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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르포]또 다른 나라 대한민국 강남 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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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을 나와 길을 걷는다. 쾌청한 날씨인데도 얼굴 대부분은 물론 두 눈의 절반까지 마스크로 가린 젊은 여인이 지나간다. 감기에 걸렸나 하며 지나친다. 그런데 2분 정도 걸었을까? 똑같은 마스크를 한 청바지 차림의 어린 여학생이 지나간다. 햇살도 포근한 나날인데 무슨 일일까?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또 똑같은 마스크의 여인이 눈에 띈다. 백화점 지하 매장에 가니까 아예 마스크를 한 손으로 잡아 올리며 식사하는 여인까지 목격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별로 신기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그 지역만의 독감이나 바이러스가 존재하는 것일까?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리."
  1963년에 이르러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된 압구정동의 옛 이름이다.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강남구 압구정동"이라는 명칭이 등장했고,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압구정동은 하나의 시대적 고유명사로 대한민국 역사에 그 이름을 등록했다. "로데오거리"라는 표현 하나에 방송 매체는 구세주를 만난 듯 카메라를 동원하며 몰입했고,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와 청소년 들은 그 지역이 이 땅의 이데아이자 파라다이스라는 환상을 간직하게 됐다. 강남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칠십 년대 후반에 이사를 왔습니다. 당시에 부모님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이런 허허벌판에 친구도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게 정말 황당했으니까요."
  1978년에 이름 표현도 이상한 "압구정"이라는 동네의 신설 아파트에 이사 왔다는 박 아무개 씨(39), 그는 아직까지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의 압구정동을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아파트 몇 동이 황량하게 세워져 있고, 길 건너편에 상가 건물 두세 개가 있을 뿐,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게 밭이었어요. 저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발밑에 밟히는 송충이 때문에, 외출할 때마다 거의 공포로 지내던 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어린 나이에 길바닥 가득한 송충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르실 겁니다."
  이후 집값이 올랐다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이사 갔기 때문에 금전적인 이득이 어느 정도인지는 헤아려 본 적이 없단다.
  "요즘까지 살았으면 거의 두세 배는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아예 접고 삽니다. 별로 그리운 추억도 아닌데 미련을 갖고 살 필요는 없잖아요."
  다른 30대 중반 나이인 최 아무개 씨 입에서는 색다른 얘기가 쏟아진다.
  "구십 년대 초에 현역 제대하고 동사무소에 신고를 하러 갔습니다. 몇 년 동안 강원도 산 속에서 지낸 속칭 "군바리"가 뭘 압니까. 그냥 제대 신고를 하라니까 갔죠.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병역을 맡은 담당자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여자분한테 제대 신고하러 왔다고 얘기했죠. 그런데 그 여자분이 정말 군대에 갔다 왔냐고 재차 묻더니 뒤에 있던 남자들을 부르는 겁니다. "저…, 이 분이 군대를 갔다 오셨대요. 제대 신고를 하신대요." 그러니까 뒤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던 몇 분이 성급하게 앞으로 다가오시더군요."
  그때 동사무소 직원이 한 얘기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단다. 질문의 첫마디는 "정말 이 동네에 사느냐?"였고, 두 번째는 "왜 군대에 갔느냐?"라는 질문이 이어졌단다.
  "저도 어의가 없더군요.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죠.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와서 군대를 갔다."라고요. 그런 뒤에 무슨 신고서 같은 걸 적는데, 몇 장 안 되는 분량이라서 첫 장부터 살펴보니까 앞부분에 저의 형 신고서가 있더군요. 형이 제대한 게 86년인가, 87년인가, 그러니까 이 동네에서 그 사이에 군대를 갔다 온 남자가 몇 명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동사무소 직원이 "군대를 왜 갔다 왔느냐?"라고 묻는 동네가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요? 진짜 황당했습니다."
  강남 개포동 주공1단지 13평이 5억4천만 원, 대치동 은마아파트 31평이 7억 원, 도곡동 타워팰리스 57평이 15억 원……. 이런 계산이라면 평범한 봉급생활자가 한푼 두푼 열심히 모아서 강남지역에 아파트를 구입한다는 건 평생 요원한 일이다. 단순계산으로 아파트 값이 매년 10퍼센트씩 오른다고 치자. 30평 기준의 같은 평수라도 강남지역은 1년에 7천만 원이 오르고, 강북지역은 2천5백만 원이 오른다. 그리고 7억7천만 원이 된 아파트는 다음해에 7천7백만 원이 오르고, 2억7천5백만 원이 된 아파트는 2천7백5십만 원이 오른다. 똑같이 10퍼센트 상승이라는 비교만으로도 강남지역과 타 지역의 격차는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다.
  서울 4대문 안쪽이 중심지였던 60년대까지 한강 이남지역은 경기도 시흥군과 광주군의 땅이었다. 서울 성동구로 편입된 이후 70년대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주택지로 개발되면서, 1975년에 강남구라는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 1979년에 동부지역을 강동구로, 1988년 강남대로 서쪽지역을 서초구로 넘겨 주고,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리 신설됨으로써 서울특별시의 무게중심은 4대문에서 강남으로 이동하였다. 한강의 다리가 1969년 준공된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와 72년에 완공된 잠실대교뿐이었던 이 지역은 73년 영동대교, 79년 성수대교, 85년 동호대교 등의 연이은 준공으로 개발의 날개를 달았다.
  특히 1984년 5월에 최종 완공된 지하철 2호선의 등장은 강남 발전의 최대 동인(動因)이었다. 전 구역이 직교상의 넓은 가로망으로 기획 개발된 강남지역이기에, 그 중심을 지나는 지하철 2호선의 역할은 각 역마다 고유의 문화를 탄생시키며 급속한 변화를 일구었다. 3호선과 7호선, 최근 들어 분당까지 직접 연결되는 분당선이 완비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수도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모든 부분에서 강북지역과 대비되는 차이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계기로 강남지역이 특별한 곳으로 상징되게 된 것일까.
  "팔십 년대를 맞으면서 여유로운 주거 환경을 선호하던 중상위 계층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습니다. 민주화 열기가 절정에 다다랐던 그 시절, 현장에서 투쟁하던 삼팔육(386) 세대가 있었다면, 이 지역의 삼팔육 연령들은 시대상황에 거리를 두고 많은 이들이 유학을 떠났죠. 그래서 당시 강남지역에 병역을 마친 젊은 남자 비율이 낮아진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그때 유학을 갔다가 서울올림픽 이후 귀국을 한 이들이 여유자본과 해외 경험을 토대로 압구정동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 자신들만의 문화를 펼치기 시작했고, 그것이 로데오거리로 상징되는 오렌지족 문화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혼한 뒤 재유학과 이민 등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청담동을 중심으로 한 여피족 문화를 탄생시킨 겁니다. 즉, 부유한 가정 환경을 토대로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화 쟁취 투쟁 등의 현실에 무관심하면서, 자신들만의 부와 명예를 확대 재생산시켰던 것이죠."
  강남지역 문화를 집중 취재했던 모 일간지 박 아무개(38) 기자의 설명은 강남지역 특성의 이해를 간단하게 돕는다. "여피족"이라는 용어가 바로 현재의 강남인 것이다. 젊은(young), 도시화(urban), 전문직(professional)의 세 머리글자를 딴 "YUP"에서 생겨난 "여피족"은 "신세대 가운데 고등교육을 받고, 도시 근교에 살며, 전문직에 종사하여 연 3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일군(一群)의 젊은이들"을 의미한다. 가난을 모르고 자랐으며, 개인의 취향을 무엇보다 우선시하고, 사회적 광장(廣場)에 중점을 두는 전통적 규범보다는 개인적인 밀실(密室)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방송 연예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속 인물들을 보면 여피족의 생활이 어떤지 상세하게 드러난다. 유학 생활은 기본으로 거쳤고, 고위직의 부모님 밑에서 자라 귀공자풍의 외모와 의상을 갖췄으며, 여행과 스포츠 등의 레저 생활에 적극적이고, 웬만한 전셋값에 육박하는 수입차를 몰고 다닌다. 대인관계와 연애가 자유로우며, 틀에 얽매는 조직이나 규율을 거부한다. 일반 가정의 한 달 생활비에 맞먹는 속칭 "명품"으로 입고 신고 먹고 마시며, 일반인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교류를 통해 고급 문화와 유흥을 향유한다. 일반 시청자들이 매일 방송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바로 여피족의 삶이며 강남의 문화인 것이다.
  "우리 손님들은 격이 달라요. 충분히 배울 만큼 배웠고 예절과 교양이 확실해요. 여긴 아무나 오는 데가 아니죠. 다른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한눈에도 구분이 된다니까요."
  청담동에서 바(bar)를 운영하는 이 아무개(40, 여) 씨의 언급에는 "강남"에 대한 중요한 키워드가 담겨 있다. 자신들을 선택된, 특별한, 남들과 다른, 우월한 계층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타 지역과의 차별성을 매사에 강조하며, 스스로의 엘리트 의식을 자부하고 사회적 지위에 만족한다는 것, 그건 이미 대한민국 안에 계급과 계층이 부지불식간에 생겨났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격차는 갈수록 커져서 서로 간에 "건널 수 없는 다리"이자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으로 고착화된다는 게 더 큰 문제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다고 그래요? 여기에도 그냥 똑같은 시민들이 사는 거예요.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 다니고 집안 살림 하는 건 다 똑같은데, 왜 자꾸만 문제 있는 지역인 양 매스컴마다 난리를 치는 거죠? 집값이 조금 비싸다고 모두 사치스럽게 사는 줄 아세요? 그만큼 잃는 것도 많다는 걸 넓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전업주부라는 강 아무개(39) 씨의 반론은 맞는 말이다. 사는 지역의 특성상 교육 전쟁에 아이들은 천진한 웃음을 잃어가고 있고, 꽉 막힌 도로 사정 때문에 불편 또한 상당하다. 더욱이 강남에 산다는 이유 하나로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 대인관계에 엇박자를 내기도 한다. 거주자의 90퍼센트 정도는 다른 지역과 똑같은 보통 서울시민이라는 말도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전체 서울시민의 1퍼센트도 안 될 극소수의 부류에게 이 사회의 문화적 기준점을 삼는 방송과 언론의 행태는 분명 큰 문제일 수밖에 없다. 기준점을 특정 계층과 지역에 맞추다 보면 삶의 행태도 뒤바뀌게 된다. 그렇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평생 벗어나지 못할 굴레로 머물러야 한다는 이분법만 남는다. 타고난 개성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키우고 가꾸려 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연예인 누구와 똑같은 얼굴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커다란 마스크를 쓴 여인들을 길거리에 쏟아내고 있다. 멀쩡한 눈과 코와 턱에 칼을 대고 버젓이 대낮의 거리를 활보하는 젊음들은 과연 어떤 내일을 꿈꾸고 있을까.
  사회의 표준이 없는 세상, 정신적 중심이 없는 나라는 갈수록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며 총체적 함정에 빠져버리는 법이다. 늘 보고 듣는 게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단위뿐이니, 묵묵히 오늘을 사는 국민들은 현실의 장벽 앞에서 한숨만 늘어나는지도 모른다. 단지 특정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집값 폭등에 의해 수억을 벌어들이는 세상이 당연시된다면, 인생 대역전을 노리는 한탕주의밖에 도피처가 없을 것이다. 현실과 현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며 거시적 대책이 시급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양분법 내지 이분법의 잣대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 글·사진 채지민 (소설가)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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