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경계를 두려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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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우리는 알프레드 비네로부터 시작된 지능검사의 탄생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비네는 자신이 개발한 검사도구가 지능이라는 타고난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직 교육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아동들을 선별해내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쓰이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네의 의도는 한 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세기 과학의 최대 오용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왜곡된 IQ 개념의 전 세계적 확산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경계급 정신지체장애우, 위협의 대상>
프랑스에서 개발된 비네의 검사도구를 미국으로 수입해서 IQ를 타고난 지능이라는 개념으로 탈바꿈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바로 고다드 (H.H. Goddard)입니다.
고다드가 활동하던 20세기 초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신지체에 대한 일반적인 카테고리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는데, 정신연령 3세 이하를 백치 (idiot), 3세에서 7세 사이를 저능자 (imbecile)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다드의 관심은 ‘병리가 뚜렷이 드러나는’이런 중도의 정신지체장애우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의 눈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사이에서 불명확하게 존재하는, 그래서 우리들 속에 숨어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고기능의(?)’정신지체장애우들이 사회의 가장 큰 위협으로 비춰졌습니다. 정신연령이 8세에서 12세 사이라고 규정되는 이 사람들을 위해 고다드는‘정신박약(精神薄弱, moron)’이라는 새로운 학문적인 명칭을 직접 발명해내서 이름을 붙여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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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이외는 모두 사회악(惡)’임을 정당화하는 수단, 지능검사>
고다드는 왜 이 고기능의 정신지체장애우(흔히 경계급이라고 칭하는)들을 사회의 가장 큰 위협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이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사회라는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유태인과 정신장애우에 대한 히틀러의 역사적인 대학살이 발생하기 전에 미국에는 이미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상대로 한 인종청소가 진행되었었습니다. 이 인종청소의 주인공은 유럽에서 건너온 앵글로 색슨계의 백인들이었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앵글로 색슨계의 신교도 백인남성들입니다.), 이들은 현재도 미국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인종세력입니다.
하지만 이 백인들이 미국을 지배하고는 있었지만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미국에는 이민을 본격적으로 제한하는 연방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전 세계의 이민자들로 급속한 사회인구의 변화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회지배세력인 백인들의 불안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과 급속히 유입되는 타인종의 이민자들 사이에서 지배계급인 백인의 순수한 혈통을 어떻게 유지해내고, 이민자들 속에 숨어있는 정신박약자들이 자행하는 범죄와 구걸, 매춘 등 각종 사회악으로부터 사회를 어떻게 보호해낼 수 있는가가 최대의 고민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고다드는 적어도 정신박약의 부적절한 이민자들을 걸러내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도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비네가 개발한 지능검사와 지능지수였습니다.
<사회보호 위해 정신지체장애우들을 가두어라>
비네는 자신의 검사도구로부터 산출되는 점수를 지능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고다드는 이 점수를 인간의 타고난 지적 능력을 나타내는 유일한 실체로 받아들이고 이를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이 검사를 통해 “정신연령이 8세에서 12세 사이인 모든 정신박약자들은 사회에서 분리시켜 시설에 수용해서 관리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후손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고다드류의 백인 이론가들에게 지능은 오직 유전의 산물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생물시간에 배운 멘델의 유전법칙이 기억나실 지 모르겠습니다. 멘델이 완두콩의 실험에서 발견한 것처럼 고다드는 정신박약자가 두개의 나쁜 열성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비해 게으른 노동자는 한 개의 나쁜 열성유전자와 하나의 정상 우성유전자를, 그리고 정상인들은 두개의 정상 우성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신박약이라는 이 나쁜 지능유전자를 미국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고다드는 멘델의 유전학을 근거로 유전자 번식을 막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자연스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정신박약자는 범죄자, 시설수용·강제불임 정당화>
히틀러처럼 가스실로 사람들을 몰아넣는 극단적인 방법을 제외한다면 정신박약자들의 번식을 막기 위해 역사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정신지체장애우들을 시설에 수용하여 집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제불임수술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전에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장애우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이 아직도 비공식적으로 널리 시행되고 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유래된 반인권적인 전통이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횡행하는 현실에 참으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정신박약자들을 시설에 수용해서 관리해야 한다’는 20세기 초 서구의 시대정신은 단지 이들의 번식(?)을 막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다드가 대변하고 있는 백인들 대부분은 범죄자들과 알콜 중독자들, 매춘부들 그리고 심지어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모두 정신박약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에 살펴보았던 두개측정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능과 사회범죄 사이의 그 끈끈한 연관성에 대한 신념은 적어도 지배계급의 머리 속에서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시설수용과 강제불임수술을 통해 사회 내부의 정신박약자들을 도태시키고, 지능검사를 통해 외부로부터 정신박약자의 유입을 막는다는 사회의 기본전략이 수립되면서, 미국사회는 이 기본전략들을 뒷받침할 법률적 체계를 생산해내게 됩니다. 1927년 미국의 대법원은 버크 대 벨 (Buck vs Bell) 사건에서 그 유명한 ‘저능아는 3세대로 충분하다’는 판결문구와 함께 정신지체장애우의 강제불임수술을 합법화하였고, 20세기 초 미의회는 정신박약자를 포함한 부적절한 이민자들에 대한 자격심사를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는 많은 제한입법들을 통과시킵니다.
<지능검사결과, 인구의 80%가 정신박약자?>
정신박약 이민자들을 가려내기 위해 실제로 고다드는 연구기금을 모금하여 자신의 연구원들을 이민수속이 진행 중이던 뉴욕의 앨리스 섬에 보내 이민희망자들의 지능검사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구결과를 보면, 유태인 출신 가운데 83%, 헝가리인 출신 가운데 80%, 이태리인 출신 가운데 79%, 그리고 러시아인 출신 가운데는 무려 87%가 정신박약이라는 아주 가공할 만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검사결과를 놓고 고다드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도대체 한 나라 인구의 4/5가 정신박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어야할지 난감해 했다는군요.
다음 호에서는 스텐포드-비네 지능검사를 만들어서 지능검사와 IQ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터먼 (Lewis M. Terman)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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