최하였다.
우리는 이번 대회에서 한국, 일본, 필리핀 3국의 장애우 현실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풍부한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했다. 그 결과 3국의 장애우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 이번 대회는 처음으로 기존 한·일 교류를 넘어 아시아 장애우 풀뿌리 교류이다. 이 대회는 아시아 지여그이 새로운 연대의 시작이며 3국 장애우가 권리찾기를 위한 큰 힘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
- 3국 장애우의 노동현실을 보면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장애우 고용에 많은 기여를 한 장애우 고용장려금이 대폭 삭감되었다. 또 일본에서는 노동권이 없는 보호작업장이 장애우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장애우가 일할 장소가 거의 없으며 공적기관은 의무고용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 우리는 3국의 정부에 이런 장애우 노동 현실을 개선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 일본에서는 변함없이 특수교육이 정부에 의해 분리교육을 원칙으로 추진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여전히 분리교육 중심의 장애우 교육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통합교육이 시작되었지만 아주 작은 움직임에 불과하다. 우리는 3국의 정부에 통합교육 향상을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 공공시설의 접근성과 교통이동의 장애우 접근권에 대해 필리핀에서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활발한 이동권 운동에 비해 정부 정책은 크게 미흡하고 특히 버스 등 대중교통이나 특별수송체계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의 접근권은 장애우의 권리이므로 제도화가 요구되고 있다. 우리들은 3국의 정부에 장애가 없는 시민과 동등한 접근권을 장애가 있는 시민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강력히 주장한다.
- 우리는 필리핀에 살고 있는 장애우의 생존권과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필리핀 정부의 노력을 촉구하며 정부 예산의 1%, ODA의 10% 예산을 반영하도록 촉구한다. 또한 장애우 차별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필리핀 정부에 TV, 라디오 등 공영방송에 장애우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광고 방송 활동 및 인식개선 사업을 요구한다.
- 우리는 전쟁이 장애우의 생활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새로운 장애우가 발생하는 환경을 조성하기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전쟁을 반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3국의 정부 및 이라크의 군대파견을 하고 있는 나라의 정부들에게 평화실현을 위한 이라크 파병철회를 강력히 요구한다.
- 우리는 이 대회의 성과를 기반으로 아시아 장애운동의 연대를 더욱 깊게 하기 위해서 계속 전진할 것이다. 앞으로도 각국의 나라가 처한 장애우의 과제를 발견하고 논의하며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할 것이다. 유럽이나 아프리카와는 다른 아시아만의 독특한 공동의 이상을 공유하며,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2004년 5월 21일 한·일·필 장애우국제교류대회 참가자 일동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장애우차별과 싸우는전국공동체연합 / 다목적협동조합(BBMC)
“아시아 연대와 자기역량 강화를 위해” (3)
필리핀 장애운동가들, 장애우정당 건설하다
“정치적 상황 이용해, 우리 존재를 알려야 했다”
아마 세계 최초일 것이다.
그 주인공인 필리핀 BBMC 대표 리쳐드 아르센요 씨 또한 그렇게 말했다.
‘장애우 정당’ 건설.
정치적 이념에 따라 노동당과 녹색당, 사회민주당, 사회당 등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어떤 특정 계층만을 위한 정당이란 우리에게 익숙치 않다.
어떤 이유에서 일까? 장애우만을 위한 정당은 왜 필요한가? 무엇을 위해서인가?
정당의 대표 리쳐드 아르센요 씨를 만나 장애우 정당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함께걸음: 장애우 정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리쳐드: 그렇다. 지난 2003년 12월에 창당하고 이번 5월 10일 선거에 당 부위원장으로 국회의원에 공식 출마 했다.
함께걸음: 아직 개표가 진행 중이지만 선전하고 있는가?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고 있나?
리쳐드: 중간 결과를 보면 66개 정당 중 34위를 차지하고 있다. 첫 출발 치고는 좋은 성적이지만 10위안에 들어야 당선권이기 때문에 국회진출은 어렵다고 본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입후보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크다.
함께걸음: 정당 구성에 대해 설명해 달라
리쳐드: 전국에 걸친 약 1,000여 개의 장애우 단체가 참여했다. 전체 당원 수는 5,000여 명 정도 된다. 모두 장애우고 단체의 지도자급이다.
함께걸음: 당을 만든 목적은?
리쳐드: 장애관련 법률이 있지만 전혀 실천되고 있지 못하다. 실천을 촉구하는데, 스스로가 나서서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이 크다. 선거 이후에는 다른 당과 연합해서 더 큰 역량을 발휘할 계획을 갖고 있다.
함께걸음: 정당을 만들었다는 것이 얼핏 위로부터의 운동이란 생각이 든다. 아래로부터의 요구들을 모으고 장애우 당사자들을 결집하는 또 다른 조직화 노력이 더 우선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리쳐드: 결과적으로는 그게 꿈이다. 조직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흩어져 있는 장애우 당사자들을 결집해 내는 것은 어렵다. 필리핀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데, 워낙 기본 인프라도 없고 어지러운 상황이라 정치상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당 건설은 조직강화, 자기역량 강화를 위한 하나의 틀이고 방식일 뿐이다.
함께걸음: 장애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평가하는가?
리쳐드: 그렇다. 하지만 필리핀에는 시·청각, 지체 등 장애영역에 따른 조직이 건설되어 있지 않다. 교육, 노동, 이동, 생계보장 등 과제가 산적한데, 견고한 조직이 건설되어 있지 않아 합치된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그룹의 장애우들이 어떻게 힘을 모아 가는가, 하는 것이 과제다. 그래서 정당을 건설했다.
함께걸음: 한국의 예를 보면, 군소정당은 선거 시기에만 반짝한다. 당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는가
리쳐드: 물론이다. 장애우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정당이 꼭 필요하다.
함께걸음: 그게 꼭 정치적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한가?
리쳐드: 그렇다. 기존 정당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누구도 우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들의 존재를 무시한다. 정부도 시민도 마찬가지다. 독자적 행보를 하다가 기회를 봐서 연대할 것이다.
함께걸음: 이 정당의 역할과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
리쳐드: 중앙정부와 지자체에 장애우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통로이자 주체다. 우리 존재를 알린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
함께걸음: 비장애우들도 동의한다고 보는가?
리쳐드: 아직은 미비하다. 지금의 수준에 만족하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비장애우들과 함께 하겠다.
함께걸음: 이번 3국 교류가 필리핀 장애우들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리쳐드: 서로의 다른 문화와 운동의 경험을 교류하는 장이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장애차별 철폐와 인권확보를 위해 힘을 합치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이런 운동에 동참하도록 해서, 세계 속에 아시아 장애우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
함께걸음: 필리핀 장애우들의 가장 큰 바램은 무엇인가?
리쳐드: 현재 빈곤상황을 탈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교육에의 접근이 가장 필요하다. 자기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학교에서는 거부하고 있고, 관심도 없다.
함께걸음: 힘 있는 정당에 들어가 내부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한 듯한데, 그게 사회통합에 접근하는 것 아닌가?
리쳐드: 3년에 한 번씩 선거가 열린다. 매년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당 중앙의 활동이 하층까지 연결되고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겠다. 기존 정당 속에 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선거에서 장애우들의 힘을 느꼈다면 예전처럼 무시로 일관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풋(In Put)하겠다.
인터뷰·사진 홍여준민 기자
통역 정호용(대한보장구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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