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6주년 특별기획 함께걸음을 통해 본 장애우 운동사(1) /1988년
본문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
<함께걸음>이 3월 호로 창간 16주년을 맞는다. 창간 16주년을 맞아 <함께걸음>은 운동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돌이켜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지금의 장애우 복지는 어떤 토대 위에서 마련됐고, 장애우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장애우 운동은 어떤 궤적을 남기며 발전해 왔는가를 살펴보는 이 기획은 1988년부터 2000년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13년 간의 장애우 운동을 정리하는 이 기획은 애석하게도 처음부터 한계를 인정하고 시작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사안별로 사건별로 과거에 장애우 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지금도 장애우 운동을 하고 있고, 그래서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견해를 완전히 달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명 삼아 얘기하자면, 지금 시점에서 누가 장애우 운동을 정리하든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함께걸음>은 일차적으로 주관적인 입장에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함께걸음>을 중심으로 과거 장애우 운동사를 정리하기로 했다. 이 점 독자들의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그때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상황들이 지금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주된 관심사일 것이다. 그러면 1988년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많은 사람들이 1988년을 장애우 운동의 원년의 해로 꼽는다. <함께걸음>을 들춰보면 내부적으로는 1987년 12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설립됐고, 88년 3월 함께걸음이 창간됐다. 이 해 10월 88올림픽에 이어 장애우 올림픽이 열렸고, 또 한국장애인총연맹이 창립됐다. 그리고 이 해에는 그 후 함께걸음이 끈질기게 추적 보도한 시설 비리가 크게 문제가 된 해이기도 했다.
나열한 이 사건들을 중심으로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해보기로 한다.
연구소 설립과 <함께걸음> 창간“1988년은 장애우들이 대사회적으로 자기 입장을 밝히고 목소리를 높이며 싸운 첫 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 전에는 장애우들이 순한 양이었다. 가령 시위를 해도 밖에도 못 나오고, 김순석 열사 추모와 장애우 판사 임용 거부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정립회관 안에서만 시위를 했다. 그랬던 장애우들이 밖으로 나온 것은 87년 말 대통령 직선제의 영향이 컸다.”
당시 청년조직 ‘울림터’ 회장과 이어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약칭 전지대연) 회장으로 장애우 운동을 이끌었던 신용호(현 연구소 사무국장)씨의 회고다.
87년 말 노태우 씨의 당선으로 빛이 바래긴 했지만, 이 해 군사독재 정권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다.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계기로 각 계층의 욕구 분출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고, 장애쪽도 예외가 아니어서 청년 장애우들을 중심으로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 대선 공간을 활용해서 장애우 관련 양 법안인 고용촉진법 제정과 복지법 개정을 관철시키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장애우 운동이 대통령 직선제를 계기로 마침내 정치 참여를 시작한 것이다.
장애우 운동의 정치 참여는 대선을 앞둔 각 정당이 앞다투어 공약을 만들 때, 장애 계층의 요구라며 양 법안 제 개정을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가시화 됐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설립됐다. 역시 신용호 씨의 회고다.
“87년 12월 2일 울림터와 전지대연이 주도가 돼서 민주당과의 정책토론회를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에서 가졌다. 낮에 정책토론회를 하고 저녁에 명동 YWCA 회관에서 열린 연구소 창립식에 참석했다. 연구소는 이성재 변호사가 주축이 돼서 만들어졌는데 그때 이 변호사는 굉장히 신선했다. 왜냐하면 이 변호사는 주로 기층 장애우들 입장에서 문제 제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당과 정책토론회를 가지면서 장애를 가진 대학생들의 취업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했는데, 이 변호사 말이 취업이 어려운 장애우들의 취업 보장을 요구하면 대학생들은 당연히 취업되는 거 아니냐며 기층 장애우 입장에서 취업 문제를 제기하라고 조언했다. 이렇게 그 때는 계급적 관점이 중요했다. 그런데 그때 계급적 관점을 가지고 운동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계급적 관점은 얘기 안 하고 당사자주의를 얘기하면서 비당사자로 장애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자기 편의 속에서 규정들을 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연구소가 설립되고 얼마 후 바로 <함께걸음>이 세상에 나왔다. 함께걸음 창간에 얽힌 얘기를 들어보자.
“83~4년으로 기억한다. ‘밀알들’이라는 장애우 모임에서 장애우를 위한 교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주로 지체장애를 가진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나눠줬던 책인데, A4 사이즈였고 ‘밀알지’라는 타이틀 아래 장애우 교육지 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회지였다. 이 밀알지는 밀알들이라는 단체 내에 있는 교육연구부라는 곳에서 만들었다. 잠시 설명을 덧붙이면 밀알들이라는 이름의 단체는 주로 여수 애향원에서 수술을 받은 소아마비 장애우들이 중심이 돼서 만든 단체다. 이 분들이 사회 활동을 하면서 친목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 이름이 밀알들이었다. 그런데 모임이 사적인 친목도모로만 유지되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진 장애우들이 있었고, 이성재 변호사를 비롯해 의미 있는 활동을 하자는 생각을 가진 그룹들이 교육연구부에 모여 있었다. 열댓명 정도 됐는데, 몇 년 동안 교육지를 내다가 막판에 교육연구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좀 더 의미 있는 활동을 하기 위해 연구소를 만들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연구소 설립은 쉽게 합의했는데 밀알들 안에 연구소를 둘 거냐, 밖에 연구소를 둘 거냐를 가지고 논쟁이 컸다. 논쟁 중에 연구소는 독립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결론이 내려졌고, 그러면 밀알지를 어떻게 할거냐 고민하다가 연구소를 만들면 뭔가 사업이 있어야 하니까 이 사업을 연구소로 가져가자고 연구소를 만든 밀알들내 교육연구부가 합의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밀알들이라는 교육지가 ‘함께걸음’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잡지로 탄생한 것이다.”
김정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의 회고다. 그러면 밖에서는 <함께걸음> 창간을 어떻게 봤을까? 다음은 신용호 씨의 기억이다.
“그 당시 장애우들이 단체를 만들면 반드시 회지가 나왔는데 밀알도 회지였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거의 미담중심이었다. 회지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면 눈물에 호소해서 읽는 사람들이 후원금을 많이 내게 하는 거였다. 그게 오히려 장애우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걸음>이 장애우 전문 월간지로 창간되면서 내용도 장애우 입장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등 그 당시만 해도 진보적인 얘기를 실었다. 그 당시 요구가 이제는 본질적으로 장애문제에 접근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었는데, 이에 부응해 <함께걸음>은 진보적이면서도 본질적으로 장애문제에 접근하려는 고심이 보였고, 그래서 새로운 페러다임 형태의 잡지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애자의 대체 용어 ‘장애우’
그런데 <함께걸음>이 창간되면서 이 땅에 낯선 용어가 등장한다. 바로 ‘장애우’라는 단어이다. 이제는 고유명사가 된 장애우라는 용어는 도대체 어떤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신용호 씨에 따르면 “그 때 장애우를 부르는 법정용어는 심신장애자였고 보통 장애자라고 불렀다. 그런 명칭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이 변호사였다. 이 변호사뿐만 아니라 장애자라는 용어가 싫다는 게 전체 장애계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온 게 장애인이라는 명칭이었다. 장애우라는 용어는 이 변호사가 만들었는데 왜 장애우라는 용어를 썼느냐면 나환자를 나환우라고 부르는데 장애인 입장에서 듣기가 좋더라. 다른 의미부여는 없고, 장애자라는 말보다는 장애우라는 용어가 좋다. 이게 이변호사 입장이었다.”
이어진 김정열 씨의 회고에 따르면 “전우, 학우, 교우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장애우라는 용어도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함께 하는 거다 라는 의미 부여를 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때 연구소 임원들도 보면 장애를 가진 사람 반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반이었다. 모임을 가지면 장애를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지 말자 함께걸음도 함께 가자는 말 아니냐, 장애우도 함께 하자는 말이다. 그래서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때는 장애우라는 용어를 쓰면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장애자라는 용어를 쓰면 반장애고 장애인으로 쓰면 보통 운동하는 거고, 장애우로 쓰면 인권운동 하는 사람, 이렇게 구분되기도 했다.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장애계의 원로로 대접받는 한 인사가 연구소가 장애우라는 용어를 쓰길래 북한을 추종하는 젊은애들이 모인 곳인 줄 알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북쪽에서 동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연구소가 벗 우자 즉 동무라는 말을 사용하니까 연구소는 북한 추종 세력이라고 오해했다는 것이다.”
<함께걸음> 88년 3월 창간호를 읽어보면 ‘사이비 사업가를 척결하고, 장애 문제를 동정과 시혜에서 벗어나 권리로서 이해한다.’는 연구소 설립 선언문 내용이 실려 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명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16년전 그 당시만 해도 이런 선언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 청년들이나 내뱉을 수 있는 말로 치부됐다. 그만큼 장애우들에게는 희망이 전혀 없던 암흑시대였던 것이다.
기만적인 장애인 올림픽 반대한다 한 목소리로 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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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해 10월 88올림픽에 이어 열린 장애인 올림픽을 기만적인 올림픽이라고 규정하고 투쟁에 나섰던 장애운동의 그 뜨거웠던 현장을 살펴보자.
신용호 씨의 회고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장애인 올림픽을 활용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때 반성한 게 81년 세계 장애인의 해 때 굉장히 좋은 여건이었는데 장애우들이 얻은 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장애 운동의 역량이 안되니까, 주체적인 역량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그 좋은 여건을 활용하지 못했다. 이런 반성 속에 88년 올림픽이라는 굉장히 좋은 상황이 온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핵심은 고용촉진법 제정을 통한 장애우들의 생존권 해결과 노동능력이 없는 장애우들은 복지법을 통해서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자. 이 두 가지가 핵심이었다. 겉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웠지만 장애인 올림픽을 반대하는 뒤에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든 올림픽 전에 정치권으로부터 따내자. 이게 핵심이었다. 그래서 장애인 올림픽 조직위원회 점거를 시도한 것이다.”
이게 내적인 이유였고, 장애우들이 장애인 올림픽 개최를 반대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김정열 씨에 따르면 “드러난 올림픽을 반대한 이유는 그때 당시 장애 쪽의 예산이 한 해 50억원 정도였다. 그런데 정부가 장애인 올림픽에 쓰겠다는 예산이 230억원이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살고 있는 장애우들은 굶어죽을 처지에 놓여 있는데, 다른 나라 장애우들을 불러다가 잔치하는 게 말이 되느냐, 이게 반대 이유였다. 올림픽이 축제라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장애우들을 먼저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올림픽은 빛 좋은 개살구고 군사정권이 안위를 위해서 올림픽을 이용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런 올림픽에 장애우들이 들러리를 설 수는 없다. 이게 명확한 반대 이유였다. 그래서 장애우들이 서울 마포 의료보험회관안에 있던 장애인 올림픽 조직위 사무실을 점거하고, 올림픽이 끝나고 난 후에는 잠실에 있는 조직위 사무실을 또 점거했다. 그 배경에는 장애우라고 주어진 떡만 먹는 존재가 아니다. 도와주면 고마워하는 집단도 아니다. 우리는 체제에 반대할 수도 있고 정권에 다른 입장을 얘기할 수도 있는 계급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외침을 올림픽이라는 사회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대중적인 사안을 가지고 얘기한 것이다.”
이어지는 신용호 씨의 회고, “이성재 변호사가 88년 2월에 장애우 단체들을 소집했다. 우리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4월 20일 꽥소리라도 한 번 내자. 그래서 서울경인지역장애인단체협의회가 만들어졌고 4월 16일 명동성당에서 올림픽 반대 집회를 가졌다. 그런데 사회적인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서울 봉천동에 있던 삼육재활원에 점거농성에 들어갔고, 거기서 보름 있다가, 이게 안되니까 다시 올림픽조직위원회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우리는 88년을 통해 어떻게든 양 법안을 제개정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 법이 우리나라 장애우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을 때 진정한 의미의 올림픽이다. 올림픽의 참 의미는 장애우들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데, 결국 공항에서 잠실까지만 양탄자를 깔고 우리 나라 장애우들은 열악한 실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건 진정한 의미에서 올림픽이 아니다. 기만적이다. 이런 논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때 이성재 변호사가 역할을 많이 한 것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전에는 장애우들 중에 개인적으로 성공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누구든 판사 검사나 변호사가 되어 성공하면 보상심리가 있어서 그걸로 끝이었다. 개인적으로 장애를 극복한 거지 운동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 당시 장애쪽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모두 시설장이라든가 사회복지사들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거의 다 극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꼭 장애자라고 불렀다. 장애인이라고 불러달라고 해도 꼭 장애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변호사가 등장해서 급진적인 얘기를 하는 거였다. 그런데 실력이 없는 게 아니었다. 사시까지 했으니까, 그래서 장애쪽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이 변호사를 두려워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것과 이 변호사가 얘기하는 것은 강도가 달랐다. 그래서 이 변호사는 그 당시 청년학생들 쪽에서 보면 굉장한 우군이었다.”
“그때 이성재 변호사 나이가 서른 살이었다. 이 변호사 얘기를 들어보면 사시 붙고 성공하면 자기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변호사가 됐다고 해서 장애 문제가 극복이 됐느냐, 장애가 없어지고 다 해결됐느냐, 찬찬히 살펴보니까 사회는 여전히 자기를 장애우로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어떤 사람은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외면하기도 하지만 이 변호사는 본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장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강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변호사가 그 후로도 계속 장애 문제를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장애문제가 자기 문제였기 때문이다. 운동이라는 게 설득 당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문제로 다가왔을 때 생명력을 가지고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케이스가 이 변호사라고 보면 된다.” 김정열 씨의 말이다.
장애운동과 시민운동의 접목, 총연맹 창립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지만 88년은 ‘한국장애인총연맹’이 만들어진 해이기도 했다. 총연맹 창립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장애운동과 시민사회운동과의 접목이었다. 즉 총연맹 창립으로 장애운동은 고립을 벗어나 시민사회운동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 후 장애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장애 당사자 두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이철용 전 의원과 김성재 한신대 교수다.
당시 연구소 간사였던 김정열 씨의 회고다.
“연구소가 설립되고 6개월 후 연구소 이름으로 활동하는데 한계가 왔다. 그럴 찰나에 이철용 전 의원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나는 그때 이철용 선거 캠프에서 자원활동을 했었는데, 어느 날 이 변호사 전화를 받았다. 이철용 의원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변호사와 나 그리고 이철용 의원이 미아리 술집에서 만났다. 이철용 전 의원이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냐고 물으니까 이 변호사가 김정열을 보내달라, 그리고 국회의원이니까 가지고 있는 인맥을 연결해 달라, 이 두 가지 요구를 했다. 이 의원이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하더니 나중에 연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성재 한신대 교수였다. 당시 내 나이 27살, 이 변호사 나이 30살이었다.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애들이라고 무시당하고, 우리가 얘기해봤자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없고,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의 벽이 높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던 때였는데, 그때 김성재 교수를 만난 것이다. 김 교수가 문제가 뭐냐고 물어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장애 문제를 다 얘기했다. 그랬더니 김 교수가 그러면 너희들 갖고는 안 된다 이건 울타리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울타리를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때 김성재 교수는 민주화교수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문익환 목사님과 같이 통일운동도 하고 있었다. 그런 김 교수가 내가 울타리 만들어 줄테니까 너희들은 실무만 보라고 해서 연구소는 사무국 역할을 하기로 하고 장애인 총연맹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가 밑그림을 그렸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먼저 당시 인권변호사로 명성이 높았던 고 황인철 변호사를 장애아 부모 대표로 영입했고, 채규철 씨와 육병일 점자도서관 관장. 청각장애우인 강주해 목사 그리고 김 교수 이렇게 다섯 명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또 이사회는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띤 명망가들을 영입해서 이우정 이화여대 교수, 문익환 목사님 동생인 문동환 목사, 명진 스님, 손봉호 교수 등 쟁쟁한 인사들 15명으로 구성했다. 이사회에는 당시 재야로 불리던 평민연 사람들 반이 참여했는데 그래서인지 총연맹이 발족하면서 안기부에서 긴장해서 대책회의까지 했다고 들었다. 상임대표를 김성재 교수가 맡고, 이 변호사가 대변인, 그리고 내가 총연맹 사무국장을 맡았는데, 총연맹이 발족하면서 처음 한 일은 장애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장애 문제는 인권문제로 봐야한다는 게 김 교수 생각이었고, 그래서 장애우 인권헌장을 만들기 위해 총연맹 내에 인권헌정 제정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지금처럼 장애우 운동이 시민운동으로 갈 수 있었던 핵심적인 고리는 총연맹 탄생이라고 봐야 한다. 그때 총연맹에 참석했던 인사들이 시민운동과 장애운동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준 것이다. 또 총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이후 장애운동의 연합도 가능해졌다고 보면 되는데, 89년 장애 관련 양 법안 제 개정을 위한 공대위 구성에도 총연맹이 큰 몫을 했다. 연구소 이름으로 공대위 구성을 제안했으면 외면했을 단체들이 총연맹 이름으로 제안하니까 공대위에 참여한 것이다. 그 후 총연맹은 90년까지 활동하다가 91년 공대위가 제자리 잡으면서 발전적으로 해체의 길을 밟았다.”
<함께걸음> 88년 10월호를 보면 ‘묵묵부답에서 발생된 것이 난동으로 밖에 볼 수 없는가?’라는 제목 아래 국립재활원내 자립작업장에서 벌어진 비리를 다룬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를 시작으로 묻혀질 뻔한 장봉혜림원에서 장애우가 자살한 사건이 연이어 보도되어 있어 함께걸음의 시설 문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김정열 씨에 따르면 “그 전에는 누구도 장애우 시설 비리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처럼 집요하게 지면을 통해서 추적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함께걸음> 입장에서 보면 88년이 시작이었던 것 같은데, 그 후로도 계속 시설 비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연구소 설립 목적이 사이비 사회사업가를 척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구소의 시설에 대한 인식은 장애를 이용해서 장애를 상품으로 해서 자기 뱃속을 채우는 사이비 사업가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이비 사업가는 반드시 척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연구소 입장이었다. 그래서 조그마한 시설 비리가 터져도 무조건 취재를 나가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 후 <함께걸음> 기사의 상당부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시설 비리 폭로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89년, 장애 관련 양 법안 제 개정을 위한 장애우들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정리 이태곤 편집국장 / 사진 함께걸음 88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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